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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2,3)

세례 요한이 주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천국)에 대해 그리고 그의 다스리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보통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뱃속에서부터 그리고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만큼 그리스도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고 요한만큼 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참 선지자(선지자보다 나은 자)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증거하기까지 하셨다. 그가 선지자(예언자) 중의 선지자요 여자가 낳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자인 것은 그가 가장 크고 궁극적인 사실 곧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결정적으로(최종적으로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7-10)

그러나 요한은 불행하게도 그가 증거하고 예언한 그 나라에 직접 참여하여 누리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니었고 그의 몫(분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몫으로 남겨졌다. 요한은 다만 천국을 '전하는' 자로, 천국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자로 그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바로 문턱까지 갔지만 막상 그가 고대하던 그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것과 같다. 그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가나안 정복과 가나안에서의 새 삶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몫으로 넘겨졌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의 당사자는 참으로 안타깝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한다고 실컷 고생한 사람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정작 누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니 불행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다 각각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자기 역할이 있고 자기 은혜의 분량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 이 말씀은 신약에 속한 우리가 구약의 여러 위대한 신앙 인물들보다 더 복된 삶을 살고 있으며 더 복된 시대를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아들이며 그들의 열매이다. 우리 시대의 이 (천국) 누림은 그들의 소망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복된 삶이 없다면 그들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오늘의 우리가 옛 사람들보다 더 복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옛 사람들이 억울해 할 것은 없다. 더 낫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본 우리가 하는 말이지 이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옛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 시대에 큰 은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자체야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양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좋아지고 완전해진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누린 것보다 이삭이 더 많은 것을 누렸고 이삭보다 야곱이 더 많은 것을 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더 많은 것을 누렸으며(율법을 받았으므로) 그들보다 다윗이 더 많은 것을 누렸다.(새 언약을 받았으므로)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보다 오늘 신약에 속한 우리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다.(약속의 실체를 받았으므로)

이것은 하나의 원리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언제나 제일 뒤에 오는 사람이 제일 좋은 것을 누린다. 본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4:38) 땀 흘려 씨 뿌리고 농사지은 사람은 가고 없고 그 뒤의 사람이 결실을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흔한 일이다. 이것은 부모의 고생으로 자식들이 잘 사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부모는 억울하고 자식은 터무니없이 호강한다고 말하면 안된다. 누구는 억울하고 누구는 복된 것이 아니라 둘 다 복된 것이다. 왜 그런가? 그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크게 보면 다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 안에서는 앞의 사람이나 뒤의 사람이 다 하나이다. 그러므로 선인이 길을 닦고 후대 사람이 그 길을 이용하는 것 또는 선인이 나무를 심고 후대 사람이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은 마치 젊은 날의 내가 고생해서 이루어놓은 것을 늙은 날의 내가 누리며 안락한 삶을 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약속(그리스도)을 기다리며 인내하던 구약 성도들이나 그것을 누리는 오늘 신약의 우리나 다 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며 한 생명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이 다르고 분량이 다를 뿐이다. 그것은 뒤로 갈수록 더 좋아진다.  

요한은 천국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한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목숨을 바쳤다. 그에 비해 오늘 우리는 천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이 누려보지 못한 천국을 누리고 있으며 천국에 대해서도 그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억울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요한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시대에 (주관적으로) 우리 못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오늘 (가난한 서민인)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조선시대의 부자나 고관대작들이 누린 것보다 더 풍성하다. 그러나 그 시대의 부자들이 불행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억울해 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 시대에 충분히 풍성한 생활을 누렸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 우리는 그들이 불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 우리 시대의 좋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에 비해 작게 느껴진다.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가난하고 작은 자였다.  

이런 차원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모든 자 중에 가장 큰 자일지라도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사실 요한은 오늘 우리의 지식이나 누림과 비교할 때 천국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전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는 (누려)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하는 것과 누리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말하는 것과 누리는 것이 다를 뿐 아니라 말하는 것과 아는 것도 다르다. 말한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실제로 누려보고 깊이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술사 발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에 대해 엄청난 축복의 예언을 해 놓고는 나중에 그 말(지식)과 정반대가 되는 행동을 하다가 망했다.
그는 모압 왕의 사주를 받아 모압 광야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저주 대신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말았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23:7-10)

이 얼마나 합당하고 좋은 말인가? 발람은 이스라엘의 복된 미래(운명)를 정확하게 아는 자와 같았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 놓고 행동은 정반대로 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그 저주할 수 없다던 이스라엘, 망하게 할 수 없다던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려고 교활한 수작을 부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행으로 유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하게 하려고 했음)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 보건대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안다고 한 것도 실제적으로는 전혀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알았고 그들을 해롭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과 아는 것 그리고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 그리고 아는 것과 누리는 것은 다 별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례 요한이 천국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과 발람이 천국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발람은 천국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의 관심은 돈과 명예밖에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하게 하심을 따라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천국(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읊었을 뿐이지만 요한은 단지 천국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전파하는 자였고 더 나아가서 그 자신 천국을 기대하고 열망하는 신자였다. 그는 천국에 대해서 발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았다. 그러나 요한 역시 천국의 구체적 실체에 대해서는 온전히 알지 못했으니 그것은 그가 거기에 직접 참여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의 몫은 오직 그리스도와 천국의 길을 예비하는 것까지였다.  

누구든지 실제로 겪어 보지 않고는 그것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바울은 이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전파하는 복음에 대해 단지 전하는 자가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누리는 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단지 전도자의 위치에만 서지 않고 참여자의 위치에 서려고 노력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3-27)

어쨌든 요한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의해 (다만 천국의 예비자로서 활동했을 뿐) 천국에 참여하지는 못했다(이 말은 물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요한은 천국이나 주님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았지만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천국을 실제로 누릴 수는 없었고 따라서 천국의 실체도 분명하게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는 완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주님과 천국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제자들을 주님께로 보냄으로써 주님께 묻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의문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로 직접 주님께 가서 해답을 얻어오도록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자신이 의문을 가졌을 수도 있다. 주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만일 요한이 주님에 대해 그리고 천국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면 어떤 의문을 가졌을까? 그는 어디서 혼란에 빠졌을까? 직접 천국을 겪어보지 못함으로써 그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주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세상에 임했지만 아직 세상에 완전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즉 세상이 의와 진리로 완전히 새롭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을 수 있다.

요한은 주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것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천국에 대한 요한의 이해는 주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과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짐작컨대 요한은 천국이 도래하면 즉각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철저하게 시행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한 자들(헤롯과 로마 군대와 그 일당들, 이방인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즉각 심판을 받아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벌어지는 일은 단지 천국에 대한 말씀 전파와 거기에 동반된 몇 가지 표적들뿐이었다. 어떤 세력도 규합되지 않았고 어떤 조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악인들도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은 '주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 천국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결국 앞의 의문과 관련된 것이지만 좀 더 개인적인 것으로서, 요한은 왜 주님이 자기를 헤롯의 손에서 꺼내주시지 않으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을 수 있다. 천국이 임했다면 악한 자의 부당한 손길 아래 묶여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놓임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요한은 지금 악한 무리의 손에 목이 날아갈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물론 죽음 그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요한은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천국을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이 임했음에도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임하셔서 다스리시고 사역하시는데 여전히 악이 횡행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며 의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요한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감옥에서 요한은,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인지 그리고 자기가 증거한 이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메시아)인지 아니면 아직 때를 더 기다려야 하며 또 다른 사람을 (메시아로)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옥에서 죽지 않고) 나중까지 살아서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면 의문과 혼란은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여러분이 요한의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우리는 이런 시험에 봉착하지 않을 것인가? 오늘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보호하심과 그 (보호하시는) 능력에 대해서 아무 의문이 없으며 그의 일하심에 대해 아무 의문이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이 요한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셨는가를 볼 필요가 있자. 주님의 답은 이러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사람이 그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임하셨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 즉 천국이 왔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생명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생명 회복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에 때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는 것과 같은 표적이 동반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저주 속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다른 표적들은 하나님의 생명(구원, 인간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뒷받침하는 보조적 표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낳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영)이 사람 안에 역사하면 그 죽을 몸도 살리심을 얻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그러므로 요한의 제자들이 그들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들 곧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는 등의 모든 역사는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하사 모든 회복(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요한이 어떻게 이해했든 천국은 임했으며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의 일을 하고 계신다. 다만 때와 방법에 있어서 요한이 생각했던 것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한이 오해(혼란) 없이 이것을 이해하기 원하셨다.

오늘 우리도 요한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문들은 우리가 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천국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전개되며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천국(구원)이 임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6)

아마도 요한은 주님으로 인해 어느 정도 실족했던 것 같다. 사실 요한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실족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요한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그리고 하나님이 오셔서 다스리며 구원하고 심판하시는데 왜 나는 감옥에서 죽어가야 하는가' 하는 바로 이것이 요한이 직면한 시험이다. 아까 여러분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것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의 구원이 여러분에게 임한 것인가 임하지 않은 것인가? 그리스도가 진정 우리의 구원자요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가? 만일 그리스도가 참 구원자이고 그가 나를 구원했으며 그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면 왜 나는 여전히 가난과 질병과 억압과 고통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여러분은 답을 얻었는가?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일을 (오해가 되게끔) 잘못 처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모든 상황을 자기(나) 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요한의 경우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민과 혼란은 바로 이런 잘못된 시각(지식)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솔직히 온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육신적) 형편에 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는 이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주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천국의 전개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나 자신의 형편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즐거우면 우주도 다 잘되어가고 있는 것이고 내가 괴로우면 우주도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감옥에 있고 내가 목이 떨어지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임했으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어디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바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만물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을 고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중심적으로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정하심)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두시고 이런 일을 하게 하시며 이런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을 하고 있을 수 있으며 우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우리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뜻에 따라 배치하시고 안배하심으로 생겨난 상황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이 모든 것들을 육신적으로 좋게 여기거나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필요(나라)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 유익을 위해 꼭 필요해서 그것을 조성하셨음을 믿고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신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멸망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소유)가 되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쓰여지는 인생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나 썩어질 것들을 위해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목적(하나님을 찬송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일을 하는 것)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경륜이며 정하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정하심, 뜻)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은 정하심(안배)들을 또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정하심이란 곧 어떤 사람은 편하고 평범한 자리에서 주님을 찬송하며 증거하도록 자리 지워졌는데 어떤 사람은 고통스럽고 특별한 자리에서 주님을 찬송하고 증거하도록 자리 지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왜 옆의 형제는 의사로서 주님을 찬양하며 섬기는데 나는 환자로서 끙끙 앓으며 주님을 찬양하고 섬겨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의문이며 불평과 혼란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물을(따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며 또한 우리의 지혜(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항의할 수 없고 물어도 소용없다. 주님이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성경에 우리의 대부분의 문제의 답들이 나와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왜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상황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신 분을 아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이해 안 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자기를 보니까 문제의 해답이 안 나오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 보라. 은혜는 사람의 손을 통해서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고 키우기 위해 부모의 손을 빌어서 역사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고생과 수고의 역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구원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을 여러 모로 수고하게 하고 인내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셨다.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괴롭고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들에게 역사하셔서 되어진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참게 하셨다. 그들로 우리가 범죄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답답한 일을 할 때 우리를 때리거나 버리지 못하게 막으시고 인내로 기다리게 하셨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며 섬기도록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만들고 진리를 알게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되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 경륜으로 인해 우리는 유익을 얻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참고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을 우리는 아는가?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보람 있는 일들이겠지만 상대방에게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손실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그런 고통과 인내의 자리에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합당한 인생을 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신에게 이러한 일을 허용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원리를 안다면 우리는 아무 일에든지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신 자리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섬김과 희생 위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또한 오늘 우리의 가난과 고생과 특별한 체험 속에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며 그런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며 더 굳게 짜여져 가는 것이 합당하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2-15)

이 말씀대로 세례 요한은 과연 천국을 연 사람이다. 그로부터 천국은 빗장이 열리고 문이 열려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베드로도 나중에 같은 말을 들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천국 문을 연 것처럼 천국 열쇠를 쥔 자가 되어 동일하게 천국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요한이 연 천국 문과 그리스도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연 천국 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 베드로는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천국을 열었으나 세례 요한은 단지 사람들 가운데서 천국이 전개될 수 있도록 예비 작업을 했을 따름이다.

오늘 우리는 요한의 특별한 은혜(위치)와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요한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요 최고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위치에 있게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들 중 마지막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다음 사람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그가 전개한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누렸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셨고 천국이 그렇게 세상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감옥에 있었던(그리고 결국 죽음을 당했던)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아직도 왜 요한이 그런 상황에 있었어야 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그 이유가 어느 정도 짐작되기는 한다.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역에 방해나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배려, 조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만일 요한이 세상에 나와서 계속 활동을 하게 되었다면 틀림없이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 지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해하고 펼치는 그러한 천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큰 선지자로 알고 추종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과 요한의 사역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방지하실 필요가 있었다. 요한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아마도 요한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피로서 하나님(하나님의 의)을 증거하도록' 운명 지워졌던 것 같다. 그는 그동안 말로서 주님을 증거했으나 최후에는 아벨처럼 피로서 간증하도록 규정 지워졌던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것이다. 의인의 죽음은 세상을 심판하고 마귀를 심판할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가장 견고하고 효과적으로 건설해오셨다.

어쨌든 요한에게는 이러한 특권과 한계가 있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이러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자도 아니며 가장 큰 자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의 위치(직무, 일)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에 있었던 사람들 곧 우리를 위하여 일했던 사람들과 우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큰 자이며 더 복된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온전함을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히11:40)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우리 자리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조용히 희생하며 순종해야 한다. 감옥에 있다 하더라도, 목이 곧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합당하십니다. 하나님이 다 잘 하십니다" 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가보면 그것밖에 선택의 길이 없었으며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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