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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7-10)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내신 사람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그리스도와 천국을 소개하며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푸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활동을 예루살렘이나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성에서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행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과 같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다. 그가 광야에서 사역했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사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사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권위를 말해준다. 그는 스스로 백성들 위에 선지자 된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 선지자로 세운 사람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눅20:4-6)

주님의 질문에 대한 바리새인들이 이 대답은 이스라엘의 대다수 백성들이 요한을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정체성은 분명한 것이다. 스스로든 다른 사람이든 요한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명백한) 요한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 말씀은 요한이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지경에 놓였음을 시사한다. 요한이 타락했다거나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심령이 견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자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 번도 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선지자라는 이미지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선지자는 강하고 담대하며 견고하다.

요한은 왜 흔들렸는가? 그는 자기를 알았고 그리스도를 알았으며 천국에 대해서도 알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국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으며 어디서 흔들렸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지난 주에 충분히 다루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혼란의 원인을 짚을 필요가 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지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던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 역시 선지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선지자에게는 선지자의 위치(삶의 자리)가 있고 세상의 부자들과 권세자들에게는 그들대로의 위치가 있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옷을 추구하는 자 곧 세상에 소망을 두고 육체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것을 얻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고 선지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 혼란이나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 다 각기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이다. 왕이나 세상 권세자들이 의와 진리로 치장할 수 없듯이 선지자가 부드러운 옷(편안한 삶)으로 치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며 마땅한 것이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39-58)

우리도 흙에 속한 형상(아담의 생명)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편하고 싶고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친 광야에서 메뚜기나 잡아먹으며 짐승 가죽을 뒤집어 쓰고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생 끝에 감옥에서 목이 달아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세례 요한도 우리도 왕궁에서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며 부드러운 옷을 입고 편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아담의 생명)만 입은(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입을 것이다(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가 두 소망과 목표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고 또 한편으로 영혼이 잘 되기를 원하는(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하는가?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0-53)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는, 우리가 지금 우리 안에 땅에서 난 것(아담의 생명, 혈과 육)과 하늘로부터 온 것(그리스도의 생명)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 이 두 가지가 항구적으로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땅에서 난 것은 없어지고 하늘로부터 온 그것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세상에서 아담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남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육신대로 사는 사람 곧 아담의 생명(욕망)대로 살며 육신의 안락과 정욕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오직 육신을 가진 지금에도 오직 영의 욕망대로 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자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요한이 혼란에 빠진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천국이 임했는데(의와 진리의 세상이 왔는데) 그리고 자신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인데도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형편만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전반적으로 의인들은 여전히 득세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있으며 악인들은 여전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에서 거닐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이것은 결국 아직은 의인이 (육신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은 선지자(하늘에 속한 자)는 광야에서 의와 진리를 외치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땅에 속한 자)는 왕궁에서 탐욕과 정욕을 발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2,53)
머지 않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 모든 모순과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처음 정하신 뜻이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하나님의 사람은 반석과 같은 존재이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대와 같이 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그 안에서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사실(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펼쳐가시는 현실이 참 현실이다. 역사는 사람이 엮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엮어가신다. 우리는 이 진리에 정통하고 확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다스리고 의와 진리가 온 세상을 덮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반드시 실현될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인가? 왜 그리스도가 왔는데도 의와 진리의 세계가 전개되지 않는가? 왜 천국이 임했는데도 신자들이 여전히 고통을 당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며 천국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지 않는가? 이미 그 모든 것이 왔는데 왜 세상은 여전한가?

먼저 말해 둘 것은 세상은 여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오신 후 세상은 변하고 있으며 의와 진리로 점령당하고 있으며 마귀는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의 영역은 좁아지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중간기를 두시는가? 천국을 단번에 실현하시지 않고 이렇게 단계를 두고 실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명확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3-15)

우리는 일이 이렇게 풀어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분명한 진리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옥중의 요한처럼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은 주님의 이러한 대답을 듣고 혼란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안식했을 것이다. 오늘 요한처럼 자기의 괴로운 처지로 인해 혼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의문이 벗어지고 빛 가운데서 안식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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