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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다. 새해가 시작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다 지난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은 어떤 소감을 가지는가? 이 한 해 여러분의 세상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무엇을 좀 해 놓은 것 같은가? 무엇을 좀 남긴 것 같은가?

한 해를 다 보내는 시점 혹은 나이가 들어서 인생 자체를 거의 다 보낸 시점에 서게 될 때 아무 생각 없이 덤덤한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혹은 '세상 사는 것이 이런 것인가? 참 허무하구나' 하고 느낀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자기가 세상(삶)에서 별로 해 놓은 것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장관이나 재벌 그룹 회장처럼 사람들이 알아주는 굉장한 일을 하며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이런 시점에서 아마도 '참 바쁜 한 해였구나' '정신 없이 살았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 하느라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나,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 하는 말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회한과 감정은 세상과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세상에 있지만 사는 영역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터전, 우리의 분깃(몫)은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을 좀 했다면 무언가 뿌듯하고 올 한 해는 내가 꽤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고, 그렇지 못했다면 왠지 헛 산 것 같고 '해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는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은 육신에 속한 사람의 생각이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생각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오늘 주님은 한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세상에서의 위치를 말씀해 주고 계신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6-19)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세상이 주님에 대해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왔지 세상을 사랑(인정, 칭찬)하고 같이 놀아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은 지금 타락하여 망해 가는 중에 있으므로 주님은 세상에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빛을 비추며 세상을 건지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한편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해주고 좋다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세상은 주님은 한편으로는 필요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싫어하고 배척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고 의와 진리를 따라 자기의 길을 갔다. 그는 세상을 사랑(구원)하러 왔지 세상의 사랑을 구하러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상은 주님을 더욱 배척하였고 마침내 죽이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 비유에서 유대인들은 주님을 어떻게 비난하고 있는가? 그들은 주님을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로 비방했다. 이렇게 비난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율법을 어긴 패역한 자식' 곧 사형에 해당하는 방탕한 자로 몰아서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것이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신 21:20,21)

이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비난인가? 주님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나온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거기서 이름을 내고 인정을 받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느낄 장소라고 생각하는가?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바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세상이 우리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너희는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다. 아이들은 동무들에게 '남의 흥을 깨뜨리는 자식들'이라고 소리친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마11:17, 눅7:32)

이 상황을 조금 설명하면 이렇다. 길에서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놀이를 하려고 한다. 이때 남자아이들은 결혼식 놀이를 하려고 하고 여자아이들은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한다. 남자아이들은 이렇게 동무들에게 소리친다. "우리가 결혼식 놀이를 하려고 했지만 너희는 흥겨워하지 않았다." 또 여자아이들은 놀이 동무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우리가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했지만 너희는 함께 울지 않았다."

아이들이 추구한 것은 내가 피리를 불면 동무는 춤을 추고 내가 애곡을 선도하면 동무는 같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이다. 이것는 곧 자기는 구경꾼 노릇을 하거나 혹은 편하게 앉아서 쉬운 일 하는 역할을 맡고 동무는 힘드는 역을 맡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무들이 그렇게 착착 움직이지 않으니 비난한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신 것이다.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너희는 바로 자기들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추지 않는다고 자기 동무들을 향해 흥을 깨뜨리는 자라고 비난하는, 이기적이고 지배욕에 가득 차 있는 아이들과 같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직면한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너희는 겸손하게 그들을 수용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들을 비판하고 책잡아 거절하기에 바빴다. 너희는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먹고 마시며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애통하지도, 금식하지도 않는데 세례 요한은 금식한다는 이유로 그를 귀신들렸다고 했다. 또 너희는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보다 못한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죄인이라 부르며 거절하고 차별하며 그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는데 나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식탁을 같이하며 함께 즐거워한다고 내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방탕한 자라고 비난하며 나를 거절했다."

"아무 것도 너희에게는 맞지 않다. 너희는 회개의 설교를 해도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하고 천국 복음을 전해도 우리와는 관계없다 한다.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날, 심판의 날이 너희에게 다가왔는데 너희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들에게 이같이 트집만 잡고 있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지혜는 그 행한 일을 통해 옳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내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생명의 역사가 바로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요 너희의 심판자임을 증명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이렇게 끝까지 거절하며 하나님의 부름과 최후 통첩을 무시하느냐? 세례 요한이 스스로 금식하며 너희들에게 애통과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푼 것이 바로 하나님의 최후 통첩임을 알지 못하느냐? 또 내가 와서 천국 잔치를 배설하고 죄인들을 불러 함께 먹고 마시는 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최후의 통첩임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추구하고 진리를 나타내려고 할 때 자기들의 어두움이 드러나고 정죄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런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격렬히 비난하며 저항한다. 별난 놈들이라느니, 미쳤다느니, 혹은 거짓되고 형식적인 율법을 들이대며 진리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지 자기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든지 괘념치 않고 오직 자기 할 일을 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요 오직 하나님을 대하여만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으로 사는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만 산 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세상사(世上事)로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잘 살고 못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고 어떻게 순종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인정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주님을 따라가는 가운데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세상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비난이나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해서는 안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의 합당한 태도는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주의하는 것이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무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소위 정상적이거나 흠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살거나 죽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전부이고 그 육신의 목숨과 건강, 돈과 쾌락이 전부이므로 그것이 없어지거나 무시당하거나 하면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고 저항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들에게 맞추어주면 그렇게 좋아하고 우리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렇게 싫어한다. 우리가 그들을 틀렸다고 하거나 특별히 비난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들과 다른 길을 가기만 하면 그 자체로서도 견디지 못한다. 그만큼 그들은 약한 것이다. 그만큼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요 여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걸려 있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마치 100억의 돈을 가진 부자가 100만원을 잃어버려도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과 같다. 세상은 100만원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걸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에 맞출 필요도 없고 세상이 우리를 그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고 비난해도 놀라거나 요동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사업 상 잠깐 타향을 방문한 나그네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몸과 마음을 붙이고 살아서는 안된다. 세상의 나그네로서 우리는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과 관계치 않으며 그들의 생각을 따를 필요도 없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1)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교회)의 위치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교회)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세상을 버린 사람이다.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버렸는가? 이사 가고 이민 가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 버린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세상에 대해 죽어버렸기 때문에 버린 것이다. 시체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흔히 죽은 사람에 대해서 '세상 버렸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말할 때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세상과는 끝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환경)에 대해 그리고 죄에 대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사람 사는 환경도 의미가 없는 것이고 사람이 짓는 죄도 지을 수 없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율법에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전혀 이전 사람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삶과 무관하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인도만을 받고 사는 사람이지 세상 원칙이나 방식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세상에 대해 단지 이방인 혹은 나그네에 불과하다.

우리는 세상의 삶의 목표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세상의 삶의 방식과 다른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세상이 기뻐할 때 그들과 함께 기뻐할 수 없는 때가 있으며 세상이 좋아서 좇아가는 것을 거들떠보지 않을 때도 있다. 반면에 세상이 슬퍼하며 낙심할 때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기도 한다.

가는 길이 다르므로 우리는 세상과 길을 같이 갈 수도 없다. 기쁨도 같이 할 수 없고 슬픔도 같이 할 수 없다. 그들이 기뻐할 때 우리는 담담하며 그들이 슬퍼하고 낙심할 때 우리는 도리어 기뻐하며 소망 중에 거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고 또 부응할 필요도 없다. 또 우리는 세상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에게는 세상의 길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길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와 세상의 관계를 고후6:14-18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긋는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이러한 분명한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독특한 지위를 알아도 그렇게 세상과 분리되어 따로 사는 것이 외롭고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색은 천국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산다. 그들과 함께 세상의 되어지는 형편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세상과 하나가 되어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세상의 우리의 소망이 아니다. 세상의 우리의 터전이 아니며 우리의 장(場)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낼 수도 없고 아울러서 그들의 존재와 일 또한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주지 못한다. 우리는 같은 땅에 살고 있지만 서로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 불러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이상한 놈이다 재수 없는 놈이다 하고 욕함으로써 우리가 참으로 이 복된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니 더욱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를 이 놀라운 세계 곧 세상을 넘어서 있는 이 세계 안에 머물러 있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시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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