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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두 주에 걸쳐 생각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그리고 진리의 말씀은 아무나 깨닫고 동조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빛)을 받은 자들 안에서만 깨달아지고 영접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봄으로써 또 다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람의 행한 일은 오직 그 일의 결과(열매)를 통해서만 그 성과를 판정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어떤 말이 참 말(진실)인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나? 그 결과를 보고서 알 수 있다. 이때 우리 말의 결과를 우리 말의 '일' 또는 '자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것을 생각하는가? 우리의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님처럼 '지혜'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단지 지혜로운 자처럼(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꾸미고 있는 자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판단은 바로 위에서 말한 원리에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떤 말이 참 지혜요 진리인지 아니면 거짓말인지는 그 子女(결과)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이것을 확대하면 우리의 전 인생과 모든 사역 그리고 우리의 실체도 역시 우리의 말과 삶이 사람들 안에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을 봄으로써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매우 적고 주로 나이 든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전에 어떤 교회에서 어떤 분이 수 백 명 모인 저녁예배에 젊은 사람들이라고는 성가대에 앉은 중고등학생들뿐이고 나머지는 다 노인이라고 탄식하던 말이 생각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부모 세대가 자녀들에게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것이 매력적이고 옳은 선택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 것이다.

지혜는 말이 아니라 그가 낳은 자녀들(행한 일)을 통하여 입증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입증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말을 듣고 내 길을 본 사람들이 나중에 참으로 그렇다고 인정하며 따라야 참으로 그렇다고 입증되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상)

무엇으로 시험하고 확증하는가?

첫째는 주님의 임재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고 이제는 주님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어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하)

둘째는 선을 추구하고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심지어 단순히 선하고 착한 것도 넘어서는 것인데 하물며 그 생명을 가진 자가 악을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7,8)

셋째는 바로 오늘 이 말씀 곧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하는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 또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직장이나 사회에서 우리가 낳았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하며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진실한 사람들은 전혀 따르지 않고 오직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과 악한 자들만 따른다면 그가 과연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런 식으로 (남이 아니라) 자기를 시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내가 지혜인지 아닌지 즉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탄에게 속지 않고 항상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으로 다른 형제들을 판단하고 교정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자기를 돌아볼 일이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하나 자신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서 솔직하게 자신의 거짓됨을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저는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래 죄인이어서 아무 것도 아니지만 지금 보니 위선자고 외식자요 스스로 속고 있는 바보이기까지 하군요. 주님께서 저를 당신 안으로 깊이 이끌어 주셔서 저로 참 지혜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아뢰는 것이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가장 권능을 많이 베풀었다는 것은 가장 관심과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주변의 성읍들로서 주님의 고향 마을에 해당하는 지역들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은 적이 없었다(눅4:24)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 지역 사람들은 주변의 이방 도시들(두로, 시돈....)보다 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하지 않았다. 주님은 이 지역에서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많은 애를 썼으나 결국은 거절당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그들이 그냥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그런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 그들의 특징을 꼽아보면 첫째는 그들은 주님을 잘 아는 고향 동네 사람들이고,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래 관리되어 온 이스라엘 사람이고, 셋째는 그들에게 가장 많은 말씀과 기적이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들은 주님을 안 믿을 근거로 작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남보다 더 믿을 근거로 작용되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더 믿을 근거로 작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잘 받아들일 조건은 첫째, 주님에 대해 친밀한 환경이 아니어야 한다. 즉 주님을 잘 몰라야 된다. 둘째, 한 번도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어야 한다. 즉 이방인이어야 한다. 셋째,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복음 증거나 기적을 체험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은 당연히 남보다 먼저 그리고 남보다 더 예수를 믿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론은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시고 특별히 택하여 붙드시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지역들을 책망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그들이 그냥 인간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있는 호(好)조건들이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높게 만들어(교만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것은 다 놔두고 우선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점만 들어도 그렇다. 이스라엘의 장점과 특권이 무엇인가?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9:4,5)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있었고 약속이 있었다. 가버나움에는 회당이 있었고 주님은 그곳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하기도 하셨다. 이것은 큰 특권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아서 친숙하게 된 이것이 예수를 믿고 생명의 구원을 얻도록 작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과 자기 자랑과 거짓 만족을 가져왔고 또한 주님을 인간적으로 친숙하게 아는 그것이 주님을 무시하는 것으로 작용하여 주님을 거절하고 생명의 구원을 놓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이 율법으로 의롭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교만과 착각에 차 있어서 그랬든지, 주님의 어린 시절을 앎으로써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어서 그랬든지, 자기의 죄와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것은 큰 불행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안되었으니 누가 되는 것인가? 거기에는 아무 자격이나 조건도 없고 아무 다른 인간적 기준도 없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곧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

아무 자격도 조건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의 진리 위에 서 있는가? 여러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고승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는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을 수고하고 애써서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오직 왔다가 나그네처럼 살다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깐 빌려 쓰다가 도로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진리가 아니라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일생을 수고하고 애써서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람이 하는 말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뿐인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애쓴 것도 없고 솔직히 진리에 관심도 없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놓으신 자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날이 이르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산과 들과 물이 다 떠나가고 모든 것이 다 불 가운데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서 있는 자리인 것이다.(벧후3:10-13)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지식이 더 큰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그러므로 구원과 생명과 진리의 지식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대한 주님의 책망과 저주를 들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 즉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는 영원히 무한대로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일정한 구원의 기회를 주신 후 반드시 거기서 결실(회개하여 주께 돌아옴)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그 결실이 없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따르게 된다. 복음을 듣고 심지어 주님의 표적을 체험한 후에도 주님을 거절하는 자들은 그것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자들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5,36)
이 말씀처럼 구원에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지난 주에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표적을 많이 본다고 해서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주님을 대면하여 직접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또 꼭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들에게서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참 지혜는 세상의 소위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숨겨지고 거절되고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에게서 발견되고 영접된다. 이 어린아이들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진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이 단순하고 가난한 자들이다. 주님은 오직 이 어린아이들 곧 주님 자신의 소원에 의해 불러지고 모아진 이 남은 자들 안에서만 옳다 인정함을 받으신다.

물론 이러한 하늘의 지혜와 계시도 그들이 원해서나 단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기를 구한 주님의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자기 신부로 삼기 위해 부르신 자들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 곧 육신으로 자랑할 것이 있는 잘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오직 어린아이 같은 우리 곧 아무 자랑할 것 없는 우리 같은 자들에게 그것을 나타내신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지난 주에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18-31)

우리로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말씀만큼 분명하게 하나님의 목적을 밝혀주는 말씀이 에베소서의 다음 말씀들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8-10)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1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5-7)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役事)를 한 절 설명한 후 바로 그 다음 절에 그것은 우리로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덧붙여 나가는 식으로 그의 글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 에베소서 1,2장을 통해서 바울은 무려 이런 식의 표현을 5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글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그리스도)을 자랑하며 찬송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연유로 하나님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안에서는 받지 못한 섬김과 영광을 엉뚱한 이방 죄인들(사르밧 과부, 수로보니게 여인, 고넬료 등의 백부장)로부터 이끌어내신 것이며 오늘 유대인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로부터 이 찬송과 감사를 이끌어내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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