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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으로서 지난 이천년 동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던 세상의 많은 죄인들을 생명과 안식의 길로 이끈 주님의 부르심이다. 이 음성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들이 놓인 자리가 어떠한 자리였든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오늘 우리는 이 짧은 주님의 한 마디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원한다.

먼저 우리는 주님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실 때 "죄인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지 않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주님께로 나올 수 있는 사람 곧 주님이 찾으시며 부르시는(구원코자 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주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주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원코자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러므로 아무나 누구나 주님께로 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나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말씀들은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부르시는지 즉 주님께 나아올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6:20,21)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2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이 말씀들이 보여주는 바는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부르시는 자 즉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자는 오직 '가난한 자'뿐이라는 것이다. 오직 가난한 사람만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다. 세상에서 만족하는 사람,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사람, 세상에서 영광과 권세와 분깃을 잡은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오지 못한다. 오직 세상에 분깃이 없는 가난하고 곤고한 자들만 주님을 찾으며 주님의 나라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마음이 가난하든 물질적으로 가난하든 오직 가난한 자만 주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

언제나 (마음이) 부유한 자는 결코 주님께 나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것을 생각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구원을 받고 싶으면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오. 그래야 구원 받습니다" 라고 말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이) 마음을 가난하게 할 것도 아니다. 오직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다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 즉 하나님의 일하심의 특징과 과정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언제나 이렇게 일하신다. 주님은 언제나 마음이 가난한 자를 부르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예비된 자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economy)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영원한 뜻과 그것을 펼쳐내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고 그리스도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사람을 구원(하나님의 아들로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옛 사람을 없애고 그리스도와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새 사람)을 조성하시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이 자기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보고서) 마음이 상하고 만족이 없고 괴롭고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없는 인생, 죄로 인해 파괴된 인생의 당연한 심령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뼈가 부러졌으면 아파야 정상이다. 창자가 끊어졌다면 고통이 극에 달해야 정상이다. 그래야 문제를 인식하며 치료를 받으러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에 신경(통증을 느끼는 세포)을 설치하신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저주의 상태이다. 신경이 마비된 한 나환자 시인이 쓴 시가 생각난다. 그는 자기가 어느 동네를 지나는 동안 한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또 다른 동네를 지나는 동안 다른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자신이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탄했다.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도 축복인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 스스로 만족하고 안식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이다. 그는 다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저주 가운데서 그 인생이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탕자는 반드시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인생, 말씀이 없고 진리가 없고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인생에게는 수고와 슬픔과 고통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할 때는 일차적으로 사람 안에 바로 이런 상태를 조성하신다는 사실이다. 부유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을 자가 없고 의와 진리와 생명의 길을 돌아볼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한 부유하고 성실한 청년을 만났을 때 주님은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소유를 다 팔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주님은 왜 자기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조건을 붙이셨을까? 주님은 결코 그를 미워하거나 떨구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얼른 보면 주님의 말씀은 마치 구원에도 조건이나 자격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주님은 오직 그에게 참 구원의 길을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렇다면 소유를 다 팔아서 처리하고 빈 손으로 주님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가? 그렇다. 꼭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가 아니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유를 판다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상태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가 있어도 그런 마음의 상태 곧 가난한 심령, 단순한 심령이 될 수 있다면야 굳이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난하게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과 구조상 다른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서는 하나님(천국)을 잡기 어렵고 하나님을 누리기 어렵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청년의 마음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실질적 문제 곧 그가 처한 환경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다. 그 청년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고 생명(의 구원)을 사모하고 있었겠지만 그의 실제는 (하나님 외의 다른 것으로 부유했으므로)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의 마음은 그 청년을 사랑하사 당장이라도 자기에게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그것을 놓으라고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으니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실 때 그 첫 단계는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환경을 가난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말씀으로 그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시든지 어쨌든 사람을 가난하고 곤고한 자리로 이끄시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지 않으면 즉 상한 심령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 나라는 그의 관심사에 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와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중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약속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 자는 내게로 오너라"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궁극적으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그 구원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몫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시는 이 주님의 부르심 안에는 자기의 죄와 실패를 깨닫고 생명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리로까지 하나님이 그 심령을 조성해 놓으신 자들을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때가 차매)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는 '죄 짐'과 '생활의 짐'과 '율법과 종교의 짐'이 있다.

먼저 죄 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 안에 쉼(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수고와 안식 없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사람의 모든 수고와 고통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에서 온다. 죄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사탄을 이롭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죄란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서 (생존하려면 서로 경쟁해야 하고 상대를 밟고 속이고 악을 행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서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 죄의 결과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삶 곧 고생(고통스런 삶)이다. 죄는 스트레스와 불안과 무리한 여러 가지 일들로 말미암아 무엇보다도 죄 짓는 사람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다. 이것이 바로 죄 짐으로 고생하는 것이다.

죄는 어디서 오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탄에게서 온다. 즉 사탄의 거짓말에서 오는 것이다.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종이 된 후 인류는 항상 사탄의 거짓말을 듣고 망하는 길로 걸어왔다.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들으니 진리와 생명의 길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오직 날마다 사탄의 거짓말을 듣는 것이 인류의 첫째 저주 상태이다.

죄와 고통(죄 짐)이 사람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망령된 생각을 가진 데서 온 것이라면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죄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생에게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또한 그 속에 있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자신의 승리하신 삶을 통하여 인생의 참 길을 비춰주셨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더 이상 죄 지을 필요가 없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셨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의 죄 짐을 벗겨서 안식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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