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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람이 지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크게 '죄 짐'과 '생활의 짐'과 '율법과 종교의 짐'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첫 번째 짐 곧 죄 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생활의 짐과 율법 및 종교의 짐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생활의 짐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인류)에게 저주를 내려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가는 것이며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에게 있어서 삶은 그 자체가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의 짐이다.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13:22)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27-33)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14:16-21)

이 세 말씀은 사람에게 지워진 생활의 짐이 얼마나 수고스럽고 무거운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수고스럽고 무거우냐 하면 그의 목숨을 잃어버리게 만들만큼 수고스럽고 무겁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생명(새 삶, 참된 삶)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생활(옛 삶)에 대한 집착인 것이다. 살기 위해서 망하는 것이다.

죄 짓는 이유의 99.9%는 살기 위한 것이다. 즉 생존을 위해서 생활(삶)을 위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유로는 몰라도) '살기 위해서' 죄를 짓지는 말라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를 했겠는가?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長壽)시니"(신30:19,20)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암5:14)

산다는 것, 생활한다는 것은 참으로 타락한 인생에게 있어서는 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다. 생활하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 생존 자체가 바로 무거운 짐과 같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지우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사람)에게 이러한 생활의 짐을 지우신 것은 사람으로 완전히 죽고 망하고 고통이나 당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찾고 의지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간 인생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바라며 그 구원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가난하고 곤고한 자리에 머물게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굶주리고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먹이통을 뒤질 때 비로소 그는 아버지를 다시 생각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에게서 생활의 짐을 벗기시고 안식케 하시는가? 그 자신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주님은 삶은 하나님께 있고 돈이나 인간의 몸부림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주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고 아무도 의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족함 없는 인생을 보내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또한 그 길로 이끄심으로써 주님은 삶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를 구원하고 안식케 하셨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셨다. 주님은 그의 삶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삶의 자리 곧 하나님의 공급으로 사는 '아들의 자리'를 보여주셨다.  


세 번째 짐은 율법과 종교의 짐이다. 이 짐은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진 짐이고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방인, 무법자...)은 그렇게 많이 지지 않는 짐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 도덕과 윤리와 종교는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이 많다.

도덕과 윤리와 종교는 사람의 양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심으신 그의 형상이 사람을 돼지처럼 밥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의와 진리와 거룩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율법과 도덕을 사람이 그 생명 없음으로 인해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외식과 종교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판단과 정죄와 멸시가 나오게 된다. 그럴듯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게 되므로 거기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다수는 율법과 도덕과 종교에 충실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다수 민중들은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다만 짐일 뿐이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도 율법의 짐을 지고 끙끙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짐을 얹어주고 누르는 역할도 했다.

마태복음 12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한편으로는 주님이 사람들을 살리시며 안식케 하는 내용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주님의 사역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이 시기하고 반대하는 내용이다.

첫째 이야기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 먹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내용이고 동시에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비난했다는 내용이다.

둘째 이야기는 주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비된 사람을 고치셨다는 내용이고 동시에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다는 내용이다.

셋째 이야기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주님이 고쳐주신 내용이고 동시에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는 주님이 귀신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우리는 주님이 한 소경을 고쳐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그를 고치신 주님과 고침을 받은 그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무지하고 불쌍한 민중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율법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로 여겼고 이 고통 받는 가난한 민중들을 저주 받은 자로 여기고 멸시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고 축복 받는 자들로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백성들의 삶이 어떠하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돕고 온전케 만들 수 있을 것인지, 더 나아가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지금 어떤 역사를 펼쳐 가시며 그들을 이끌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대 종교인들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복된 삶과 깨끗한 삶에 있었다. 자신의 깨끗함, 자신의 거룩함, 이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는 인간 자신의 영역 확보이며 하나님 없는 천국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의 태도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할 마음도 없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구원과 영광과 득세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홀로 특권을 누리기를 원하지 다른 고통 받는 인류의 구원과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사탄의 두 가지 거짓말, 곧 사탄에게 속은 인간의 두 가지 망상은 첫째, 소유(재물)가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탐심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더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둘째, 종교적 의식과 절차를 통하여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한편으로 돈을 좋아하여 재물을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정결하고 고매한 사람이 되려고 종교적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우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리고 율법적이지 못하고 정신적 종교적 수준이 낮은 속된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민중들은 이 두 가지에 다 걸렸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비루하였으며 물질적 생활적 수준만 낮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대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체 높고 고상한 바리새인들로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형제라고 불러주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 저주 받은 무리들에 지나지 않았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중들에게는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만 있었을 뿐 안식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운 사람들은 주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책망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2-4)

종교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담의 욕망이며 종교의 본질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안식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자리에 가보면 찬 바람이 설설 난다. 거기에는 경쟁과 수고와 몸부림이 있고 안간힘과 발돋움이 있다. 부족하고 못 미치는 힘으로 높은 곳을 향하기 때문에 불안과 염려와 긴장이 있다. 힘들게 겨우 이루어놓은 것은 자랑하지 않고 싶어도 자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자신을 대비하며 사람들을 판단하고 멸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루어놓은 것인데... 이런 사람 앞에 가면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다. 어떻게 불안한지...

겨우 마련해 놓은 지위, 겨우 마련해 놓은 재물, 겨우 마련해 놓은 외모, 겨우 마련해 놓은 지식, 겨우 닦은 도(道), 겨우 쌓아놓은 명성과 덕망, 힘들게 지켜온 종교적 성실함과 명성, 남달리 체험한 몇 번의 신비한 종교적 경험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이것들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다. 이들에게서 여유와 관용과 이해와 긍휼을 구하는 것은 쥐가 배고픈 고양이에게서 관용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금식과 방언의 도사요 신유와 예언의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도사 분위기의 기도원 원장이나 힘들게 공부하여 신학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 사람이나 온갖 고생 끝에 많은 교인들을 모은 큰 교회 당회장을 만날 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납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들게 자기 능력과 분수를 넘어서는 굉장한 것을 획득했는데 어떻게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 되신 자리에 가보라. 거기에는 부드러움과 겸손과 여유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부와 권세와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철철 넘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 안을 수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부를 한 없이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는 어른이 아기를 다루듯 한없이 참을 수 있으며 한없이 줄 수 있으며 죄인에 대해 얼마든지 미소와 칭찬과 관용으로 대하실 수가 있다.

주님이 죄인들에 대해서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사랑과 관용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죄에 대해 무디었거나 인간의 죄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온 목적이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실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안에 아버지의 생명(능력과 권세)이 충만하며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여유는 생명의 풍성함에서 나온다. 아이는 어른에게 여유로울 수 없고 오직 어른이 아이에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만드신 분이요 인생을 아시며 사랑하는 분이므로 사람을 이해하시며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부드럽고 유연하게 대하실 수 있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들을 관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낳음을 통해 아버지(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그는 먼저 그녀를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살리고자 하셨다. 죄를 물어 정죄하지도 않았고 심판하지도 않았고 오직 그의 생명을 건지기를 도모하셨다. 일단 육신의 생명을 살리고 그 다음에 영혼을 살리려 하신 것이다. 그녀를 정죄하고 죽이려던 사람들이 다 간 후 주님은 그녀를 보내시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이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결국 사람을 죽인다. 그러므로 죄를 묵과하거나 지나칠 수는 없으나 죄는 지적하고 꾸짖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자기를 그녀에게 생명으로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죄와 심판은 영 안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결국 그것은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진리) 자체가 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가 너희를 심판을 할 것이라"(요5:45) 그러므로 이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은 아들(그리스도)의 마음이어야 하며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하나님)의 마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생명으로 내어주고 그를 살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수렁에 빠진 딸을 볼 때 정죄나 심판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건져내고 살리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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