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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비판과 정죄로 사람을 살릴 수 없음]

비판과 정죄로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리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안된다. 오직 생명의 말씀과 희생이 바탕이 된 사랑을 공급함으로써만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비판과 정죄는 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인 된) 실체를 깨닫게 하고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그를 위축시키고 자기를 옹호하며 방어하게 만든다.

이것은 실제 생활 속에서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다. 죄를 일깨우고 죄를 지적하면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고 의와 거룩으로 나아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된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자기(육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 곧 육체의 욕망과 세상 자랑과 자기 의(義)에 대해 계속 지적하고 공격하여 그것을 드러내면 사람이 그런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높이는가? 우리의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경험이라면 더욱 분명하다. 나는 어떤 사람이 나를 꾸짖고 정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그의 아름다운 인격과 삶으로서 나를 감화시키는 사람안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물론 나의 죄와 허물을 드러내며 책망하는 사람도 결국은 나를 변화시키며 진보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었다. 그것을 듣는 순간에는 마음이 위축되며 거부하더라도 나중에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가운데서 그 말을 새기고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생명의 여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였다. 그 생명의 여유는 내가 정죄와 심판과 가르침만 받았다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사랑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을 받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성령 안에서만 알 수 있다.(고전2:12)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위로와 감화의 영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세계를 알도록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역사하신다. 많은 경우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다. 성령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우리는 세상에서 죄인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범죄자들이 교도소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보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범죄자를 교도소에 보내는 것은 죄를 처벌하는 목적과 아울러 교도(矯導) 즉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목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죄를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오면 죄를 청산하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 많은 죄를 배워서 더 악한 죄인이 되어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더 정교하고 수준 높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죄를 뼈아프게 생각하고 반성하라고 기합을 주는 것도, 그리고 죄를 지적하며 선을 가르치는 교양과 학습도,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죄를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게 만드는데는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작 도움이 되는 것은 전혀 엉뚱한 데서 나타난다. 요즘 신문에 나는 기사들을 보면 죄수들에게 어떤 보람된 일을 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할 때 상당한 교정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악기 연주단을 만들어 활동을 하게 하거나 방송대학교 같은 곳을 다니며 새 공부를 하며 학위를 따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제와 사랑의 재미를 맛보게 하거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한 사회 봉사의 기회를 가지게 하거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언가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기회를 가지게 될 때 사람들은 조금씩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사람의 따뜻한 사랑을 맛보게 될 때 죄인들은 이전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오늘날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서 생명과를 버리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죄는 결국 생명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훈계하고 따지고 징계만 하는 부모에게서 선하고 진실한 자녀가 나오기는 어렵다. 오직 자녀로 하여금 생명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끔 사랑과 용납을 베풀고 그 위에서 진리를 가르치며 자기 삶을 통해 그것을 빛과 같이 자연스럽게 비추는 부모에게서만 선하고 진실한 자녀가 나온다.

생명의 원리는 언제나 그러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고 죄와 세상과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방법은 사람에게 율법을 주어 선한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잘 안된다고 정죄하고 따지며 심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참 생명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생의 배고픔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영원한 양식과 생수인 자기 자신(아들)을 사람에게 주어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가까이하게 하는 것은 안식일과 성전과 제사와 예배와 그 어떤 율법과 사상과 교리로도 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여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제공하신 그 분 안에서 되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 유일한 선지자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인격을 지니신 그 한 사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며 자기를 반성하는 것을 (사람을 살리고 온전하게 돌이키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약 이스라엘의 천년 역사를 통해서 아무런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우리의 실패이다. 그리스도 아닌 모든 방법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하나님의 새 방법은 오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안식의 아들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지금도 세상에는 종교적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이 많다.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예배다 교육이다 봉사다 전도다 하며 하나님을 위한다는 많은 일을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런 짐을 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리스도 안으로 가서 벗어야 하고 이런 짐을 지고 헤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바른 길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가 안식의 사람이 되어서 그들에게 안식의 터전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름]

주님은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의 인생, 주님의 운명을 내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하고 안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생 길 자체를 바꾸는 것이며 삶의 목표와 근본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이 멍에가 아니면 저 멍에를 메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복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결국 사탄이 지우는 종의 멍에를 메게 된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자유인 것 같지만 실은 자유가 아니라 사탄의 종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는 무엇인가? 아버지(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 하나님을 나타내며 사는 인생,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인생,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내 뜻과 내 계획대로 사는 것은 내 멍에를 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내 것도 아니다. 사실은 사탄에게서 온 망상이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은 마귀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사탄에게 속아 있는 인류의 눈(상식)으로 볼 때는 그 역시 무거운 종의 인생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완전히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차피 그릇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아무 것도 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담느냐 담지 않느냐 즉 그릇이냐 그릇이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엇을 담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의 거짓말을 담고 그의 허망한 생각과 행동을 담고 표현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그의 영광을 표현하느냐 하는 이 문제가 있을 뿐이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이런 말씀들은 자유를 말한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멍에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왜 이 자유를 혹은 이 멍에를 메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사탄에게 속아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생명(삶)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은 모든 헛된 생각(탐심, 망상, 사욕)과 망령된 행실과 죄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이며 두려움과 헛된 수고와 염려와 불평, 원망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7,18)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주님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인격이 부드럽고 온유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인격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처리된 인격이다.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인생의 모든 형편을 친히 겪어 보셨다. 그는 사탄의 시험도 받았고 가난도 겪었고 멸시도 받았고 외로움도 겪었다.

주님은 참으로 인간의 질고를 알고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을 통해 아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생명으로 줄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자기 안으로 부르실 수 있었다.


주님의 인생(일생)은 사람의 지음 받은 자리를 보여주는 인생이었다. 주님의 인생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뜻 알기를 추구한 인생이었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인생이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성령이 그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 인생이었다.(고전2:12) 그리고 주님의 인생은 자기에게 지워진 멍에랄까 주어진 특권이랄까 하여튼 그의 일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는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요동함이 없었고 항상 형통하고 평안한 삶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2-5) 이 말씀에는 주님이 받은 권세와 사역이 함께 나온다.
사람의 영광은 사람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분에게 순종하는데서 나오며 권세는 권세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데서 나온다. 그리고 자유는 진리를 따라 사는 자리에서 나온다.

요한은 주님을 이렇게 증거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4,17)

주님 안에서 분명하고 충만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은혜고 하나는 진리이다.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의 오심이 죄인들을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의 표현이다. 그리고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그가 모든 것의 참이요 실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님은 가짜(그림자)가 아니라 '진짜'(실제)라는 것이다. 무엇의 진짜인가? 율법의 진짜(실제)요 사람의 진짜요 모든 길과 진리(종교, 법, 도덕, 가르침들)의 진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는 인생의 길이 보이고 진리가 보이고 생명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빛이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때는 자기의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행위를 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그래서 자기가 까다로운 시어머니인 사람이 드라마에서 까다로운 시어머니 노릇을 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연기자를 보면 저 여자 참 못됐구나 하는 말을 한다. 자기 위치도 모르고... 그만큼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기를 힘써야 하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나의 대표자요 나의 근원(생명의 창조자, 원본)이요 내 인생을 대신 사신 참 사람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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