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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마12:9-16)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먹은 제자들의 행동을 옹호하신 주님은 그 날 회당에 들어가서 손이 마비된 병자 한 사람을 고치셨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느냐고 따졌다. 그때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안식케 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므로 말하자면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에 더 적합한 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유대 종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제 둘 사이에는 타협점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고 결국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온 것을 느끼시고 더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구원을 베푸셨다. 그때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의 일을 공연히 여기 저기서 떠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것은 불필요한 오해와 마찰을 피하고 조용히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 42:1-4의 말씀에 나오는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2:17-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42:1-4)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神(성령)이 그 안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펼치심으로써 모든 버림 받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하는 바를 거꾸로 뒤집으면 그는 약속의 자녀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에 공의(심판, 구원)을 베푸는 자로 묘사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여 자기 곁에 있는 하나님의 큰 구원을 무시하고 거절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이 그들을 무시하고 거절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먼저 주님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먼저 거절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런가?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실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특별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님은 진리를 나타내셨을 따름이다. 그러나 진리는 거짓과 어두움을 근본적으로 대적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서 행하면 자연히 그는 진리의 원수가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은 바리새인이라고 특별히 대적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진리 안에서 자기 길을 가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바리새인들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안식하느냐 하는데 있었고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안식일의 규례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데 있었다. 안식일의 진리(본질)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안식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외형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사는 진리에 있었고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그들의 종교(세계)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생명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고 종교와 법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와 율법은 사람이 자기의 왕국(세계)을 유지하기 위해 붙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의 규례를 위반한 것은 거룩한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형식적으로 볼 때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었고 사람의 뜻과 영광을 유지하는 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뜻에 부합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주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종교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관습도 아니요 심지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유대인도 아니고 율법에 능한 자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여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주님의 사역은 양면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심판(미쉬파트)이란 말은 이사야서 41장에서는 '공의'로 되어 있다.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런데 심판이나 공의는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공의, 통치)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하게 나타내신 것이요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그를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과 심판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자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통치가 되고 심판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그리스도)이 사람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를 거부하는 자는 망하게 된다. 이러한 존재의 특성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그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저절로 구원과 심판의 기로에 세우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바라고 그 구원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주가 되고 교만하여 하나님과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자들에게는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구원)은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의 심판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일 매일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던져지고 복음이 던져지고 생명의 길로 행하는 한 사람(형제)이 우리에게 던져질 때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큰 권세를 가진 자가 나타나서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심판한다)면 아무도 이 구원을 놓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도 감히 그러한 자를 거스려 대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구원과 심판을 시행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한 어린 양과 같은 자를 택하여 그의 일을 조용히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1-3)

왜 주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대단한 사람들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았는가? 그가 볼품 없는 초라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이 로마 황제 같은 권세자의 모습이나 온 세상이 다 인정하는 위대한 현인의 모양으로 아니면 하다 못해 이스라엘 왕이나 대제사장의 지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와서 무언가를 전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3,44)

그러나 주님은 육에 속한 자들이 흠모할만한 아무런 아름다운 (육체의) 모양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오직 그의 택하신 자들만 건지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를 따라 사역을 수행하는 분으로 오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면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베푸실 때나 자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하여 넘어지게 함으로써 심판하는 일을 하실 때나 전혀 요란하지 않고 또한 감정적이지 않고 조용히 진행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가장 무서운 일이다. 이리하여 결국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그 사람들만 조용히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떠들썩하게 하나님을 아는 척 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다수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결국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물론 처음에 약속의 일차적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큰 구원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방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될 것(이방에 공의를 베풀 것)이라는 말씀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은 이스라엘의 무지하고 불쌍한 죄인들 또는 이방 죄인들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지팡이요 등불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은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에 지나지 않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주님은 그 모든 자들에 대해서 마지막 날의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드러내 놓고 강하게 심판하시지 않고 조용히 자기 일만 수행하셨다.

그런 가운데서 빛을 받을 사람들은 조용히 빛을 받고 거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을 거절함으로써 어둠 가운데서 자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이 언제까지나 지연되는 것은 아니며 때가 이르면("심판하여 이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백일 하에 드러나도록 분명하고 엄격하게 집행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에 성전 안에 있는 자의 자유와 특권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님은 참으로 성전 중의 성전이신 분이다. 그는 돌로 지은 성전보다 크고 완전한 성전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충만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므로 또한 하나님의 성전(집)으로 불릴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었다면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집)로 지음 받은 사람의 지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 안에 있은 것은 성전 안에 있은 것이다. 사실은 성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품 그 자체 안에 있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제와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완전하고 궁극적인 법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법과 규례는 그보다 못한 것이며 그 아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성전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성전을 가지셨듯이 오늘날도 이런 성전을 가지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주님과 같이 권세와 자유와 생명의 요람을 그 속에 지닌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종이냐 주인이냐, 종이냐 자유인이냐, 종이냐 아들이냐,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에 매인다. 율법에 매이고 감정에 매이고 욕심에 매이고 두려움에 매이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없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지한 이스라엘 민중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멸시하며 또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구원하시려는 주님을 대적하고 거부한 것은 그들 안에 권세와 여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가 어떤 것을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가 주님에게서 보여진 바와 같은 용납과 긍휼히 여김과 사랑을 누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안에서 보여진 바와 같은 판단과 정죄와 멸시를 느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 생명의 여유가 없어서 사람들을 우리 안에서 살게 만들고 안식케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로 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법이 있고 상식이 있고 생각과 이론이 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할 말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모든 법과 규례와 상식은 생명의 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며 그리스도와 같이 사람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케 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을 거스려 행하는 모든 것은 다 우리에게 합당치 않은 것으로서 우리 것이 아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구원이며 또한 심판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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