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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했다고 주님을 비난하며 주님을 죽일 모의를 하던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 주시자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런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그들의 이러한 말과 행동이 단지 사람(예수)을 거절하고 대적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하나님)을 거스르고 그 역사를 훼방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셨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을 지켜본 일반 백성들은 주님에 대해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함으로써 주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야(구원자)로 알았다. 일반 민중들의 상식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을 살리는 주님의 사역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사역이 귀신의 힘을 빌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해가 아니라 알면서도 고의로 성령을 훼방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든 마귀의 나라든 그 구성원들끼리 스스로 분쟁해서는 설 수 없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이 사탄의 일을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주님의 사역이 귀신을 힘입은 것이라고 비난한 것은 어떻게든 주님의 일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어떤 필요(이익)를 위해 고의로 성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성령의 사역 곧 마귀의 일을 멸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일을 막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마귀 자신밖에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1-47)

결국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같지만 실제로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인 것이다. 마귀에게 속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는 자가 바로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진리를 못 받아내는 사람이 바로 마귀에게 속한 자인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터무니없는 말로 훼방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들의 행위가 마귀로 말미암은 무서운 죄악임을 드러내셨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주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거역적인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구원)를 정면으로 거절했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종이라는 것과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 아래 놓여 있는 구제불능의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나타내었다.  

죄를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무서운 저주의 상태이다. 이 문제는 중한 문제이므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도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다. 그 어떤 극악한 행동이라도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사하기로 작정하시고 그것을 위해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보내신 이상 다 용서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 죄인이라도 다 용납될 수 있으며 어떤 죄라도 다 사함 받을 수 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를 없애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길을 돌이켜 주님께로 가기만 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 심지어 주님(하나님)이나 선지자를 욕하거나 핍박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주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을 멸시하고 거역하는 행위들은 중한 죄지만 그것도 다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못들은 척 외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성령에게 복종(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엎으려고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반대하며 거스르는 것이다. 결국 알고서도 성령의 사역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나 성령을 훼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도 없는 특별한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을 훼방할 수 있는가?  
성령을 훼방하기 위한 조건은 첫째, 주님이 땅에 계실 때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것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 즉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그 모든 이적들이 내용과 결과와 여러 증거(주님의 설명, 사람들의 증언)로 볼 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속으로 느낀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인해 고의(故意)로 그 일들을 부정하고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왔다든지 혹은 마귀(귀신)에게서 나왔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백한 역사를 훼방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생각해 볼 때 성령을 훼방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살지만 이런 일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님 당대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춤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는 자의 불명예를 안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주님의 사역에 대해 그것이 귀신의 힘을 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내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에게 뇌물을 주어 입을 막았다. 이 모든 행동들은 다 무지와 오해로 말미암아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고 뒤엎기 위해 고의로 성령을 훼방한 행동들이다.  

바리새인들의 성령 훼방 행위는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함으로써 주님을 대적한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바울은 그때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자기 양심의 지지 안에서 그런 일을 하였다. 그는 모르고 그런 일을 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실제로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 것이지만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훼방하는 자로 책망 받지는 않았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그러나 많은 사람들 곧 주님 당대의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그 전후의 많은 사람들이 고의로 성령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짓을 했다. 신약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주님을 알고서도 대적했다. 중세 시대의 교황을 비롯한 여러 거짓된 성직자들과 오늘날의 거짓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 태연하게 성령을 훼방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왜 명백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대적했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이 자기를 보존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하나님의 새 방법 곧 십자가의 역사(役事)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즉 바리새인들이 명백한 하나님(성령)의 역사(일)를 귀신의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무리하게 주님을 대적한 것은 '그들의 육적 자아(自我)'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또한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는 것 즉 그들에게 확실한 것, 그들의 소망은 오직 자기들이 그동안 세상에 구축해 놓은 자기들의 (종교) 왕국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구축한 {세상에 속한 기득권}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주님의 역사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모든 인간의 헛된 삶의 틀을 깨고 그 자리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틀을 형성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가 적었겠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 이루어놓은 것이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클 수밖에 없었다. 주님과 성령을 거스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 랍비들은 그 사회에서 '가진 자' 곧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가진 자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기까지 자기 세계를 보존하며 옹호하였다. 가진 자의 큰 폐해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는 이미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충분히 잘 믿고 있으며 잘 섬기고 있다'는 거짓된 생각과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자기들의 가난과 헐벗음과 무지와 생명 없음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누구도 그들을 가르치거나 인도하거나 책망할 수 없었다. 자기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성령)의 일은 그들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포상하는 것뿐이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심판하거나 해롭게 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로 인한) 곤고함과 헐벗음(빈털터리 됨)과 허무와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사역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수치와 위기 의식과 자존심 상함을 느끼고 주님을 거절했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제거해 버렸다.

마귀의 역사는 언제나 '육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생각은 마귀의 거짓말(망상)과 그로 말미암은 교만의 산물이다. 자기의 영적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나는 하나님을 이미 잘 믿고 있고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침도 치료도 진보도 필요도 없다'고 하는 교만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런 교만한 생각과 헛된 만족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고 거스르는 극히 무서운 죄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성령의 빛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자기를 크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실질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첫째 길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형제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귀히 여기며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실제로 그들에게 나에게는 없는 그리고 내게 필요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형제들은 몸(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통로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 몸의 한 작은 지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몸 전체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반드시 형제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나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사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섬기며 복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진정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생명을 사모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작은 어린 아이에게서라도 배우고 공급받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기를 보존하려 하지 않고 영생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은혜와 은사가 발견되면 겸손히 거기서 배우고 공급받으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참 자기 백성으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기까지 주님을 대적한 것이다.
성령을 훼방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결코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저주를 받은 자들은 (무지로 인해) 주님께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주님과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무너질까 하여 주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뒤엎으려 한 자들이다. 그들이 성령을 훼방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친 백성'이 아니라 마귀에게 사로잡힌 마귀의 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주님은 영적 눈으로 이러한 사실을 보고 있었다. 사탄은 자기에게 사로잡힌 유대인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려고 했다. 자기의 육체적 욕심을 위해 공공연히 성령을 훼방한 이 무리들은 자기의 정욕을 위해 천년 동안 일관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던 그들의 조상 곧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책망과 저주를 받은 패역한 백성의 후손들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1-16)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다. 누더기를 걸쳤어도 그 속에 보배가 들어있는 것이 보이는 그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서, 진리를 들을 때 그 마음이 동(動)하고 하늘의 역사가 전개될 때 눈이 그리로 쏠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자녀로 그의 친 백성으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그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 눈에 할례를 베푸시고 우리 마음과 생각에 할례를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말씀 앞에 굴북하고 그의 역사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작은 어린 아이에게 엎드려 배우는 사람이며 작은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에 주목하는 사람이며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무 아름다운 것도 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에 속한 것이 나올 때 주목하고 가까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사탄에게 속아 있는 사람이 없기 바란다. 사탄에게 속아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를 크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교만과 헛된 만족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에게 속아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형제를 멸시하고 작은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육신을 따라 사람을 대하는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꼭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감춰두시며 초라한 거적 안으로 덮어놓으신다. 즉 보물을 길가에 드러나게 두시지 않고 밭에 묻어놓으시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으로 행하는 자들, 신령한 눈을 가지지 못한 자들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을 육의 눈으로 판단하며 육신의 영광을 좇아 다니는 자들을 갈라내기 위함이다. 즉 오직 영에 속한 자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흔히 말하는 세상의 악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 사회의 선생들이요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부와 지위가 그들을 죄와 멸망의 틀에 가두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원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기 위해 태어난 불행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 이방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모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서 마음이 헛되이 교만하거나 고집스럽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마음이 완고하게 되거나 분요(紛擾)하게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미 마음이 사탄에게 사로잡힌 상태이거나 사로잡히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제일 먼저 우리의 모든 생각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계속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마음이 분요하다는 것은 자기 계획이 있고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안식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와서 자기를 흔들어 놓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 누가 오는 것부터가 싫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사모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가 와서 자기를 흔들 때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진실치 못한 것들이 털려져 나오는 것을 기뻐한다.

우리가 만일 끝까지 자기를 놓지 못하고 자기를 사랑하여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비록 우리가 성령을 적극적으로 훼방하는 자리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지연시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성령을 대적하고 훼방한다는 것은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혜)의 손길을 거절하고 뿌리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겠는가?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다. 용서의 도구인 주님의 보혈 자체를 멸시하고 거절하는 자는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와 결과적으로 같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무지와 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오는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9,20)

하나님의 약속(구원)을 시행하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대 역사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이 (단순히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악(사탄에게 사로잡힘)의 세계를 옹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런 짓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는 우리 중 아무도 이런 사람이 없기를 원한다. 모두가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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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주님의 사역이 방해받음 (마9:32-34) / 2004. 10. 24 이상봉 2010.04.30 3707
81 하나님께 대해 눈 멀고 귀먹고 입이 막힘 (마9:27-34) / 2004. 10. 17 이상봉 2010.04.30 3866
80 천국복음과 표적 (마9:18-27) / 2004. 10. 10 이상봉 2010.04.30 3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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