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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이라고 단서를 붙일 것도 없고 그냥 사람이 사는 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한 원리로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사는 법'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것이 가장 확실한 사는 법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8, 롬1:17, 합2:4)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고 하나님을 믿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돈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면 된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이런 세계로 부르셨다.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돈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다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하나님을 위해 씨를 뿌려야 함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누구든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며 더 많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 투자하는(심는, 씨뿌리는) 것이다. 적게 버린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버린 자는 많이 거둔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말씀하셨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잠11:24)
삶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돈으로 말미암는다면 우리는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경제 방식에만 매달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 속에 심어놓은 마음으로 인해 우리는 아끼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흩어 구제할 때 부유하게 된다. 왜 흩어 구제하는 것이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살게 하는가? 첫째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흩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서 모두가 서로 섬기고 사랑하게 될 때 결국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받았던 악한 종은 주인에게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가 버림을 받았다. 그는 주인을 잘못 알았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25:26)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 아니다. 그는 그의 자녀들이 작은 육신의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크고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일을 조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한 알의 밀로 바쳐서 많은 사람들을 얻으셨다. 그러므로 뿌린 만큼 거두는 진리를 아시는 분이며 실천하신 분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이것을 모르고 주님을 인색하고 터무니없는 사람으로 본 것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굳은 사람이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는 자만이 하나님을 그렇게 본다. 오직 악하고 어리석은 자 만이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붙들고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손에 들어 있는 돈과 시간과 인생이 자기 것인 줄로 알며 또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과도히 아낀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 인생을 바치는 것은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과 바꾸는 것이며 작은 씨를 뿌려서 큰 나무와 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고 우리 또한 그와 같이 아버지 안에서 풍성하고 완전한 생명을 누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신다.


2.하나님께 가지고 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자신의 필요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았다. 십일조는 제사장의 생계 유지 수단이었으므로 구약 제사제도와 성전제도를 유지하는 근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곤궁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바칠 것을 바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삶도 펴지지 않았다. 움켜쥐는 것이 그들의 삶을 부유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문을 닫음으로써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자기 필요보다 하나님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입장에서, 자기 자리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가난하고 병들고 곤고하다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왜 그런 상황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복 주신 땅에서 왜 고통스럽고 곤궁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일하시지 사람의 일시적이고 육신적인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일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공급을 추구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시며 그의 나라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추구하고 그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그를 위하시고 돌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6:13) 바로 이것이 삶의 원리인 것이다.


3.하나님을 위해 소비함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왕상18:32-35)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기도할 때 제단에다 귀중한 물을 4통 이상 왕창 붓게 했다. 이것은 하나의 신앙 고백이다. 사람은 비(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비가 안 오는 것, 물이 없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 문을 막아서 비를 내리시지 않은 것이 먼저가 아닌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뭄을 주셨는가? 그것은 비를 내리는 손이 짧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잘못된 삶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실히 잘못되고 어리석은 길을 택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돌이키는 방법은 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통과 저주에서 벗어나 참으로 사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다면 바알을 버리고 (그 바알을 추구하게 만든 동기인) 탐욕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물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엘리야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최후의 물 한 방울까지 다 하나님께 바쳤다. 물은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아니다. 물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소비할 줄 안다.


4.하나님을 위해 쓰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주는 데 인색했으나 빌립보교회 신자들은 관대하고 넉넉했다. 그들은 종종 바울에게 쓸 것을 공급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사례하기를 자기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나의 하나님'이란 말은 무엇을 나타내는 말인가? 그것은 '바울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준 것을 받은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에 그 사람만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그것을 먼저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주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신다. 바울은 자기 배후에 있는 하나님이 빌립보교회 형제들의 선물을 받고서 좋아하시며 그 까닭에 그들을 돌보사 그들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을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빌4:19의 이 말씀을 좋아하며 붙잡는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에게 쓸 것을 공급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말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아 기근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의 한 과부에게로 보내셨다. 그때 엘리야를 맞이한 시돈 사르밧의 과부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그의 항아리에는 먹을 것이 거의 다 떨어졌고 기름병에는 기름이 바닥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작은 빵을 만들어 주었다.(왕상17:8-16)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13-16)

이것이 삶의 방법이다. 이것이 사는 길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나의 필요가 가장 급할 때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위해 마지막 남은 것을 바쳤을 때 그 집에 있던 한 줌의 밀가루와 몇 방울의 기름은 3년 6개월 동안 온 식구가 먹고도 남을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재정 관리법이며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법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5)

주님의 삶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과 다른 일상 생활이 따로 있었다는 것도 아니고 오직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주님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자 내용이자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주님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생계 수단이고 미래를 위한 대비이고 삶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농사 짓고 고기 잡고 장사할 때 주님은 그것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으며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증거했다. 그것이 주님의 직업이고 삶의 수단이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하고 자식 낳아 그들의 미래를 준비하며 돈을 저축해 놓음으로써 그들의 미래를 준비할 때 주님은 다만 하늘에서 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증거함으로써 그의 미래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생을 산 후에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여 제가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으니 이제 아버지께서 제 인생도 영화롭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얼마나 간단하고 확실한 인생살이 법인가? 주님의 이러한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따라가야 할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삶이다.  

영생이란 영원한 삶 곧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삶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와 함께 살며 그와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며 영생의 길이다.

다시 확증하자. 누가 영생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이런 확실하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오직 하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영생(최선의 삶, 쉬운 인생)을 예비해 놓고 손을 뻗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면 된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창조도, 다시 살리는 것(구원)도, 사는 것(삶)도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은혜로 모든 것을 주신다.

복 있는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그것을 앎으로 하나님의 은혜(선물,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 바울의 사는 법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6-13)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 살았다. 아무 부족함이 없어 풍족하게 살았다. 물질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잘 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살았는가? 그것은 그가 삶의 원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깨달은 삶의 원리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항상 삶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기를 힘썼다. 그는 결코 혼자 살지 않았고 자기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살았다. 그러니 잘 사는 것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법을 배움으로써 모든 환경 속에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작은 것을 종자 씨로 삼아 투자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거두어 항상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매우 어려운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면 매우 쉬운 것이다. 생명의 길을 거스려 역리(逆理)로 살면 어렵고 순리(順理)대로 살면 쉽다. 무엇이 순리인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어서 나온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게 해서 사는 것이다. 세상 누구도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를 가지고 살지 않는 자가 없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생명의 율)의 지배를 받으며 살지 않는 자가 없다. 비록 세상이 타락 후 왜곡되었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사람들을 그 뜻대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순리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것이다. 지음 받은 대로 살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고 순조롭다. 오직 그 자리에서 벗어날 때 삶이 힘들고 어렵게 되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특별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가장 쉽고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방법이다.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사탄의 방해로 말미암아 눈이 어둡게 되어 이러한 쉽고도 당연한 삶의 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탄에 의해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언제나 자기 자리에서, 자기 현재의 육체적 형편 안에서 삶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본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돈이 없고 배가 고픈데 하나님은 그것은 말하지 않고 자꾸 자기를 믿으라고 하니 매칭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몸이 아프고 곤고해서 살기가 힘든데 하나님은 자꾸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을 말하니 그 말이 귀에 안 들어오며 말이 안 통하는 것이다.

삶이 어려운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어디서 우리의 삶이 잘못 되었는지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삶에 대해 말할 때 그 삶은 언제나 육체의 삶이다. 먹고 마시고 입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 공부를 잘하고 기술을 익혀서 직장을 가지고 안정되게 사는 문제,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사는 문제, 인간 관계에서 골치 아프고 속 썩는 일 없이 마음 편하게 사는 문제, 이런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의 전부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은 오직 생명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삶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서 망령되고 허탄한 생각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정하신 길)에서 벗어나 헤매는 그것이다. 나머지 문제는 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다른 것들은 저절로 해결된다.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밥이 들어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모든 환경적 문제들이 해결되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머리를 짓고 손과 발을 짓고 세상을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육체의 삶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분명히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는 그것이다. 육체적 문제란 결국 돈 문제이고 생활 문제이고 인간 관계 문제 같은 것이다. 돈은 어떻게 버는가? 총명하고 성실하고 건강하면 돈은 벌게 되어 있다. 인간의 많은 문제는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탐욕을 가지고 잔꾀를 부리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을만한 총기(聰氣,총명)와 건강과 손 재주를 공평하게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으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인간 관계도 잘 가질 수 있다. 문제는 마음이고 정신이지 육체적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다. 그 마음만 바르면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 범위 내에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왜 밥벌이를 하지 못하며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겠는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사는 법)에 대해 생각할 때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속이며 사기를 쳐서 살아갈 생각을 하거나 죄를 지을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것은 쉬운 방법이 아니라 가장 힘들고 어려운 방법이다.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이런 길을 가야 하는가? 저주와 멸망 아래 놓인 인생이 아닐 수 없다.


[ 구약 이스라엘의 교훈 ]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 '항상 이스라엘을 생각하라'고 일깨운다.(히3,4장, 4:11) 이스라엘의 생각은 언제나 '나는 광야에서 고생한다' 하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뒤에는 옛 대적(애굽)이, 앞에는 새 대적(가나안 원주민)이 있다는 것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시원찮구나 하는 것과 낮에는 태양은 쪼여서 뜨겁고 밤에는 사막 기온이 내려가서 춥다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바 사람이 오직 '자기 자리에서' 삶을 본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삶은 앞도 뒤도 없고 어제도 내일도 없고 오직 현재 눈에 보이는 물질적 육체적 환경뿐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이 어제(과거에) 애굽에서 노예로 살며 죽을 고생을 했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일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복된 삶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광야의 메마른 환경이지만 하나님이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시며 표적과 기사를 통해(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그들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게 하시는 것과 온갖 대적을 능력으로 물리쳐 주시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영역 안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육체의 안락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망 없는 백성이고 구원 받지 못할 체질의 사람이고 눈이 어두운 소경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의 '사는 법'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우리가 계속 생각해 온 것은 믿음이 우리의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삶의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의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불평'과 '원망'과 '우는 것'과 '반란을 일으키는 것'과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이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울며 불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광야에서) 사는 법이었다.  

그들이 만일 광야에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물론 그것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농사도 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편안하게 등 붙이고 잠시 정착할 수도 없었다. 매일 보따리를 싸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야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짜증을 내며 모세를 거스려 애굽으로 돌아가자 보채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무슨 사는 법이 될 수 있겠는가? 결국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 복되고 쉬운 길을 버렸을 때 그들에게는 살 길(사는 법)이 없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약속이 눈에 보이지 않고 믿어지지 않을 때 모든 신자의 형편과 처지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 안에서 그렇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그렇게 하기로 결행(決行)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결국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처럼 '불평'과 '원망', '짜증'과 '투정'을 하다가 망해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크게 속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쉬운 길을 놔두고 지지리도 못나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러니 어떻게 잘 살 수 있었겠는가?

광야의 삶이라고 해서, 약속을 향해 가는 걸음이라고 해서, 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말아야 하거나 태양에 쪼여서 일사병이 생기거나 발이 부르트서 피가 나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그 자녀에게 육체를 무시하거나 포기하고 살아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죽으라고 하신 적도 없다. 하나님은 잘 살게 하기 위해 그 백성들을 부르셨다. 다만 그 방법과 과정이 어떠하냐 하는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초기의 이스라엘 곧 가나안에 살던 야곱의 자손들은 기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애굽으로 보내심으로써 목숨을 건지고 큰 민족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거기는 남의 땅이었지만 먼저 보낸 요셉 덕에 남의 땅에서도 잘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올 무렵에는 바로의 핍박으로 큰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의 기적적인 보호로 인해 죽지 않고 여전히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갔다. 광야에서 그들은 농사를 안 지었고 먹을 것이 준비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기적적인 공급으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좋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의 자녀들을 먹여 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에서 고생을 하고 심지어 삶을 상실하기까지에 이르게 된 것은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삶의 구체적 보장도 없는 황당한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오직 그들이 생명의 근원이요 삶의 진정한 수단인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삶의 구체적 보장은 없고 오직 미래만 바라보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믿음은 생각만 뜯어먹고 사는 막연한 삶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실제적인 수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에덴 동산을 구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삶의 여건들을 갖추어 놓은 후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영원하다. 아담이 어렵고 곤고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구체적 생활 방편도 없는 곳에 던져놓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 전도자의 교훈  ]

우리는 전도자의 다음 말씀을 통해서 삶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삶을 누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分福)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關念)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전5:18-20)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을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표준새번역)

전도서 기자는 우리에게 낙(樂)을 누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우리의 삶이 짧고 덧없으며 고생스럽고 수고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낙을 누리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낙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곧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 말한 것이다. 어디에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가? 바로 하나님(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녀로 아시고 사랑하고 보호하신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인생이 두렵지 않고 힘들지 않으며 즐겁고 기쁘게 된다. 부모의 품에 있는 아이는 안식한다. 그 마음은 언제나 담대하고 평안하다. 그것은 그가 그 부모를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요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도자는 결국 우리에게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들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아들로 행할 때 우리는 인생이 복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쉬운 삶의 길은 없다. 그것은 특별한 길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길이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나라 밖에서 살 사람은 거기에 맞는 다른 삶의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사람은 하나님 안에 붙어 있는 이것이 최고의 삶의 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공동체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주님이 교회의 머리시며 성령님이 우리를 날마다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 복잡한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오직 날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된다. 누구에게 무엇을 갖다주라 하시면 갖다주고 누구로부터 받으라고 하시면 받으면 된다.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하고 저것을 중단하라고 하면 중단하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시면 가만히 쉬면 된다. 하나님이 공부 머리를 많이 주셔서 공부로 길을 틔워주시면 공부로 나가면 되고 다른 재주를 주셔서 다른 길로 나가게 하시면 그 길로 가서 밥 먹고 살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친 자녀가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셔서 살게 하신다. 하물며 그 자녀인 우리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 염려나 고민할 것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된다.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사람, 그리스도의 길로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굶어 죽거나 비참한 상태에서 버림을 받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주님이 진리의 길로 간 결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때로 하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필요에 의해 정한 때에 그런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날마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며 그를 의지하는 자의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의지하는 자녀들을 항상 책임 있게 돌보신다.

다시 강조한다.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산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당연히 산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그 목적과 필요와 일을 위해 성별하신 자가 살지 못하면 누가 살겠는가? 인생이 곤고하고 고달픈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쉬운 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삶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결국 믿음과 순종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그가 부유하고 또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므로 그의 자녀들에게도 "주라" 하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이 말씀은 오직 부자 아빠의 부자 아들만 들을 수 있는 복된 말씀이다. "주라" 이것은 얼마나 여유롭고 호사스런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어디서 받을까만 생각할 때, 우리는 가진 것이 있으나 없으나 줄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권세 있는 인생인가?
없는 자에게는 주라고 말하지 않으며 고아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아닌 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며 이래라 저래라 하시지 않는다. 오직 당신의 부유함을 믿고 누리는 자에게만 이 말씀을 하신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말씀을 받아내는 자, 곧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안다면 그의 음성을 듣고 아낌과 두려움 없이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를 나누어주는 자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께 붙어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보장을 받는 친아들임을 나타낸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법과 의무가 아니라 생명의 특권이다.


[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사람은 언제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삶이고 삶의 내용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이것이 사람의 진정한 삶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가? 의와 평강과 희락의 세계로 이끄신다. 의의 세계란 내가 잘되고 내가 옳다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서기를 추구하는 세계이다.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다 똑 같이 사랑 받고 잘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평강과 희락(기쁨)의 세계란 내가 편하고 내 육신이 기쁜 것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형제들이 다 함께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며 그리하여 (육신이 아니라) 내 영이 기뻐하게 되는 것을 추구하는 세계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이런 세계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심지어는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된다. 우리나라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나라가 아니며 그런 것을 삶의 내용으로 하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존중히 여기며 그 마음을 따라 사는 나라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형제를 사랑하는 세계로 형제에게 조건 없이 '주는' 세계로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는 의가 충만하고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참으로 온 세상을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세계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퍼지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도 아무 부족함이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기적을 베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는' 자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많이 가진 자의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없는 자의 필요를 채우게 하신다. 그 결과 많은 자도 남지 않고 적은 자도 모자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3-15)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는 세계이다. 우리는 참으로 이것을 사모한다. 그 나라와 의,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교회는 이 나라를 세우고 앞당기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생명의 체험, 생명의 능력으로 이 나라를 세상에 소개하고 전파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기 전이라도 이 나라의 실체를 나타내고 증거하도록 세워진 기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놀랍도록 실현되며 하나님의 통치가 확고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온 세상이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형제들에게 관심을 갖고 동정하며 그들의 필요를 따라 우리 가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잘 되게 될 뿐 아니라 우리도 잘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 사는 길(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삶의 길과 방법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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