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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2010.04.30 14:15

이상봉 조회 수:372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한다(judge)는 것은 판단(재판)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 뒤에서 '헤아린다'는 말로도 그리고 다른 번역 성경에서 '저울질한다'(공동번역), '되질한다'(표준새번역)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어떤 단어를 쓰든 그 내용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문제를 따지며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듣는 자리에서 말하든지 안 듣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든지 상대의 허물과 잘못을 좋지 않은 감정으로 말할 때 그것이 비판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옳지 않은 일로 여기셨다. 그리고 비판하는 사람을 외식자(위선자)로 여기셨다.


1.우리의 생명은 형제를 비판하는 생명이 아니다

주님은 왜 우리에게 비판(심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주님 자신이 비판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의 생명은 심판하는 생명이 아니라 살리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내가 온 것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8,19)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첫째, 태초에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요, 둘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러 오셔서 구원의 손을 내미셨는데도 그것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주님(아들)의 생명이 이러하다면 우리 생명도 이러하다. 우리(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형제를 비판(심판)하는 생명이 아니라 살리는 생명이다. 이것은 바깥에서 누가 가르쳐서 알아질 문제도 아니고 법으로 규정한다고 알아질 문제도 아니다. 스스로 속에서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자식을 대할 때 우리는 그에게 수많은 잘못과 허물이 있어도 그를 밉게 여기지 않으며 다 이해를 하고 인내와 긍휼로 포용하게 된다. 그것은 그래야만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이 저절로 그와 같은 태도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생명이다. 그리고 형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다. 사랑의 생명이 모든 입을 막고 모든 문제를 덮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벧전4:11)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생명을 따라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 감정대로 세상 상식과 습관대로 말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하게 하심을 따라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서로 비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2)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 곧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 자식은 잘나나 못나나 사랑스럽다. 그것은 나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형제를 이러한 시각으로 볼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13)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사탄에게 깊이 속은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그의 자녀로 대하지 않으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 즉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약자를 차별하지 않고 긍휼로 대하는 것이 이렇게 절대적인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문제가 아니고 단순한 행위의 문제라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 영생은 곧 아들(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받은 사람은 이 생명대로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들의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그는 교회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아들의 생명을 참으로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사탄에게 속아서 헤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많은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로 인해 속아서 마치 자기가 세상에 속한 자인 것처럼, 마치 자기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판단하며 미워할 수 있는 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2.우리에게는 형제를 비판(심판)할 자격이 없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해서는 안될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로 인해 그리고 세상의 많은 일들로 인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우리는 남의 허물과 잘못과 못남으로 인해 화가 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그런 문제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다. 내 발에 불이 떨어졌는데 남의 일을 걱정할 여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말이다. 내 눈에는 들보가 박혔고 형제의 눈에는 티끌이 들어갔다면 내가 형제의 문제에 대해 입을 대해 왈가왈부할 형편이 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긍휼의 정신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긍휼을 거두시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멸망이다. 가장 무서운 마귀의 시험은 우리로 율법을 붙잡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남보다 약간 낫고 남보다 약간 잘하게 되었을 때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은혜와 긍휼로만 말고 법과 이치와 행위로 따지는 자리로 나아가라고 부추긴다. 이것은 우리를 은혜에서 떨어지게 만들려고 하는 마귀의 수작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비판이란 결국 판단이고 심판이다. 그리고 판단은 주님의 특징이 아니라 아담의 특징이다. 눈이 밝아 옳고 그름을 스스로 분별하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만이 옳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분별하실 수 있으시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고장난 시계는 오직 그 시계의 주인만이 버릴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남의 시계를 고장났다고 쓰레기통에 넣을 수 없다. 오직 주인만이 시원찮은 직원을 해고할 수 있고 공부 안하는 아이를 혼내줄 수 있다. 창조자만이 왜곡된 만물을 심판하고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과 같이 (성령 안에서) 눈이 밝고 의에 대한 관념이 있고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령(마음)을 따라 만물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다. 또 결국 (하나님의 위임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6:2,3)

그러나 그보다 앞서는 우리의 위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타락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하고 정상적인 자가 아니라 흠 있고 고장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고 심판할 자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처리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을 포함한) 만물 앞에서 기본적으로 겸손해야 하고 자숙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몸은 죄와 사망의 몸이다. 우리 안에는 지금 죄와 사망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 이것은 죽는 날까지 변치 않는 우리의 실상이다. 주님의 다시 살리심을 통하여 새 몸을 입게 되는 그 날까지 우리는 타락하고 왜곡된 몸(육신)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걷지 않으면 안될 인생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시비를 가리는 것과 정죄와 심판은 우리 것이 아니다.

다시 상기하자. 심판은 누가 할 수 있는가? 첫째, 심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하라고 지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다 죄인이고 허물과 흠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을 심판하라고 세움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판단하고 심판해서는 안된다.  


3.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 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14:1-6)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7-9)

우리는 매사에 자신(의 뜻, 감정)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 되심, 왕 되심, 주인 되심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 잘못들과 아니꼽고 뒤틀리는 일들을 다 판단하고 심판하여 처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오직 우리를 세우신 주인의 뜻을 순종하여 받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뜻을 세우며 그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 즉 그리스도가 세상의 왕 되심을 드러내는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14:10-14)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분수와 주제를 넘어서 형제를 실족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면 가만 두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과 같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5-17,19)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 우리가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무엇을 먼저 바로 잡고 무엇을 먼저 세워야 할 자인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 내 옳고 그른 것이나 내 감정과 기분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옳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모든 지체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림으로써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 형제를 지으셨고 부르셨고 세우셨으며 이끌고 계신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며 인도자시며 심판자이시다.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를 존중하며 그에게 순종할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에게 어떤 부족과 허물이 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고 거절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인내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로 인해 답답한 것은 알고 보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신뢰와 경의를 표하는 사람,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만물과 만사의 배후에는 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조급해하거나 답답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정의롭지 않으며 하나님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거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일을 지혜롭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답답한 사람을 볼 때 그가 답답하므로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고 밀어내고 잡아뜯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교회를 키우시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다. 우리의 할 일은 이것을 이해하고 바라보며 순종함으로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4.우리의 일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는(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이 생명의 빛(말씀과 삶)으로 사람을 살리며 온전케 하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고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다 그렇게 사역했지 가르침과 비판만으로 사역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비판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일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비판해서 어떤 이득이 있고 일이 어떻게 잘 되는지 간에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형제를 판단하고 심판할 자가 아니다. 우리 주님 곧 우리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의 근본이시고 모범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그 아들은 한 번도 죄인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을 다시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6-48)

주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정하신 진리 그 자체가 심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율법으로 나타났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5:45)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3-47)

문제는 생명이다. 이 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것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말씀(진리)을 듣는 것이고 그 생명이 없는 사람은 못 듣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오늘날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말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사람(전하는 자 - 예수)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오직 문제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며 마귀로부터 난 자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0-12)

주님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빛으로 인도하셨다. 죄인은 이미 죄인이고 사람은 이미 고장나 있는 것이다. 정죄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사실 정죄와 심판은 이미 내려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서둘러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죽은 자, 죄인, 흠과 티가 있는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살리고 고치고 채워서 온전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판의 목적이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일깨워서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감정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혹 어떤 사람들은 비판과 책망이 사람을 일깨워서 바르게 하고 유익을 준다고 믿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따른 지적과 책망이 아닌 육신적 비판이나 책망은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사람을 별로 교정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정죄와 판단이 아니라 사랑이다. 정죄와 판단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지식은 교만케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다.(고전8:1)

많은 잘못과 실수는 몰라서 그것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이나 책망보다는 사랑과 격려, 짐을 같이 지면서 이끌어주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다. 무릇 모든 일은 사랑의 바탕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접수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사람을 살리고 이롭게 하려면 먼저 사람이 다가오고 달라붙도록 한 후에 작업을 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가 힘써 추구해야 할 덕목들을 열거하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지식은 그 하나만으로 설 수 없다. 지식만으로는 온전치 못하다. 베드로는 지식 앞에 덕을 그리고 지식 뒤에는 절제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그 맨 끝에는 형제 사랑이 덧붙여져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이 있고 판단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을 판단할 수 있다.(고전6:1-3)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듣고 주님을 오래 따르다 보면 이것은 이렇게 틀렸고 저것은 저렇게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 눈에 바로 들어오게 된다. 이런 지식 곧 이런 분별력과 판단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바로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우리의 지식에는 반드시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포함되어 있는 덕과 절제와 인내와 형제 우애와 사랑이 함께 역사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의 원리이며 또한 우리 사역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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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무와 열매 - 생명과 행위 (마7:15-23) / 2004. 7. 11 이상봉 2010.04.30 3791
66 거짓 선지자 (마7:15-23) / 2004. 7. 4 이상봉 2010.04.30 3667
65 좁은 문과 길 (2) (마7:13,14) / 2004. 6. 27 이상봉 2010.04.30 3594
64 좁은 문과 길 (1) (마7:13,14) / 2004. 6. 20 이상봉 2010.04.30 3584
63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2) (마7:6-12) / 2004. 6. 13 이상봉 2010.04.30 3537
62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1) (마7:1-12) / 2004. 6. 5 이상봉 2010.04.30 3611
» 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이상봉 2010.04.30 3726
60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 (마6:19-33) / 2004. 5. 23 이상봉 2010.04.30 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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