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산상보훈의 내용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곧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섬길)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된 말씀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곧 형제나 이웃이나 원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된 말씀이고, 셋째는 자신과의 관계 즉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며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된 말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은 마6장 전반부(6:1-18)에서 자세히 언급되었다. 여기서 주님은 기도나 구제를 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지(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은밀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은 마6장 후반부(6:19-34)에서 자세히 언급되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을 믿고 모든 삶을 하나님의 일에 투자하라고 말씀하셨다. 요즘 하는 말로 하면 하나님께 인생을 올인(all in)하라는 것이다. 7장 후반부(7:13-27)에서 하신 말씀 역시 같은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넓은) 길로 가지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며 가장 지혜로운 인생이 다. 왜냐하면 없어질(썩어질) 것, 작은 것(땅에 속한 유한한 인생)을 투자하여 영원한 삶(생명)을 사는(buy)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 이것이 바로 진실하고 영원한 인생을 건축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것이 이웃과의 관계, 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다. 사실 산상보훈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부분이 이 부분이다. 마5장 전체와 7장 전반부(7:1-12)의 말씀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5장에서 주님은 사람을 사랑할 것에 대해 폭넓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사랑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며 남의 아내나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이며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이며 상대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주는 것이며 원수를 (원수가 아닌 친구가 되도록, 좋은 사람이 되도록) 축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이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태복음 7:1-12 말씀 역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한 말씀이다. 지난 주에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함께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보자. 형제를 비판(판단, 심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 자신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 생명 또한 남을 비판하는 생명이 아닌 것이다. 아들의 생명은 심판하고 정죄하는 생명이 아니라 사랑하고 살리는 생명이다. 우리 생명은 사람을 행위에 따라 판단하고 차별하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원리)에 따라 잘난 자나 못난(허물이 있는) 자를 다 같이 받아주는 생명이다.

둘째,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판(심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가 세상 죄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점이다. 오직 그 차이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은 영원히 사람(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이다.  

셋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권세는 오직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대를 하거나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을 추진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어떤 못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사랑하심으로써 우리 곁에 두셨다면 우리는 그를 판단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넷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고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못난 자를 가려내어 심판하고 잘라내는 일은 우리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생명을 따라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며 온전케 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려면 비판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8-13)

여기서 '나타나지는 것'이란 말은 '나타내는 것'이란 뜻이다. 즉 나타내는 것이 빛이라는 말이다. 빛은 상대방의 실상(어둠)을 드러낸다. 무엇으로 드러내는가? 책망과 비판으로 드러내는가? 그것이 아니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어두움이 없어지고 빛이 밝아지면 우리와 접촉하는 다른 사람들은 저절로 밝아진다(살아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일은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빛으로 사람을 살리며 온전케 하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고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다 그렇게 사역했다. 가르침과 비판만으로 사역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6-48)
주님의 관심과 사역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5:45)
심판은 진리(말씀, 율법) 그 자체가 하는 것이다. 우리를 통해서 비취는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저절로 정죄와 심판 아래 있게 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8,19)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잘못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가서 좀 말해주어야 하는데, 내가 가서 혼 좀 내 주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안해도 된다. 그 일은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알아서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사람을 사랑하며 생명의 빛을 비추어 살리는 것이다.

비판과 가르침은 결코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비판(판단)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닫히게 할 뿐 사람을 교정시키지 못한다. 많은 잘못과 실수는 몰라서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안 돼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보다는 감화와 섬김(도움)이 필요하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1-5)

이것이 우리의 자세이다. 잘못된 자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유한 심령이 필요하다. 그리고 함께 짐을 져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모든 일은 사랑과 긍휼과 동정(同情)의 바탕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이 접수하며 변화한다. 말에서 사랑과 긍휼, 동정의 정신이 빠지면 지식만 남게 되는데 문제는 지식은 자신을 교만케 만들고 상대를 위축시킬 뿐 살리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사람의 마음은 지식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열린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없으며 비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비판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을 쳐다보고 자신을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자신의 형편이라는 바탕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저절로 분명해진다. 하나님을 쳐다보면 우리는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주님은 단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더 우선적인 문제는 형제를 비판하고 가르치는 것의 효과가 아니라 자격이다. 하나님이 중시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생명(자격)이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내가 그 일을 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그 일을 할 생명의 부담(담대함, 확신)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이 점에 있어서 확신이 없다면 그 일은 우리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하도록 하고 우리는 빠져야 한다. 하나님은 길가의 돌들을 들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며 당나귀를 들어서도 하나님의 (책망을 전달할) 종으로 삼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꼭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을 안 해도 된다. 내가 이 사람을 비판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전에 일선 경찰서 형사의 하루 일과를 취재한 TV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거기서 한 형사가 한 말이 기억난다. 한 형사가 어떤 범인을 추적하여 잡았는데 그 범인은 흉악한 악인이 아니라 단지 사정이 딱하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돈이 없어서 생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상대의 악행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기자나 형사가 볼 때 할 수만 있다면 안 잡고 놔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기자가 형사에게 물었다. "저런 사람은 애써서 잡지 말고 대충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때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형사는 잡고 검사는 기소하고 판사는 심판하고 목사는 용서하는 것 아닙니까? 용서하는 것은 목사의 일이고 형사의 일은 잡는 것이지요." 봐주고 용서하는 것은 목사나 다른 사람의 몫이고 자기에게 부여된 몫은 죄인을 잡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저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내 일에 충실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잘 안 되는 때가 많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비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남의 잘못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도 아니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가장 솔직한 이유는 내가 남에게 그와 같이 비판을 받거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남이 나를 가르치거나 내 이야기를 (안 좋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남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수준 높은 이유들에 비하면 이것은 수준이 낮은 이유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게 있어서는 남을 비판할 수 없는 가장 솔직한 이유다. 분명한 것은 내가 남을 비판한다면 남도 나를 비판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참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정죄를 받아야 할 여러 가지 허물과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날마다 비판과 가르침을 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왜 잘못하고 있는지 대부분의 경우 알고 있으며 남들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 대해 속상한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판단하고 가르치는 말을 듣기보다는 사랑과 격려와 위로를 더 받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말씀은 오랜 세월동안 '황금률'이란 이름으로 불린 유명한 말씀이다. 성경 안에는 많은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여러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모든 성경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인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의 세계로 인도하신다. 아들의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아들이라는 것 외의 다른) 자격과 조건 없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이라는 그 한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거저 얻어 쓴다는 것이다. 아들의 길은 아들의 마음을 가지는 데서 출발한다.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이며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보호와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을 뿐(태어날 뿐)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계속 그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아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저 없이 아버지께 아뢰고 받는다. 죄를 지어도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하면 그만이다. 맡겨 놓은 것이 없는데도 달라고 하며 찾아간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

주님은 기도의 비유를 들어서 아버지의 마음(세계)을 표현함과 동시에 아들의 모든 행동의 원칙을 말씀하신다. 아들은 '구하면 주는' 아버지를 알며 이 마음(사랑과 용서와 긍휼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자기 인생을 설계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는 위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요구하며 옆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여는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요구하는 대로 주는) 자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다른 사람을 대한다. 그 마음은 곧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며 따지지 않고 주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주님의 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주시기를 원하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그 '좋은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누가는 누가복음 11:13에서 그것을 '성령'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령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최고 선물이다. 아들의 자리에서 우리는 아버지(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구하고 최고의 것을 받는데 그 최고의 선물, 완벽한 선물이 바로 성령님이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면에서 아들(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갔던 그 길이다. 그 길은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하며 내가 원하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길이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를 이 길로 이끄신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날마다 가르치신다. 그는 날마다 우리에게 '네가 아버지께 조건 없이, 자격 없이, 행위와 상관없이 무엇이든지 요구하고 받은 것처럼 형제에게도 그렇게 해 주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여기서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의 말씀(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과 뒤의 말씀(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형제를 대접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세계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4-17) / 2004. 10. 3 이상봉 2010.04.30 3711
78 신랑이신 주님 (마9:14,15) / 2004. 9. 26 이상봉 2010.04.30 3689
77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함 (마9:9-13) / 2004. 9. 19 이상봉 2010.04.30 4409
76 구원의 권세를 행사함 (마9:1-8) / 2004. 9. 12 이상봉 2010.04.30 3675
75 믿음의 본질 (4) (마9:1-8) / 2004. 9. 5 이상봉 2010.04.30 3670
74 귀신 들림 (마8:28-34) / 2004. 8. 29 이상봉 2010.04.30 3730
73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 (마8:19-22) / 2004. 8. 22 이상봉 2010.04.30 3572
72 믿음의 본질 (3) (마8:14-17) / 2004. 8. 15 이상봉 2010.04.30 4154
71 믿음의 본질 (2) (마8:5-13) / 2004. 8. 8 이상봉 2010.04.30 3767
70 믿음의 본질 (1) (마8:1-4) / 2004. 8. 1 이상봉 2010.04.30 3939
69 반석 위에 지은 집 (마7:24-27) / 2004. 7. 25 이상봉 2010.04.30 5036
68 불법 (마7:21-23) / 2004. 7. 18 이상봉 2010.04.30 3961
67 나무와 열매 - 생명과 행위 (마7:15-23) / 2004. 7. 11 이상봉 2010.04.30 3791
66 거짓 선지자 (마7:15-23) / 2004. 7. 4 이상봉 2010.04.30 3667
65 좁은 문과 길 (2) (마7:13,14) / 2004. 6. 27 이상봉 2010.04.30 3594
64 좁은 문과 길 (1) (마7:13,14) / 2004. 6. 20 이상봉 2010.04.30 3584
63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2) (마7:6-12) / 2004. 6. 13 이상봉 2010.04.30 3537
»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1) (마7:1-12) / 2004. 6. 5 이상봉 2010.04.30 3611
61 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이상봉 2010.04.30 3726
60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 (마6:19-33) / 2004. 5. 23 이상봉 2010.04.30 3822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