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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후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분위기는 앞 말씀의 분위기와 매우 다르다. 주님은 지금까지 사람을 사랑하며 용납할 것에 대해 말씀해 오셨는데 여기서는 어떤 사람을 거절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한 것 또는 진주란 그리스도인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가치들(주로 진리의 말씀)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보배는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삶과 교훈(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빛이요 생명의 말씀이다. 거기다가 직접 입을 열어 복음(진리)을 전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항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며 생명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강한 생명의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사탄이다. 주님은 누구에게 거룩한 말씀을 던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개와 돼지이다. 그렇다면 개와 돼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 성경에서 개와 돼지는 부정한 동물을 대표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양과 소의 반대편에 서 있는 동물들로서 이스라엘에게 합당하지 않은 동물들이었다. 양은 어떤가? 유목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약 이스라엘 사회에서 양은 주인에게 젖과 털과 고기를 제공하는 매우 귀한 동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은 유순하여 주인을 잘 따른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양을 (인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상징 동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게 했으며 그것들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신 것 같다.

이에 반해 개는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익한 동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를 먹었으므로 고기를 제공하며 집도 지켜주는 귀한 동물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개라고 하면 (개를 집에서 키우지 않았으므로) 모두 들에서 방황하며 죽은 짐승의 시체를 뜯어먹거나 양을 공격하는 들개(이리떼) 무리들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개란 단지 거칠고 불결한 동물이었을 뿐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마7:15에서 주님은 이리에 대해 경계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개에 대한 주님의 입장을 말해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로 보건대 주님이 경계하신 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해를 끼치는 그 어떤 무리들을 의미하신 것이 틀림없다.

돼지 역시 (고기로 먹지 않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동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한 중동 사람들은 모두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돼지는 아무 유익이 없고 단지 양식만 축내는 더러운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돼지 역시 개처럼 (집에서 키우지 않았으므로) 대개 산돼지나 멧돼지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혹 이방인들을 본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키우는 유대인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개와 돼지는 실제적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익하고 해로운 동물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도 이들은 부정한 동물로 규정되어 있었다. 개는 굽도 갈라지지 않았고 되새김질도 하지 않았고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부정한 동물이었다.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정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이스라엘에서 부정하고 무익한 동물이 된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부정하다고 규정하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개와 돼지는 분명히 이스라엘인들에게 부정하고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짐승들이 이스라엘 사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여서 키우고 있든지 아니면 산과 들로 돌아다니는 들짐승이든 이스라엘 안에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안될 동물인 개와 돼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안에는 개와 돼지에 해당하는 곤란한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1-22)

여기 개와 돼지가 등장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교회(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으면서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 곧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영적으로) 불결한 자들이다.

개와 돼지의 특징은 첫째,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야 언제든지 더러운 자들이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교회(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 밭에 뿌려진 가라지도 마찬가지이다. 바깥에 있다면 가라지라고 굳이 일컬으며 경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밭에 곡식 틈에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와 바른 복음 진리를 좇지 않고 세상과 마귀의 허탄한 거짓말을 좇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개와 돼지 혹은 가라지는 단지 자신이 그리스도를 좇지 않고 진리를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다른 길로 가도록 호도한다. 그러니 문제인 것이다.

주님이 마7장에서 개와 돼지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아직 교회가 서기 전이므로 여기서 가리키는 개와 돼지는 유대교 지도자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외식하는 종교인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극히 위험하고 불결한 자들이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愚氓)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6-12)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개들과 돼지들이 (구약 이스라엘에서든 신약 교회에서든) '외식하는 종교인들' 곧 생명 없는 거짓 신자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외식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일단 겉은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과 목표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대접이므로 겉은 언제나 경건하고 아름다운 듯이 보인다. 그들은 마치 오직 진리와 영생을 추구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속은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개와 돼지인 것이다.

우리는 아직 (영적으로) 어려서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남의 선생 노릇을 자처하는 외식자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위험하지 않지만 후자는 위험하며 전자는 희망이 있지만 후자는 희망이 없다. 그럼로 외식하는 거짓 신자는 그 실체를 아는 순간 거절하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길은 우리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 안에서 정해진다. 우리의 모든 행동 역시 그러하다. 성령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이제까지 우리가 계속 생각한 바는 성령님은 우리를 형제를 사랑하는 길로,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연합하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수라도 용납하고 사랑하는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성령님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다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 그는 먼저 사람을 하나님과의 사랑,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시며 진리와의 연합으로 인도하신다. 그런 후에 그 바탕 위에서 사람과의 연합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모든 연합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초 위에서 하는 것이다. 생명 안에서의 연합, 아들(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이것만이 우리의 연합의 원칙이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표현이고 실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오직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주심으로써) 사랑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말씀을 주심으로써 사람을 살리시며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 우리의 연합도 이러한 노선 위에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아들(말씀)을 주심으로써 세상을 사랑하셨다면 우리의 사랑도 그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덮어놓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 또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과 접촉하며 사람을 살리며 생명을 키우는 것이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접근(말씀 전파, 생명의 역사)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개와 돼지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거절하며 접촉하지도 말 것을 종용하신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던지는 것은 개(이리)에게 거룩한 것을, 돼지(산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아서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다칠 우려마저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위한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병균도 사랑하고 암도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면 그 아이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 그것을 해치는 것들을 미워해야 마땅하다. 만일 아이에게 애완견이 있다고 할 때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소유인 개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에게 개 알레르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 개를 아이에게서 떼어놓을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개가 아이를 물어뜯는 습관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개를 없앨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랑의 길이고 방법이다.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주님의 태도 그리고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이와 같다. 사랑에는 제한이 없지만 사랑의 방식에는 제한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아들의 생명(진리 말씀, 복음)으로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의 방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그를 대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주님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다수의 무지한 양떼를 건지기 위해 그들을 해치는 소수의 이리떼(유대교 지도자)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배척하셨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세포와 암 세포를 동시에 사랑하고 수용할 수 없듯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과 그것을 훼방하는 자들을 동시에 사랑하며 수용할 수는 없다. 양은 모으고 이리는 격퇴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처음에는 진리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전파하셨지만 나중에는 종종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심으로써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감추셨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3-17)

이것이 바로 개와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감추신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명 말씀을 거부할 뿐 아니라 짓밟고 왜곡시키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이런 자들로 인해 훼방되고 저지되었다. 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혹은 목자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양을 삼키기 위해 온 이리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생명의 말씀)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것은 심판과 저주의 말씀뿐이다.
개와 돼지, 염소와 이리, 이것은 다 양이 아닐 뿐 아니라 양을 해치고 좀먹는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양을 사랑하는 자는 부득이 이들을 경계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도 그리스도도 모르는(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다. 모를(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진리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도록) 미혹한다. 주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 중 다수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주님의 목을 졸랐다.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가 교통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 우리 가족이나 우리 교회 안에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교류하고 있는 기독교 세계 전체로 보면 이런 사람들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삼가고 주의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개들과 돼지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던지지 않는 것인가?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10:16,17)

주님이 먼저 지적하신 바는 첫째, 그런 사람들과 교통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통한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의지하는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유대 사회)으로 보내실 때 그들이 절대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무엇인가 기대하거나 의탁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므로 영적 사업을 하는 데는 이들을 배제할 수 없고 이들과 합작하거나 교류하면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순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만 속에는 자기 이익과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과 일부러 대적하며 싸울 것은 없으나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호의적인 관계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무지한 자들이 아니라 악하고 위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5:11-13)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9-11)

바울과 요한은 교회 안에서 진리를 거스려 악한 일을 도모하는 자를 보면 교제를 중단하고 즉시 내쫓으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무자비하게까지 느껴지는 매우 단호한 말씀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들이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 후 주님은 갑자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는 문제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문제 사이에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있다. 주님이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그리고 거짓 신자들을 거부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기도로 하나님께 구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가르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 우리의 갈 길과 행할 바를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인생의 지혜를 구하고 길과 방법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우리가 억지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우리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다 가르쳐주시니 그의 인도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아들)의 행사를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모든 것을 가르치며 오직 그 길로 가도록 역사(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자는 남에게 묻지 않아도 되며 스스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그 속에 있는 생명의 흐름대로 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신약(새언약) 시대이다. 이스라엘 무리들 중 지금 주님이 하시는 말씀(산상보훈)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 후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성령 안에서 형제는 형제대로, 적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대로 합당하게 대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런 때가 속히 오도록 기도로 구하게 하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9-13)

그러므로 문제는 생명이다. 즉 아들 안에 거하느냐, 성령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를 무지와 죄와 사망에서 건져서 의와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이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사람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치시며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알게 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형제를 어떻게 용서하며 사랑하며 섬길 것인가를 알게 하시며 어떤 사람은 영접하고 어떤 사람은 거부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하신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2:20-27)

한 교회로부터 어떤 사람이 이단이고 거짓 선지자이며 어떤 사람이 참 형제인지를 알기 어려우니 가르쳐달라는 요구를 받은 요한은 그들에게 간단하고도 명확한 대답을 했다. 그것은 오직 '아들의 생명 안에 거하라', '아들의 생명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생명 곧 신자 속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니 그대로 따라가라는 것이다. 율법은 획일적이며 부분적인 지식을 주지만 성령의 인도는 모든 것을 가르치며 사람을 세밀하고 온전하게 인도한다. 그러므로 오직 그 안에 있으면 모든 일에 틀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새 계명, 새 율법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다. 과거에 율법과 선지자가 말한 모든 것은 오늘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그 내용이 똑 같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 이 동일한 영을 따라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율법 안에서 말씀하시고 선지자 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금은 성령 안에서 더 완전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사모하며 순종해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 라는 말씀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말씀이 나타내는 바는 우리가 서 있는 세계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계는 '달라 하면 주는 이가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달라 하며 누구에게 받는 것인가? 세상에서는 오직 사람에게 부탁하고 사람에게 받는 것이 전부이지만 우리의 세계, 곧 아들의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님(아버지)께 달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우리는 사람에게 달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오직 하나님께만 아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요 오직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 외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아들의 삶을 살며 아들의 길에서 행한다. 아들에게는 아들의 (삶의) 방식이 있다. 아들에게는 권리도 있고 책임도 있다. 권리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하여 받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아버지의 길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아버지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을 떠나 혼자 사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과 세상에서 함께 산다. 우리도 사람을 상대하여 살며 사람들에게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필요가 있을 때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나를 자식으로 아시고 구하는 것은 다 당연히 준다는 사실을 믿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공급으로 산다. 혹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받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갖다주라고 지시를 해서 가져왔기 때문에 받는 것이지 내가 직접 그에게 무엇을 달라고 해서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은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자기 뜻(생각)이나 기분(감정)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오직 아버지(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한다.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는 자는 또한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자이다.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비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더라도 우리는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너는 너의 약점으로  인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싶으냐 그렇지 않거든 너도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입을 다무는 것이 바로 '구하면 얻는' 아들의 삶의 방식(길)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겉으로 볼 때 괜찮아 보이고 (나에게 호의적이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라도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저 사람은 양을 해치는 이리떼이다. 그러므로 그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과 호의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그를 경계하는 것이 바로 아들의 삶의 방식이다.

결국 구하면 얻는 자의 세계란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세계이며 아들의 세계는 곧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하나님의 생명)대로 인도 받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아들)의 생명은 우리를 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의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당당하고 권세 있는 사람의 길로 인도한다. 이 생명으로 인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위하는 인생을 산다. 또 이 생명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거부할 사람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더 견고히 세워간다. 그리고 이 생명으로 인해 우리는 사람에게 꾸는 자가 되지 않고 오직 나누어주는 삶을 산다. 또 이 생명으로 인해 우리는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요구하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화평과 기쁨과 연합을 가져오는 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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