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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산상설교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생명의 특성(성품, 인격)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실체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 실체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아야 한다. 우리 성품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이요 이는 곧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범사에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말하고 하나님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직 생명 안에 거하기만 하면,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주님은 마5장에서 팔복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잘 묘사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이 가난한 사람이며 애통하고 온유한 사람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순수하고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는 사람이며 의를 인하여 기꺼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욕을 먹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미워하며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은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접수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여기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환영을 받든 받지 못하든 세상 속에 살면서 빛과 소금으로 역사해야 한다. 세상은 마귀의 것이 아니며 멸망할 죄인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거짓말로 속이고 살인하고 파괴하며 흔들 때 우리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세상을 부패와 혼란에서 건져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정신과 세상 죄는 사랑하지 않지만 세상(사람)은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또 우리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마귀에 의해 파괴되지(와해되지) 않도록 지키며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최후의 그 날까지 세상을 보존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보존하고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끝까지 비추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마5:17 이후의 말씀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삶의 규범(율법)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지닌다. 그 수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수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계신 그 분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것처럼 의롭고 하나님이 사랑으로 충만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 결과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6장 전반부에서 주님은 기도와 금식, 구제 등의 일을 할 때 어떤 마음과 동기로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나오는 일이므로 절대로 사람을 의식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이 그 기초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믿음(하나님만 바라봄)의 바탕 위에서 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기도는 사람의 육체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6장 후반부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삶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사는 자들이다. 이것은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살고 난 다음에 즉 삶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의 필요 때문에 당연히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하나님이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당연히 유지되는 것이다. 자녀의 생활은 당연히 부모가 책임지는 것이다. 자녀의 관심은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뜻을 이루는데 있다. 즉 공부를 잘하고 건강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전적으로 그러하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몸은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생존 방식이고 삶의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 주님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 것과 거짓 선생들을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의 결정 원리는 우리 속에 어떤 생명의 인도가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 원리이다. 내 속에 어떤 것을 원치 않는 생명의 흐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스려(그것과 배치되는) 다른 사람에게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성령의 인도)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말씀을 하신 다음에 주님은 7:13-27의 마지막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마지막 말씀은 다른 교훈이 아니라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교훈들을 진실로 받아들여서 실행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고 권위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들이 감탄하며 찬양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놀라며 그 말씀을 높이 평가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감탄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은 최종 목표가 아니라 단지 과정이고 수단이다. 최종 목표는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다.

사랑과 화평, 연합에 대해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람들과 연합하며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거룩함에 대해 아는 것과 거룩함을 누리는(실제로 거룩해지는) 것도 다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누가 주를 보는가? 누가 주님의 영접을 받는가? 화평과 거룩을 지식으로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실제로 순종하여 그것을 나타내는 자가 주님의 영접을 받는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형제들에 대해 진리에 대해서 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실행을 하라고 촉구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4)
현재에 있어서 우리의 진정한 과제는 순종과 실행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순종과 실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 신자인지 아닌지는 말과 지식으로는 판별할 수 없고 오직 열매(실제 삶의 모습)로서만 판별할 수 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생명을 주셨고 그리하여 우리 속에서 그 생명의 부담이 실제적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생명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이며 의지와 결단의 문제이다. 진정한 은혜(하나님의 선택)는 반드시 믿음(사람의 반응)을 동반하며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결단과 순종을 동반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지식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지식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계시의 문제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셔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행과 순종의 문제는 사람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해야 할 일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좋다 하며 칭송하며 감탄하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일일뿐이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걷는 것이다.

또 주님의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자기 편한 대로 취해서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말씀을) 이용하는 것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종교란 (인간의 내면 또는 자연 현상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멋대로 해석하여 하고 있는 놀음이다. 이런 것은 외형상으로는 말씀에 대한 순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순종이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무신론자, 방종주의자, 세속적 쾌락주의자가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까지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뜻과 달리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 영광과 육신의 이익을 위해 그런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순종과 행함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다. 생명의 문, 생명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쉽게 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좁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좁다 넓다, 쉽게(편하게) 산다 어렵게(힘들게) 산다 하는 것은 무슨 기준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인가? 바로 육신의 느낌이다. 육신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것은 육신이 원하지 않는 문이고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오직 영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육신의 요구(욕망)대로 살면 인생은 편하고 쉽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해주면 우리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을 쉽고 편하게 사는 것과 진정한 인생 또는 영원한 인생을 사는 것은 다르다. 쉽다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쉽고 진리 안에서 쉬운 것이라면 좋은 것이지만 과정을 생략하고 일을 적당히 처리하여 (인생 건축의) 부실 공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인생을 부실하게 건축하는 것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말씀을 듣고도 실행이 없는 사람은 그 인생을 모래 위에다 건축하는 것과 같고 불이 잘 나는 지역에서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이런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육신대로 사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공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지만 결국은 허물어지므로 지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 인생은 반드시 진리 위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건축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이 건축될 영원한 터전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 그 영원한 터 위에 영원한 집(인생)을 건축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만 마지막에 살아남아 하나님과 동거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생명을 보고 느낄 뿐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서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 누림은 주님의 길을 실제로 따름으로써 이루어진다. 마5장부터 7장 12절까지 말씀에서 주님이 밝히신 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시민으로서 우리의 삶은 육신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명 자체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혹은 육신의 입장에서 볼 때 좁고 협착한 성격을 지닌 생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새의 생명은 하늘을 나는 생명이고 물고기의 생명은 물 속을 헤엄치는 생명이다. 새는 하늘에 대해서는 자유롭고 넓은 생명이지만 물에 대해서는 자유가 없고 좁은 생명이다. 우리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의와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 생명은 한없이 넓고 자유롭지만(잘 맞지만) 세상에 대해, 육신의 정욕에 대해서는 한없이 좁고 부자유스럽다.  

산상보훈에서 주님은 당신의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 당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주님 자신의 삶의 방식과 원리가 무엇인지 말씀하셨다. 그것은 곧 우리의 생명과 삶과 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모든 말씀을 하신 후에 덧붙이신 말씀은 오직 그대로 살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만이 우리 삶이고 우리 길일뿐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믿음은 곧 순종이며 실행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6-18) 여기서 바울은 죄의 종의 반대말을 순종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곧 믿음은 순종이며 죄는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믿음의 실체, 죄와 불신앙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주님은 땅에 계실 때 항상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경계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악하거나 부도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들이 인간적으로 미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주님이 그들을 경계하신 것은 오직 그들이 사탄의 가장 교활하고 무서운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무엇이 있었는가? 무엇이 그들 속에 있는 가장 간교한 마귀의 올무인가? 바로 지식은 있으되 순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순종을 미루고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지식으로 순종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과 실제 삶에 큰 간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간격은 외식(위선)으로 메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2-4)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 율법 선생들의 문제는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 보다는 그 아는 것마저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지식은 자기 자랑과 자기 의의 재료였을 뿐이다. 그러나 지식은 순종과 실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거부하실 뿐 아니라 (지난 마7:5,6 말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제자들에게 접촉조차 하지 말도록 경계시킨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본래 무슨 악한 자나 불성실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지한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려면 계속 결단과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걷는다는 것은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곧 십자가(자기 부인)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반드시 자기 부인(否認)이 필요하며 그것은 항상 지속되지 않으면 안될 성질의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간다는 것은 곧 육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육신 쪽으로 굽어가는 몸의 성향을 감지하고 항상 그것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영의 요구에 진리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지속되지 못하면 결국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꼴이 되고 만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처음 선택을 진리 쪽으로 분명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첫 선택 문제이며 처음의 의지와 결단 문제다. 그리고 좁은 길로 간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먼저 거기서 어떤 (방향으로) 처신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의 처음은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그 첫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삶 속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가 결정되고 그 문으로 들어서면 길은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늘 곁길로 갈 것인가 계속 길을 걸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택은 날마다 우리 앞에 놓인다.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 생명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 믿음이 참 믿음인지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은 좁으며 우리의 길은 좁다. 좁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 곧 우리 생명이 지닌 엄격성과 완전성과 거룩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우리의 삶이 (성격상 완전하고 영원 불변한 그 생명으로 인해) 조금도 생명에 위배되는 예외나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진리대로만 갈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진리를 벗어나 곁길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삶은 사람들이 보기에 납득이 안될 만큼 분명하게 좁은 길의 삶이었다. 그것은 그가 오직 진리(아버지의 생명)에 충실하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예속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의 삶은 융통성이 있고 폭이 넓다. 그러나 진리대로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딱 한 길로 정해져 있다. 그 인생은 참으로 좁고 고독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실하고 견고한 인생이다.

주님의 길이 좁다는 것은 육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길이 철저히 자기 부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들의 길은 순종의 길이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 외에 다른 삶이 있을 수 없다. 순종은 결국 나를 부인하고 내 뜻을 꺾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입장에서는 생사를 건 전쟁을 걸어오고 싸움을 청해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에서 이러한 갈등과 고민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좋은 설교를 듣거나 강연을 들을 때 그것을 좋다 하고 칭찬하며 감동한다. 그것은 그들의 이성과 양심,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달게 받아들여서 찬성하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육체가 실제로 어떤 수고나 손해나 희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말씀에 대해서는 찬성하며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라고 하면 육신은 강하게 반발한다. 그것은 그 말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육신이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걷는 문제는 곧 실행의 문제이며 실천의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실체를 판별한다. 순종과 실행이 없는 믿음, 열매가 없는 믿음은 가짜이다. 우리는 지식을 믿음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지식으로 순종을 대체하거나 위선으로 그것을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 시대는 참으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말씀에 순종하기 힘든 시대이다. 육신에게 너무 많은 기회와 자유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육신을 편하고 안락하게 만드는 온갖 도구들과 체계들이 구비되어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의 거의 유일한 기준은 육신의 쾌락(즐거움)과 안락(편안함)이다. 혹 몸이 좀 피곤하거나 괴롭더라도 육신이 총체적으로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을 한다. 육체의 안일을 거스르며 위험한 고산 등반이나 고공 낙하, 철인경기 등을 하는 사람도 다 알고 보면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즐거움을 거스르며 진리를 좇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들도 이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시대의 아들이 되기 쉽다.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핑계를 붙여 진리를 거부하고 그 실행을 미루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신학적 이론까지 동원하여 오직 지식만 붙들고 순종과 결단과 실행은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육신의 기준을 따라 상대적이다. 육신의 욕망, 육신의 정욕적 자유,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유일한 가치 기준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생명의 절대적인 룰도 그대로 무시해 버리기까지 한다. 남자가 다른 남자를 보고 애정을 느끼거나, 남자가 여자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때 과거에는 그것이 참아야 할 그릇된 충동으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그대로 실행할 뿐 아니라 그것이 옳은 것(진리)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강변한다. 6월 24일 신문에 보니까 프랑스에서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법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한 장로교회는 목사가 다른 남자와 동성 결혼한 것이 불법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이런 발표를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신이 원하는 것이 진리이고 다른 어떤 것도 이것을 방해하거나 제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항상 추구하는 일이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진리대로 걸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좁은 길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영생의 길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는 타협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어떠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가는 아들의 길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가는 세상 종교인의 길보다 좁다. 모세의 율법은 표면적 형식적 법으로서 단지 사람의 행위만을 규정하지만 주님의 법 곧 생명의 성령의 법은 사람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동기까지 주장하는 법이다. 참으로 이것은 생명의 법이며 인격의 법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시간(無時間), 전 공간(全空間), 전 행위를 규정하는 완전한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느냐를 따라 행해야 한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 안된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눈에 도덕적이고 그럴듯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상식적인 삶이지만 그래도 넓은 길이다. 왜냐하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하고 인정해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의 욕망대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율법과 도덕과 상식의 길을  걷는 사람들조차도 때로 납득할 수 없는 길을 종종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는 사람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그것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 보고 그 일에 순종하였다. 이것이 바로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때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을 다 간 후에는 모든 사람이 납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 길로 이끄신 분은 틀림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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