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세상에는 두 문과 길이 있다. 넓은 문과 넓은 길, 그리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이다. 사실 문과 길이라고 하지만 이 둘은 하나다. 문으로 들어가서 길로 가기 때문이다. 문은 시작(선택)이고 길은 지속되는 인생 과정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하신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좁은 문은 주님이 택하신 삶의 방식(방향)이고 좁은 길은 주님이 걸어가신 인생 길이다. 주님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산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고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아들로 드리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목적에 드려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인생,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인생이다. 이 길만이 참으로 사는 길이요 영원히 사는 길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현재도 미래에도 세상을 주관하시며 자기 것으로 취하실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를 믿으며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그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아들의 길은 범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길 곧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사람들이 (좁고 협착한 길로 여기고) 잘 가지 않는 이유는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므로 육신(자아)이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육신(자아)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자기 부인)의 삶이다. 그러므로 영은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지만 육은 고통과 불편을 느낀다. 아들의 인생은 내(육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 길을 걸어갈 때 영에는 기쁨이 있지만 육신에는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것이다.

이 길을 좁다고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고 매우 적기 때문에 가는 사람이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므로 모든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지만 사람들은 이 길을 가지 않는다. 왜 안 가는가? 세상 사람들이 다 진리와 생명의 길(사는 길)을 원하지 않고 불의와 죽음의 길, 틀린 길, 망할 길을 원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아무도 잘못되고 틀린 길을 (알고도) 원하지 않으며 아무도 망하고 죽을 길을 (알고도) 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이 생명의 길을 놔두고 다른(넓은) 길로 가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명과 진리에 대해 죽어 있어서 어디가 진리의 길이고 어디가 멸망의 길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영의) 눈이 어두운 것이다. 게다가 육신이 원치 않는 길이므로 어느 정도 본다 하더라도 이 길로 가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만일 그 눈에 그리스도의 길이 참으로 살 길(영원한 생명의 길)로 보이기만 한다면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도 결국은 이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인다 하더라도 너무 희미해서 도저히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 길로 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계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영이) 거듭남으로써 눈이 벗겨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3-7)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고 선과 진리를 원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사람의 길은 영원히 주님의 길과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1-24)

주님의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저주이고 멸망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이 가는 길로 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눈(영)이 주님의 눈(영)과 달랐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과 유대인의 생명이 달랐으므로 주님이 보는 것과 유대인들이 보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보는 것이 다르니 가는 길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찾았으며 그리스도(구원자, 메시아)를 찾았다. 안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가 왔을 때는 그들이 그를 따르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눈이 하나님께 대해 죽어 있어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 길로 나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로부터 난 생명이 아니면 아무도 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길을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의 길이 생명의 길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저주이다. 영의 눈은 어둡고 오직 육신의 감각만 살아 있는 이들에게 생명의 길은 단지 좁은 길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빛)이다. 이 계시가 있어야 눈이 열리고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다. 인생은 그 눈에 무엇이 보이며 무엇이 보물로 보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하늘(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영광)은 보이지 않고 땅만 보이는 사람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고 그것이 보이는 사람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와 그 영광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뿐이다. 이 계시가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추구한다. 사람은 다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위해 살며 거기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왜 세상에는 악을 행하는 사람은 많은데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렇게 적을까? 그리고 왜 세상에는 혹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름을 숨기고 조용히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을까? 왜 사람들은 선과 의를 행할 때 갚을 것이 없고 돌아올 것이 없는 진짜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행하지 않고 표가 날 만한 곳에 그것을 행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그렇게(선을 행하고, 그것도 은밀히...)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은 왜 선을 행해야 하는지 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악은 왜 행하는가? 악을 행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육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이다. 물론 악을 행하는 것이 그렇게 될 수 있는 항구적인 길은 아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그런 길이 될 수 있다. 급할 때 말이다. 누구나 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남을 잡아먹어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이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악인 것이다. 심판자가 없고 내세가 없다면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땅 뿐이고 이생뿐이라면 죽으면 그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악을 행하지 말고 선만 행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다 약한 자의 윤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을 행해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단지 자기 양심의 요구(욕구) 때문에 하든지 아니면 명예욕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심어놓은 본성으로 인해 선을 행하는 것 아니라면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대개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서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으로써 지니게 된 이 선한 본성이라는 것은 타락으로 인해 매우 희미해지고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없으면 사람은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기 매우 어렵다.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왜 세상에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 적고 또 그 중에서도 은밀히 행하는 자, 정말 돌아보아야 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이 적은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늘의 칭찬과 보상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사람 말고 누군가가 자기의 행동을 보는 이가 따로 있고 자기의 행동을 보상하는 이가 따로 있어야 손해보는 일을 할 수 있고 사람의 인정(칭찬)과 상관없이 선을 행할 수 있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 선을 행하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선을 베푼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보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마태복음 25:34-45을 보면 주님을 섬겼다고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25:34-45)

이 말씀은 마7:21-23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말씀에 해당한다. 여기서 주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섬긴 사람들이 아니고 섬긴 사람들이다. 그러나 잘못 섬긴 사람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은 섬겼는데 불쌍한 이웃은 섬기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반대로 주님의 칭찬과 영접을 받는 사람들은 주님은 안 섬겼는데 불쌍한 이웃은 섬긴 사람들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종교적 일(기도, 찬송, 성경 읽기, 예배, 제사, 전도 ....)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에 의하면 이 일만 하고 지극히 작은 자 곧 아무도 돌보지 않는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는 섬기지 않은 사람들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 곧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보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다 알아주는 일, 금방 표나는 일, 사람의 칭찬과 영광과 인정이 따르는 일만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진짜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생명의 길(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오직 그 눈에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불쌍한 형제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보이는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갇힌 자와 주린 자의 눈(눈물)에서 주님을 보는 자만이 그들을 섬길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들 곧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진실로 주님을 섬긴 것으로 인정받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작은 자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눈에 그 불쌍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보이고 그리스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배후에 계시며 그들의 눈물 속에 비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들을 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시며 거룩한 제사와 예배 속에서만 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대로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 계신다고 믿고 그 말씀(뜻)대로 사람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의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 보는 대로 일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떠날 때도 끝까지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육신의 양식보다 영생의 양식을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양식은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다'고 하며 주님을 떠나버렸다. 이때 주님은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라고 대답하며 떠날 수 없음을 밝혔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은 왜 주님을 떠날 수 없었는가? 그것은 적어도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사실이 확실히 보였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이 없고 자기 계획이나 욕심이 없어서 못 떠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주님을 떠날 수는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직 그들의 눈에 예수는 결코 떠날(버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우스운 일은 나중에 주님을 판 가룟 유다도 그때 주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때 이미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결국 주님을 떠날 것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유다는 주님을 떠날 수 없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유다의 눈에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을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주님을 끝까지 따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때 유다의 눈에는 주님이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메시아)이라는 사실이 보였기 때문에 그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유다가 주님을 판 것은 사탄의 시험으로 그 마음 속에 주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메시아라는 확신이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님이 끝까지 자기 뜻대로 (이스라엘을 물리적 환경적으로 구원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자 그를 자극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유다의 눈에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보였고 그로 인해 그가 주님을 오랫동안 따랐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유다의 문제점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 그 말씀보다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기 생각과 계획이 속에서 더 크게 역사했다는 그 한 가지이다.

오직 주님이 택하신 사람만 주님을 알아볼 수 있고 의와 진리와 생명의 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이는 사람만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답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요6:68-70)


좁은 문과 좁은 길, 주님은 우리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좁고 외롭다는 것이다. 가다가 서서히 좁아지는 것도 아니고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좁아지는 것도 아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좁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해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헛된 기대를 해서도 안되고 이 길에 들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말해주어서도 안된다.

좁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육신의 영역이 좁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세상 지혜와 육적 동기가 설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의 길은 육신의 자랑 곧 육신과 세상이 좋아하는 것,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이 적으며 가려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에 대해 전파할 때 이 점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두 극단 중 한 군데로 치우쳐 있다. 한 쪽은 율법주의와 금욕주의 쪽이고, 한 쪽은 세속주의와 문화주의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큰 절제와 고행과 덕행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전파된)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오려고 할 때 미리 겁을 먹고 회개나 선행이나 자기 수신(修身)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주님께로 나아 오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이전의 세상 생활과 아무 차이도 없는, 단지 분위기와 모양만 바뀐, 새롭고 재미있는 생활의 변화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생각과 생활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을 향해 던진 복음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복음은 육신에게 질 수 없는 (무거운 율법적) 짐을 지우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며 여전히 육신을 즐겁게 해주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죽은 생명인 자기(육신의 생각)를 버리고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얻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길이 좁다는 것은 육신이 금욕적 훈련과 연습을 통해 그 욕망을 절제하고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육신의 생명 자체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자아를 누르거나 다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아로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여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자아)에게 있어서 금욕이나 절제가 아니고 십자가(죽음, 폐기)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옛 사람(세상)을 버려야 한다. 세상 생각, 세상 자랑, 세상 영광을 다 버려야 한다. 주님의 문과 길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생명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 뿐 다른 것들은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확실히 좁다. 아들의 생명 외에 모든 것은 다 버려야 따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9장에서 주님이 한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신 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그를 걸려 넘어지게 만들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모든 짐을 벗어놓고 가야 한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모든 육신의 소유와 자랑들을 다 벗어놓고 오직 몸만 가지고 가야 한다. 여기에는 심지어 친구와 가족도 포함된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길이 좁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게 되어 있다. 우리는 산 속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군중과 대중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고 한다. 그것은 같이 있어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런 중에서도 더욱 고독한 길을 택하여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기 어렵고 이해해 주기 어려운 길을 가는 자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교회가 있고 형제들이 있다. 같은 소망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가는 형제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 길을 같이 갈 뿐 아니라 영원히 함께 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의 존재는 너무나 귀하다. 그러나 형제(교회) 역시 나를 곁에서 돕고 격려할 수 있을 뿐 내 대신 내 인생을 살아주거나 내 길을 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남의 길을 대신 가 줄 수 없다. 결국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주님과 내가, 하나님과 내가 길을 같이 갈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말하면 우리 길은 때로 심히 외롭고 고독할 수 있는 좁은 길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사정을 사람에게는 다 말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형제도 내 사정을 다 알아줄 수 없다. 그때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사정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누가 나 좀 알아주고 나 좀 위로해주지 않는가 하며 주위를 살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오직 나만 바라보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 신자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필요하다. 진리의 길은 고독하다. 그래서 좁다.  

남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것이 좀 더 쉬어 보이기도 한다. 세상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대중 속에 있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튀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주 개성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다 찢어진 옷을 입고 다니며 머리를 노랗게 빨갛게 물들이고 다닌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남과 다르게 살 수 있을 만큼 자신감과 소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분위기가 이런 '튀는 것'을 허용하는 시대요 그것이 유행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이것은 진정한 개성이 아니라 부화뇌동이고 무개성적 집단 행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7,80년대에는 술집여자 외에 대학생들이 이렇게 진하고 요란스럽게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술집여자가 아니면서도 자기 소신에 따라 그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개성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인간은 참으로 기성화(旣成化)되어 있는 존재이다. 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듣는 것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여서 오늘의 내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다르게 비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두려워한다. 그렇게 되면 몹시 불안하고 편치 않다. 세상 상식과 전통, 습관, 유행에 너무나 깊이 동화(同化)되고 동조(同調)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존재가 되고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삶이라든지 세상과 전혀 상관하지 않는 삶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은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세상보다는 주님을 더 의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길이 좁다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렇고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지 우리 생명 안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무인도에 둘만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도 외롭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의 입장이 그렇다.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 형성(주님과의 연합)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의 이별을 동반한다. 어릴 때는 부모의 말만 듣든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면서 차츰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며 부모로부터 멀어져 간다. 왜? 그에게 다른 연합이 형성되어가기 때문이다. 즉 친구가 생기고 애인이 생기고 아내와 남편 자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세상과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억지로 외롭고 고독한 길로 가려고 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손길에 이끌려 가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우리 길이 좁다는 것은 육신이 살아서 속에서 왕성하게 역사할 때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영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신자의 어려움은 세상 자체를 떠나지 않고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길과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다. 수도원(절)으로 들어가는 중세의 승려들처럼 세속과 대중을 떠나 혼자서 자기 길을 가면 차라리 쉬운데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과 접촉하면서 홀로 그들의 길을 떠나 딴 길로 간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생명 안에서의) 연합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는 원칙을 따라 행하는데 나만 '악한 자를 도무지 대적하지 말라'는 원칙과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라'는 원칙으로 대응하니 힘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give and take' 라는 원칙을 따라 사는데 나만 혼자 손해보는 일을 하자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시험이다.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확고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틀이며 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것은 우리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원칙은 처음부터 'give and take' 즉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대한다'가 아니라 오직 '아들의 생명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헷갈리면 안된다. 따라서 언제까지 손해를 보고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로 가느냐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느 때까지 참으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는 것이다. 만일 영원히 할 일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나그네의 여정에 비유한 소설인 버니언(John Bunyan)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길은 참으로 험하고 어려운 길이라는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이 험하고 어렵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 자체가 세상살이보다 어렵고 힘들어서 어렵고 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오는 갖은 시험과 유혹 때문에 마음을 정하여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 힘들어서 어렵고 험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세상 길(세상살이)도 힘들다. 인간의 삶은 타락 후 세상(육신)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어차피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움은 삶 자체(삶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며 시험을 이기고 마음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주의해야 한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여 마음을 지켜야 한다. 결국 문제는 바깥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이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육신(자아, 옛 사람)을 처리하고 모든 내부, 외부의 시험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 눈을 크게 뜨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이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대장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가기만 하면 우리의 길은 쉽고도 평탄하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시험을 뿌리치기만 하면 우리의 길은 순조롭다. 요는 믿음이다. 내 생각(염려, 계획)을 버리고 앞에 가는 주님을 믿으며 끝까지 따르는 이것이 어려움이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길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4-17) / 2004. 10. 3 이상봉 2010.04.30 3711
78 신랑이신 주님 (마9:14,15) / 2004. 9. 26 이상봉 2010.04.30 3689
77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함 (마9:9-13) / 2004. 9. 19 이상봉 2010.04.30 4409
76 구원의 권세를 행사함 (마9:1-8) / 2004. 9. 12 이상봉 2010.04.30 3675
75 믿음의 본질 (4) (마9:1-8) / 2004. 9. 5 이상봉 2010.04.30 3670
74 귀신 들림 (마8:28-34) / 2004. 8. 29 이상봉 2010.04.30 3730
73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 (마8:19-22) / 2004. 8. 22 이상봉 2010.04.30 3572
72 믿음의 본질 (3) (마8:14-17) / 2004. 8. 15 이상봉 2010.04.30 4154
71 믿음의 본질 (2) (마8:5-13) / 2004. 8. 8 이상봉 2010.04.30 3767
70 믿음의 본질 (1) (마8:1-4) / 2004. 8. 1 이상봉 2010.04.30 3939
69 반석 위에 지은 집 (마7:24-27) / 2004. 7. 25 이상봉 2010.04.30 5036
68 불법 (마7:21-23) / 2004. 7. 18 이상봉 2010.04.30 3961
67 나무와 열매 - 생명과 행위 (마7:15-23) / 2004. 7. 11 이상봉 2010.04.30 3791
66 거짓 선지자 (마7:15-23) / 2004. 7. 4 이상봉 2010.04.30 3667
» 좁은 문과 길 (2) (마7:13,14) / 2004. 6. 27 이상봉 2010.04.30 3594
64 좁은 문과 길 (1) (마7:13,14) / 2004. 6. 20 이상봉 2010.04.30 3584
63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2) (마7:6-12) / 2004. 6. 13 이상봉 2010.04.30 3537
62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1) (마7:1-12) / 2004. 6. 5 이상봉 2010.04.30 3611
61 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이상봉 2010.04.30 3726
60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 (마6:19-33) / 2004. 5. 23 이상봉 2010.04.30 3822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