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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 (마7:15-23) / 2004. 7. 4

2010.04.30 14:22

이상봉 조회 수:3667

오늘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님은 마5:1-7:12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생명(인격)과 삶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7:13,14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이 생명대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안에 있는 쉽고 안전한 길이지만 한편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걸어가는 힘든 일생이다.

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길이 좁은 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것은 첫째, 우리 삶이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요 영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영의 요구를 위해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한다. 육신을 거슬러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육신에게는 힘들고 괴로운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좁다는 것이다.  

둘째, 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고독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간다. 때로는 나 홀로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외롭고 고독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내가 과연 지금 바로 가고 있는가? 나만 홀로 이상한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와 두려움에 빠진다. 그래서 좁고 협착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좁은 문과 길에 대해 말씀한 후 왜 주님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우리를 생명의 좁은 길이 아닌 멸망의 넓은 길로 호도(糊塗)하는 세력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에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며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길을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의 새로운 실상(존재, 생명)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아들의 길로 가기를 스스로 힘써야 할 뿐 아니라 이것을 방해하는 세력 곧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거짓 신자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러운 개나 돼지든지, 양의 옷을 입고 오는 이리든지 다 어차피 양이 아니며 양과 공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와 돼지를 경계하며 거부하듯이 양의 옷을 입고 오는 거짓 선지자도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말씀이 일차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대상은 말씀을 전하는 나 자신이다.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내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어떤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 말씀을 적용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몫일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깥에 있는 거짓 무리들에 대해 여러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뿐이다. 부모와 함께 집에 있는 어린이는 그를 해치는 세력에 대해 그다지 주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집 밖에는 그를 유괴하거나 불량식품을 팔거나 때리고 돈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날마다 그런 자들에게 걸리지는 않더라도, 또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더라도 그 위험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 안에 현재 전쟁이 없고 지금 당장 내가 죽거나 다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김선일씨 사건을 접하면서는 미국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 남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영적 세계의 현황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사탄의 밥이 되어 타락하고 실족케 되지 않았다 해서 우는 사자처럼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어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최후 승리는 오직 날마다의 싸움에서 날마다 살아남고 끝까지 이기는 자의 것이다. 한 번 이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순간까지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길을 끝까지 가야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7:13-27의 권면은 양면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길이 아들의 생명 안에 있는 이 좁은 길이므로 좋든지 싫든지 반드시 이 길로 걸어가야(걸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갖은 가르침과 유혹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방해하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씀드린다. 우리 앞에는 넓은 길(문)과 좁은 길(문) 두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 하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좁은 산길을 달리는 자동차에게는 도로와 낭떠러지라는 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좁든지 말든지) 그 산길 하나밖에 없는 것과 같다. 넓은 길은 길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은 우리 길이 아니다. 우리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 한 길밖에 없으며 아들의 생명대로 사는 이 하나밖에 없다.

우리가 계속 생각해 온 바와 같이 이 길로 간다는 것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내 것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일을 힘씀과 동시에 반드시 우리를 속이고 우리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모든 공격을 물리쳐야 한다. 좁은 길을 끝까지 가려면 좁은 길로 가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거짓 무리들을 철저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짓 선지자를 물리치려면 우리는 먼저 좁은 길과 넓은 길, 진리에 속한 자와 거짓에 속한 자의 기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좁은 길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넓은 길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 선생(형제)이 참 선생인지 거짓 선생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 기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1.진리성(眞理性) -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깨닫고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세상 생각과 길을 추구하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말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가 아니면 자기 생각을 거기에 섞어서 다른 교훈을 전하는가의 여부이다.

2.실천성(實踐性) - 이것은 들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실행하는가 아니면 말과 지식으로만 넘겨버리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전하는 말씀을 진실로 그대로 믿으며 그대로 실행하는가 여부이다.

3.마음과 태도(態度)와 동기(動機) - 어떤 사람이 육신을 위하는 자인가 아니면 영을 위하는 자인가, 사람을 위하는 자인가 하나님을 위하는 자인가, 이익을 위해서 말하는가 생명의 부담을 따라서 말하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자를 거짓 선지자로 판단할 수 있다.  

첫째,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말씀 진리에서 벗어난 인간적 가르침을 베푼다. 즉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고 거짓말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정신을 따라 말하는 자들(세속주의자), 사람의 계명과 윤리로 가르치는 자들(율법주의자), 인간의 종교성을 따라 말하는 자들(로마천주교나 각종 이단), 이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밖에도 지금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본적이고 미신적인 가르침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이 선포되고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매우 교묘하게 말하기 때문에 그 실체를 분별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들의 말이 사이비(似而非)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여기에는 다른 종교나 누가 보아도 명백한 이단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예 자기 옷을 입고 나오지 양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교훈은 그럴듯하지만 그들의 교훈과 그들의 실제(인격)가 일치되지 않으며 그들의 교훈과 그들이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그들 자신이 가르쳐 놓은 교훈을 (행동과 방관과 묵인으로) 스스로 허문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놀랍게도 진리에 거의 가까운 가르침을 베푼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거의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왠지 힘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실제 생각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가르치는 말씀(내용)과 인격(자기 마음, 생각)이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말씀과 삶(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외형에 문제가 있다. 가르치는 것은 서로 용서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쳐놓고는 실제로는 사소한 문제로 다투며 싸운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외형에 별로 문제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경건하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식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보기에 표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겉과 속이 똑같이 선하다면 그는 진짜 선지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반드시 삶의 실제(실상)와 삶의 원리(방식) 사이에 괴리가 있으며 말과 행동에 차이가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실제)은 없는 위선적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의 위험성은 단지 자신이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위선적 신앙과 잘못된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린다는 것이다. 돈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을 사랑하고 중히 여긴 주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마23장, 롬2장)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이중적이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 진정한 복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의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복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상황에서는 언제나 힘과 이익과 승리(남을 이김)에 집착하는 자들 곧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언제나 결국은 힘있고 돈 있고 승리하는(성취한) 자에게만 찬사를 보내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이다.

이런 사람들을 분별하는 일은 쉬운 일인가 어려운 일인가? 사실상 쉽지 않다. 물론 아주 표나게 행동하는 사람은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의 거짓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 진리 면에서 문제가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하고 경계하는 일도 쉽지 않고 실행 면에서 문제가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하고 경계하는 일도 역시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근본적 신앙을 흔드는 설교를 하거나 성경에 없는 내용을 중요한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면 금방 그런 사람을 이단이나 거짓 선생으로 규정하고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오기 때문에 그 말과 인격, 삶의 실체를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가 신학자나 목사, 장로, 선한 사업을 많이 하는 훌륭한 사회사업가 등의 모습을 한 사람이 교묘한 경계선 상에서 진리에서 벗어난 말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의 실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사탄의 공작은 언제나 그렇다. 이리는 결코 자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양의 가죽을 입고 조용히 다가온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가만히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분별하고 경계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깊이 받아야 한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생명의 느낌과 흐름에 매우 깊이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다각도로 깊이 체험하여 말씀에 정통해야만 한다.  

삶에 문제가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많은 신자들이 너무 진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사람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말씀을 적당히 완화시켜서 부담이 없도록 해 주는 인도자들을 좋아하기까지 한다. 사람의 입맛에 맞는 말씀을 전하며 마음에 부담이 없는 좋은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은 분명히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로부터 쉽게 판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좋은 목자로) 사랑과 환경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편하기만 하다면 그런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다 같이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은 결국 전하는 자가 육신의 구미에 부합하는 좋은 말만 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육신에게 있어서 듣기 편하고 부드럽기만 한 가르침은 진리와 거리가 먼 거짓 가르침이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육신)를 보존코자 하는 자들에게는 끝까지 걸림돌로 작용했고 그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아들의 길로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지며 생명이 되고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다 같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이다. 말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듣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여 말씀에다 자기 육신을 맞추는(죽이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쳐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진정한 전도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전도자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와 악함과 무지와 무가치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관심은 오직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사람의 자격과 노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그러므로 참 전도자는 반드시 사람의 구원을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그 다음에 인간의 상한 심령과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참 전도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인간의 죄와 실패와 어리석음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겸손과 믿음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죄와 실패와 무능과 절망에 대해 말할 때 육신(자아)은 그것을 듣기 싫어하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선생들이 이런 말을 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여기에서 나온다.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사실은 말하려고 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인간의 죄, 정욕의 종이 되어 허덕이는 인간의 실상, 최후 심판과 영원한 파멸, 지옥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과 진리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야고보의 다음 말씀들은 초대교회가 벌써 이런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2-25)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1-13)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9,26)

여기서 우리는 거짓 신앙과 거짓 선지자의 실체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마귀도 가지고 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종하고 따르지 않을 뿐이다. 실행 없는 지식 곧 행함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만 해주고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자들, 그리고 그런 신앙이 마치 참된 신앙인 것처럼 묵인하고 인정해주는 자들, 바로 이것이 거짓 선지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또 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도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 있으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가르친다. 이것도 거짓 선지자이다. 나무(생명)와 열매, 믿음과 인격, 믿음과 삶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한쪽만 말하고 다른 쪽에 대해서는 '상관없다. 잊어버려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거짓 선지자이다. 오늘날 많은 인도자들이 율법주의 아니면 지식주의 둘 중의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우리는 이것들 다 경계해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은 늘 이런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시달려 왔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8:11)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5:30,31)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다.

진리성도 중요하지만 실천성도 중요하다. 사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참으로 진리가 있는 자는 그것을 반드시 실행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자들은 사실 그 말씀 자체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짓 선생들의 메시지에는 명확한 복음 진리,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없다. 그들의 말은 대개 모호하고 상대적이며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많은 말을 하지만 결국은 듣는 자들에게 아무 갈등과 고민과 회개와 변화에의 촉구가 없이 위로(慰勞)와 안심(安心)을 주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어떤 말씀을 전한 후에도 결국은 "괜찮다, 그것은 당신에게, 지금의 당신의 형편에다 대고 하신 말씀이 아니니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러니 듣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의 좁은 길로 돌이킬 수 있겠으며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겠는가?

거짓된 마음에 미혹된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도 그 마음이 진리에 대해 닫혀 있어서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떤 책망과 회개의 촉구를 들어도 그것을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로 듣는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언제나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말씀은 다른 교회에 다니는 어떤 사람들이 들으면 좋겠다. 이 말씀은 우리 집에 있는 그 누가, 우리 교회의 그 어떤 형제가 들으면 좋겠다. 어찌 그리 딱 맞는가?"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것을 감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종종 죄에 대해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죄는 말하는 사람 자신과 대부분의 청중들이 별로 짓지 않는 죄이며 그들에게 거의 해당되지 않는 몇몇 특별한 죄들뿐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는 별로 문제가 없으며 다만 주님의 칭찬과 위로와 축복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교묘하게 기만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세상에 대해 이와 같은 명확한 태도를 갖지 않아도 되도록 가르친다. 그들은 신자가 단지 약간의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경건의 모양만 갖추면 더 이상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도록 길을 넓게 열어놓는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안이한 구원과 안락한 삶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매우 불순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로 알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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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좁은 문과 길 (1) (마7:13,14) / 2004. 6. 20 이상봉 2010.04.30 3584
63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2) (마7:6-12) / 2004. 6. 13 이상봉 2010.04.30 3537
62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1) (마7:1-12) / 2004. 6. 5 이상봉 2010.04.30 3611
61 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이상봉 2010.04.30 3726
60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 (마6:19-33) / 2004. 5. 23 이상봉 2010.04.30 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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