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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우리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교묘히 왜곡시켜 결국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말(결국 인간의 영광, 육신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 거짓 선지자는 말과 인격이 다르고 말과 삶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의 (좁은) 길에서 벗어나 멸망의 넓은 길로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결국 우리를 진리에서 벗어나 마귀의 거짓말에 빠지게 만들고 참 신앙에서 벗어나 그릇되고 죽은 신앙에 빠지게 만든다.  

마귀는 그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극렬하게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도구 중 하나는 교회 안에 심어놓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누룩이며 가라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분별하며 경계해야 한다.

산상보훈의 내용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실상 마태복음 7장 12절까지이다. 주님이 그 다음 말씀들 곧 좁은 길과 넓은 길, 거짓 선지자, 나무와 열매, 믿음과 순종(실천)에 대해 덧붙이신 것은 전적으로 마귀 때문이다. 마귀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천국을 세우시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방해한다.

우리는 마귀의 수법을 잘 알아야 한다. 그는 신자들을 공격할 때 육신의 정욕과 세상 영광을 미끼로 직접 유혹하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가라지(거짓 신자)를 뿌려놓음으로써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천국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고하셨다. 주님이 밭(교회)에 좋은 씨를 뿌려놓으면 마귀는 거기에다 나쁜 씨(가라지)를 뿌려놓는다. 이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신약 교회 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담 이후 언제나 그랬다. 마귀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약속을 끝까지 붙든 진실한 신자의 숫자보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가짜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았다.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마귀는 그것을 훼방하고 허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요한이 쓴 성경 즉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은 다 초대 교회(1세기)의 마지막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때 이미 교회 안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들어와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요한은 그들의 실상을 폭로하며 교회가 그들을 경계하도록 그의 여러 글에서 강조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 너희는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7-9)

특히 요한이 계시록 2,3장에서 기록한 일곱교회에 대한 예언은 전적으로 거짓 선지자들로 말미암는 교회의 위기에 대해 말한 것이다.

물론 요한 이전에 바울(갈라디아서, 골로새서 2장)이나 베드로(베드로후서 2장), 야고보(야고보서) 같은 사도들도 이 문제에 대해 경계한 바 있다.  

거짓 선지자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믿음이 참되고 온전한 것인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귀에게 속으면 거짓 신자가 되고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속으로 "나는 마귀를 좋아한다. 나는 마귀를 위해서 그의 거짓말이 퍼뜨려야 하겠다" 하고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악령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주술사나 무당의 경우에는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지 않다. 경건한 신자들(선지자들과 주 예수님, 초대교회)을 죽이고 핍박한 유대교 지도자들(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귀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을 한 것이다.(요16:1-3)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누가 거짓 선지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 신앙이고 무엇이 거짓 신앙이냐 하는 것이다. 너냐 내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의 십자가行을 가로막다가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은 것은 교회의 기둥이 순식간에 사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마귀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어떤 특별한 사람, 우리와는 상관없는 어떤 멀리 있는 사람이 거짓 선지자라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거짓 선지자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우리 안에 있다. 거짓 선지자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신앙, 거짓된 삶이 먼저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성령) 안에 견고히 서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거하지 않으면 진리에 견고히 설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 정신과 삶이 자기도 모르게 거짓되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우리의 믿음과 삶이 진실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런 길로 가도록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실제(삶)를 돌아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좋은 마음만 쳐다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분적으로 좋은 마음(동기)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진실하지(온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의 그 부분적인 좋은 마음만 생각하고 자기의 신앙과 마음, 자기의 삶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왜 하나님을 싫어해? 내가 왜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을 사랑해?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내가 얼마나 마귀를 싫어하고 거짓된 삶을 싫어하는데! 나는 불의를 보면 못 참아. 나는 악한 자들이 날뛰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야." 모두가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우리는 냉정하고 냉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삶과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고후13:5-7)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자기 생각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선을 행하는 열매(실제)가 있는지를 따져서 판단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만일 조금이라도 악을 행한다면 바울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든지 없든지 '악한 자'이며 '악한 생명'을 가진 것이다. 못된 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못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못된 나무인 것이다. 우리는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악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악한 생명을 가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진단한다면 그 자리에서 우리가 다음 할 일을 바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와 열매를 별도로 생각하는 식으로 적당히 판단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인격과 능력)을 내 것으로,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이 생명은 악을 행하는 생명이 아니다.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오직 사람을 사랑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속에 있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형제를 미워할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자기 생각 속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있고 선을 아는 지식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고 아들의 열매를 나타낼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 수 있다. 형제를 사랑하는 선한 생명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이런 식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행위라고 해서 다 행위가 아니며 열매라고 해서 다 합당한 열매는 아니다. 선한 일에도 경중(輕重)이 있고 우선 순위가 있다. 아들의 생명은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열매)도 있는 것이지만 그 행위에 있어서도 특징이 있다는 말이다. 계시록에서 초대 교회의 첫(대표적) 교회로 등장한 에베소 교회에는 많은 행위(열매)가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 중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결정적인 행위'(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 교회의 촛대(교회의 영광, 참 교회의 지위)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경고를 하셨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엡2:1-5)

이 교회는 심지어 이단들을 물리치는 일도 잘했다. 그러나 결국은 마귀에게 속았다. 처음 사랑 곧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놓쳤다는 것은 다 잘하고 결국 마지막에 실패한 것이다. 사탄은 얼마나 교활한가!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비슷한 책망을 받았다.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에도 많은 행위가 있었지만 주님으로부터 그 어느 것도 온전치 않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들은 스스로는 부유하고 완전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자만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가난하고 벌거벗은 가련한 자라고 평가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5-17)

무엇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의 불완전함'이고 거짓됨인가? 바로 주님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고 영접함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을 깊이 받아들여서 제것으로 누리는 실제(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19,20)
이것은 무슨 말인가? 주님이 교회 문밖에 계시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 문밖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고 중심이다. 그러나 사탄에게 한참 속은 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다 하나 진실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주님은 이러한 교회에 열심을 내고 회개를 하라고 촉구하신다. 어떤 열심과 어떤 회개인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열심을 내고 회개를 한다. 그러나 그 방향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 주님이 열심을 내라고 하신 것은 단지 선한 일(행위)에 대한 열심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일에 즉 바른 믿음을 향한 열심, 생명에 대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참된 열심은 주님을 사랑하며 그 생명으로 행하고자 하는 열심이다. 참된 회개란 그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참된 행위(열매)는 주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온전히 역사하도록 주님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영광과 의와 거룩과 진실함이 온전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왜 에베소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와 같은 실패가 생기는가? 바로 사탄이 교회를 항상 시험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특별한 때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다. 마귀는 우리로 생명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육신의 영광과 외식과 기타 마귀의 거짓말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며 우리로 겸손과 하나님 依支(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교만과 자기 자랑, 자기 의와 자기 신뢰의 길로 빠지도록 항상 부추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도 언제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우리 안에서도 때로 시험과 낙심과 무기력과 실패가 나타나고 있다. 서로의 관계에서도 의심하고 불만을 가지며 거리를 두며 판단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정신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마귀는 욥의 경우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육체와 물질적, 사회적 환경을 공격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육체의 건강과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을 통하여 마귀는 우리의 마음이 진리에서 멀어지고 천국에서 멀어지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역사는 형식적 논리를 능가한다. ]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참 형제와 거짓 형제로 구별하여 거짓 형제는 물리쳐야 한다는 말씀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상충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 형제를 수용하며 어느 때 책망하고 물리쳐야 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누가 형제이며 누가 원수인가? 언제 누구를 물리치고 언제 누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때 판단하고 어떤 때는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성령님이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순간 순간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것을 주목하고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무지하고 어두워서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매사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인도를 따라야 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요일2:20-28)



[사탄의 또 다른 술책]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자들을 분별하여 거절하는 일은 두 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이런 자들을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함을 말했다. 둘째는 (거짓 선지자는 아닌)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방해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많은 현대주의자들이 있어서 진리에 대해 엄격한(절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과 진리에서 벗어난 자들을 엄격하게 분별하여 경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들은 이런 일이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일은 조직을 경색시키며 분열시키거나 약화시킨다고 우려한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진리)가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조직과 세력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 마태복음 7장의 주님의 말씀이나 마태복음 23장의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주님의 책망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설교할 때도 이런 부분은 다루기 까다로운 부분으로 여기고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라는 식으로 모든 일을 사람의 육신적 취향에 맞추어 적당히 처리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도 문제점은 감추고 장점만을 찾아내어 그들에 대해 좋게 말하려는데 주력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충만해서가 아니라 의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불감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지 단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거짓되고 형식적인 연합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적당주의와 잘못된 관용주의에 헛갈려서는 안된다.



[열매로 나무(생명)를 앎]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와 열매, 생명과 현상(행위, 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열매가 좋으면 나무가 좋은 것이고 열매가 나쁘면 나무가 나쁜 것이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은 것이지 나무가 좋은데 열매는 좋지 않은 경우는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그 자체가 나쁜 (생명의) 나무인 것이다.

주님은 지금 어떤 좋고 나쁜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근본적인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일 참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반드시 (중간에 갈등과 오락가락하는 것은 있을지라도 결국은) 아들의 행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 아들의 행사(행위)가 없다면 그는 아들의 생명을 받지 않은 자인 것이다. 즉 위로부터 난 자가 아닌 것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5)는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한 것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도 안된다. 근본적인 생명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외식(위선)이다. 그 이상은 안된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요 근본적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구원이란 나무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또는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로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큰 오해 중 하나는 것은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과 행위를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믿음과 행위는 대립(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다.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행위가 있다. 구원의 방법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말하자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결과이지 사람이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냐 행위냐 라는 식으로 둘을 대비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지식(계시)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으면 (그 믿는 바에 따른) 행위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냐 행위냐 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냐 자아냐', '생명이냐 외적 행위냐' 또는 '생명이냐 죽은 지식이냐' 라고 물어야 한다.  

믿음 = 계시(영적 지식, 빛을 봄, 생각)이며, 믿음 = 생명(거듭난 인격, 마음)이며, 믿음 = 행위(순종)이다. 위로부터 오는 빛이 있을 때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근본적인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며 그러한 거듭난 생명은 필연적으로 곧 순종의 삶(성령의 열매)을 동반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 나무는 생명을 일컫고 열매는 행위(행동, 삶의 모습)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때의 행위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선행이나 바른 생활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근본적인 인격과 덕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그 인격의 외적 표현인 선한 행위와 바른 생활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개도 거룩한 모양을 할 수 있고 돼지도 깨끗한 모양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생명 자체가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은 생명이므로 결국 개는 그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는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다는 것이다.(벧후2:22) 이처럼 위로부터 온 거듭남이 없으면 본성의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본성의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씻고 닦고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결국 도로 육신의 정욕과 더러움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실상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 새롭게 될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믿음(생명)과 마음(인격), 믿음(생명)과 생각(지식), 믿음(생명)과 생활(행위)은 불가분리의 것으로 사실상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살핌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활과 행동을 살핌으로써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점검할 수 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생각하는 그대로 행동한다. 여기에 어느 정도의 또는 일시적인 간격은 있을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든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지 결국 그것을 밖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생명과 인격은 표출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조심하고 감추려고 해도 안된다. 그러므로 열매를 꾸미려고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전하게 취하기를 힘써야 한다.  



[선한 사람들]

세상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으며 좋은 사람들이 있다. 좋은 성격을 타고난 사람,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세상에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보다 인간적으로 더 훌륭하다. 물론 아담(인류)의 근본적인 성품은 다 같은 것으로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좋은 성품을 타고났다는 것은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환경 속에서 교양과 훈계로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잘 키워졌다는 뜻이지 천성 자체가 남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에게서 태어난 것이며 그 본질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한편으로는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께 대해 죽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선한 사람도 알고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일반적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근본적인 생명의 변화 없이도 선하고 착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다른 방식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생명이 온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인격과 삶이 남보다 조금 나을지라도 이들의 생명이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 모습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그들이 도덕적 신념(지식)으로 인해 그런 생활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배운 교육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그런 생활을 하고 있든지 그도 저도 아니고 체면과 외식으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들은 어느 한계(육신적 한계, 동물적 한계)에 이르면 결국 이기적이고 비진리적인 길을 택하게 될 것이며 그들 속에 있는 죄와 사망(부패함)의 속성을 드러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참 생명의 증거(열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인지 알 수 있나? 참 생명의 열매, 좋은 나무의 좋은 열매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八福)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미 주님은 천국에 속한 인격의 특성에 대해 잘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세상의 죄와 저주와 고통으로 인해 그 마음이 애통하며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며 그 성품이 온유하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사람 간에 화평을 도모하고 그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이런 모습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왜 그런가? 그 종자가 그러하고 그 생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 좋은 나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나쁜 나무임을 증거하는 열매도 현저하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이 모든 특성들은 다 육신의 한계와 관련된 것이다.

안목(眼目)의 정욕은 결국 호색과 음행과 술 취함과 방탕을 가져오고, 명예욕(땅에서 사람 가운데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욕망)은 결국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당짓는 것을 가져온다. 그리고 불신앙은 결국 우상 숭배(헛된 신과 인간을 의지함)와 술수(미래를 위해 남을 속이고 악을 행함)를 가져온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참 만족을 얻는 사람은 안목의 정욕에 탐닉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를 얻는 사람은 헛된 명예욕과 자존심으로 인해 사람과 다툴 필요가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미래를 보장받는 사람은 그의 미래를 위해 불안 속에서 헛된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천국에 적합하지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 그가 계시 중에서 분명하게 본 바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다른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믿지 않는 자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7,18)

계시록에서 요한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에 대해 말하면서 맨 먼저 두려워하는 자를 꼽았는데 그 까닭은 요한1서에서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아들)의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생명(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아버지이고 그의 모든 것이 다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합과 교통이 있을 뿐 두려움과 분리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만 산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성분(생명)을 지닌 자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4-36)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 안에는 형제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이런 것이 없으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의 길]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누구든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원함만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이 생명을 가지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생명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아들의 생명(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그 어떤 티켓으로도, 그 어떤 지식과 그 어떤 요령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다른 생명을 가진 자가 들어가는 천국이라면 그 천국은 하나님이 사시는 그 천국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분이다. 그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품과 그의 본질은 절대로 변치 않는다. 즉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운 분이며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사람의 생명 역시 그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법과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려면 반드시 그 생명(의 성분)이 하나님과 같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과 같이 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죄로 인해 죽은 인생이 그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진리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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