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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마7:21-23) / 2004. 7. 18

2010.04.30 14:24

이상봉 조회 수:396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주님은 마지막 날 주님을 안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주님은 왜 자기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시는가?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주님께 속한 자가 아니요 가짜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불법(不法)을 행한다는 것은 법을 안 지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law, rule)은 구약 율법이나 사회의 윤리 도덕과 같은 자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은 아들(주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개에게는 개의 법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법이 있다. 개의 법은 개의 생명과 관련된 것이다. 개의 생명이 네 발로 걷고 멍멍하고 짖고 꼬리를 흔드는 생명이기 때문에 개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서 법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따라 우리는 새의 법은 나는 것이고 물고기의 법은 헤엄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대로 사는 것이 법을 지키는 삶(불법을 행하지 않는 삶)이다. 만일 새가 헤엄치거나 물고기가 난다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법을 다른 말로 길(way)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옛 생명)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아들의 생명으로 살면 그는 생명의 좁은 길로 가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로(영으로) 살지 않고 자기대로(육으로) 살면 그는 멸망의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 이때 좁은 길로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자기 생명(새 생명)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 앞에 오직 하나의 외길(외나무다리)만 놓여 있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 길만을 충실하게 가야 한다. 그것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오직 아들의 생명대로 사는 그것이 진실한 삶이고 법대로 사는 삶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된 삶이요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결국 외식(위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세상 불신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불법을 행할래야 행하지도 못한다. 오직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가 또한 불법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을 아는 사람이 왜 외식을 하는가? 왜 그 생명대로 살지 않고 진실치 못한 다른 삶을 사는가? 그것은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적 생명(옛 생명, 아담의 생명)이 여전히 생명인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서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육체의 정욕)이 왕노릇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하나님의 뜻(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순종)하려고 하니 육신이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결국 선택한 길이 외식(위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을 소유했다고 하는 사람이 아들의 생명(영)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육신(옛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인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누구도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의 끝에 가봐야 모든 진상이 드러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견고한 구원'(성도의 견인-堅忍-)을 믿는다. 성령님이 이를 위해 보내졌다. 그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사도들(예를 들어 히브리서 6장)은 종종 신자의 배교에 대해 경고하셨다. 이에 대해서 나는 주님이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들에서 말씀하신 것(현재의 천국-지상 교회-에는 가짜도 섞여 있다는 것) 이상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 주님의 이 말씀(7:21-23)을 비롯한 종말에 관한 여러 말씀들(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열 처녀 이야기...)은 해서 역사 속에서 벌어질 실제 상황을 설명한 말씀이라기보다는 믿는 자들을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격려하고 경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정적 상황을 설정하여) 말씀하신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다시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동물이 사는 것처럼 육체적 본성을 따라 움직이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것은 원함과 의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고 법의 문제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육신(의 생명)으로는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믿음(성령을 의지함, 자기를 부인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 역사한다. 이 성령(영)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고 법이다. 법이란 삶의 방식과 원리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법은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요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법은 성령이고 믿음이다.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 육을 부인하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삶의 법(방식, 원리)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살면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혈기대로 행동하고 감정대로 움직이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신자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이것이 알파(시작)와 오메가(끝)이다. 육신의 종이 되어 육신이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 생각은 있으되 육신에게 져서 결국은 육신대로 하고 마는 것은 동물의 길이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5-9)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은 영으로 살지 않고 육으로 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신자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육신에 있다고 해서 즉 육신의 정욕의 종이 되어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원함(생각, 마음)조차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있고 그것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인(종교인)들에게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왕노릇하고 있으니 결국 육신의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권력이나 돈이나 기타 자기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제도적 억압들과 일과 사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것은 당연한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권자의 권세와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사람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잘못된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마땅히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자로 지음 받았지 지배를 받아야 할 종으로 지음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방과 자유가 죄나 거짓 권세와 같은 잘못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마땅히 지배를 받아야 할 생명의 법칙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라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해방과 자유는 사탄이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부추긴 바로 그것이다.

육신은 자유를 원한다. 자기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싶은 것이다. 육신은 자기를 누르고 있는 인간적 지배와 물질적 지배, 환경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진리로부터(생명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만일 사람이 그 원함대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인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사로잡힌 사람 곧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 이루어지고 생명이 더 충만케 될 것이다. 사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를 얽어매고 있는 사회적 인습과 전통과 도덕 윤리, 기타 모든 제약과 굴레들이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는 그런 것들에서 도리어 자유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 원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탄의 정함 없는 거짓말과 육신의 정욕과 망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황은 절망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마음대로 살고 원대로 살 수 있다면 술을 한없이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한없이 먹다가 병이 들어 죽을 것이고, 기분 나쁘면 사람을 마음대로 때리고 해치고 죽이다가 자기도 그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돈을 탐닉하는 사람은 평생 돈을 벌고 만지고 쓰다가 돈 기계, 돈 관리자로 인생을 끝내고 말 것이며, 여자를 탐닉하며 거기에 파묻혀 사는 사람은 몸을 망가뜨리거나 복잡한 가족 관계, 인간 관계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왜 사람은 육신대로 살면 불행하게 되는가? 사람이 육신대로 살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사람)의 법이 아니고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의 소욕(원함)은 정함이 없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인간의 욕망은 자기의 참된 필요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마귀의 거짓말이 사람 안에서 헛된 욕망과 생각을 불러 일으킨 결과 그런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영과 진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욕과 거짓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소는 풀을 뜯어먹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절대로 육신대로 살 수 없고 마귀의 거짓말을 따라 범죄하며 진리를 거스르며 살 수 없다. 이것은 정해진 길이다. 소가 풀을 먹는 것이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다 정해진 운명이다. 원한다고 하고 원치 않는다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오직 생명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고 영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이다. 자동차가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인도로 돌진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날아서 더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사망뿐인 것처럼 인생이 그 생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그 결과는 사망뿐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때로 솟아오르는 육신의 욕망을 (영으로) 죽여야(거부해야) 한다.(롬8:13)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욕망이 치솟는다고 해서 그것을 다 따라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육신의 욕망은 우리 삶의 주체가 아니며 행동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는 육신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지 그것으로의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육신(의 원함)은 무엇이나 결정하는 주체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신의 욕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도 같다. 그들은 육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환경이나 인습이나 전통이나 남의 눈이나 그 무엇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기어이 하고야 만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먹고 자고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 그리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에게 순결 의무를 지는 것까지를 다 속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당연한 인간사, 인륜에서 벗어나는 것을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이런 일들은 과거에는 누구도 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인간의 기본적 삶의 틀이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이런 것조차 육신에게 제약을 가하는 구속과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도덕 윤리든 사회적 약속이든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이 없고 진리라는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오직 하나 자기 육신의 정욕과 정함 없는 생각뿐이다. 참으로 깊이 속은 것이다. 정함 없는 자기(육신의) 생각과 정욕을 삶의 기반과 기준으로 삼고 행동하니 그 인생이 어찌되겠는가? 그러니 인생이 정함이 없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자유와 안식의 자리를 모르니 이렇게 사탄의 종이 되어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  

사탄의 직업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우리를 속인다. 그 속임수 공작의 한 영역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법'과 '요령(要領)'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불법이란 말은 술수 또는 요령(要領)이라는 말과 같다. 요령을 부린다는 것은 쉽고 편하게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길에는 요령이 없다. 이것은 다른 말로 왕도(王道)가 없다는 것이다. 생명과 진리의 길에는 왕도가 없으며 쉬운 길, 지름길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생명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만이 길이요 진리요 요령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미혹에 빠져 '쉽게'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가르치려 하고, 육신에게 부담이 없는 길로 신앙의 틀을 잡으려고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삶의 태도를 (책망하고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처럼 서로 인정하고 말하며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거짓 평안'을 외쳤다는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도 그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목 앞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데도 그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쳤다. 그것은 첫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른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징계와 멸망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그것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뼈를 깎는 자기 부인과 회개의 노력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부정적인 말과 경계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맞추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원하는 말만 해 주고 원치 않는 말은 해주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 평안을 외친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이유, 멸망의 넓은 길로 가는 이유는 육신이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길,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육신이 속에서 왕노릇하고 있는 사람은 육신이 부인되고 통제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철저히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육으로 사는 사람의 한계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결국 기만과 위선(외식)과 거짓 평안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로부터도 기만을 당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헛일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불법의 결과 곧 육신대로 사는 삶의 결과는 오직 사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쉽고 편한 길로 인도하겠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의 좁은 길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법 곧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새로운 생명에 대해, 성령의 인도에 대해 깊이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우리의 현재 삶이 외식과 요령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살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수많은 위선자, 거짓 신자들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을 기만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위선자, 외식자가 된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말을 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후에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읻. 그것은 평소에 그들이 자신이 위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러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생각(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판단)이며 또한 그 주님의 판단은 마지막 날 주님에게 갔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삶의 열매(행실)을 돌아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와 열매, 생명과 현상(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담대히 하나님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생명)를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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