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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집은 한 번 지으면 오래도록 사용해야 하고 허물고 새로 짓기 어려우므로 지을 때 잘 지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그러므로 잘 살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또한 죽으면 인생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라면, 꼭 잘 살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잘 살면 좋지만 (그것이 어려워서) 잘못 산다면 잘못 사는 대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은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길대로 잘 살아야 한다. 인생은 마치 심사를 기다리는 작품과도 같으며 영원히 살기 위해 짓는 집과도 같다. 이런 경우에 작품을 만드는 것이나 집을 짓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찬가지로 땅에서의 우리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집은 어떻게든 짓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 거기서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잘 짓고 잘 지어야 한다. 인생도 그러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을 건축하는 방법(삶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영(말씀)을 좇아 사느냐 육신대로 사느냐 하는 두 가지이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영을 좇아 사는 인생은 반석 위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박고) 세운 집과 같고, 육을 좇아 사는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집을 짓는데 유의해야 할 두 요소는 기초와 재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1-15)

여기서 인생 건축의 합당한 기초(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합당한 재료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다. 인생의 기초가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 생명이 위로부터(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 인생의 기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위로부터 온 생명 곧 아들(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아들의 생명이 없는 자 곧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지 않은 인생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건축 '재료'는 무엇인가? 그 역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건물(인생)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으로 엮어지는 그 무엇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의 인생은 성령(아들의 영)이 빚어내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생명)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신다. 성령 안에서 조성되는 이러한 우리 인생은 결국 그리스도의 집(몸) 또는 성전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7:13,14에서 주님은 우리 인생을 일컬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인생이라고 하셨다. 이때 좁은 문은 시작 또는 기초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좁은 길은 과정과 재료를 나타낸다. 그러나 결국 같은 것이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이 결국 같은 것처럼 우리 인생의 기초(터)와 재료 역시 같다. 다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그리스도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지는 우리 집(인생)은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라는 재료로 구성되고 건축되어져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4:11)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인생의 재료 곧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건축 재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참된 인생을 조성하는 방법은 영으로 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육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며 자기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약속(말씀)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이) 불타지 않는 재료로 집을 짓는 것이다. 혈기대로, 정욕대로, 내 지혜대로, 세상 상식대로 사는 것은 짚이나 풀이나 나무로 집을 짓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인생은 하나님의 불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있다. 잘 산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과거의 사람들도 웰빙을 추구했지만 그 개념이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다. 그들은 돈을 벌면 그것으로 잘 먹고 잘 노는데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했다. 곧 저축이나 자식들 교육에 투자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잘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식의 웰빙을 누리는 것(잘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때 사람들이 추구한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웰빙 자체가 아니라 웰빙을 위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즉 돈을 많이 벌거나 출세를 하거나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 목표가 달성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잘 입고 잘 먹고 편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웰빙 자체든 자식을 위해 뼈빠지게 일하는 삶처럼 웰빙을 위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든 인생이라는 집을 세우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들이 그 뜻대로 잘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인생이 본래 사람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도록 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법칙대로 굴러가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는 날고 물고기를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새가 헤엄치려고 애쓰거나 물고기가 날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헛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길(법)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그리스도(하나님)에게서 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복하도록 만들어졌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가려고 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1:2,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4)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127:1-5)

이 말씀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과 하나님(그리스도)의 관계 또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부르심을 받고 조성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는 정상적인 삶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하나님과 관계를 실질적으로 상실한 상황에서 이 말씀이 밝히고 있는 원리는 이방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이 원리는 절대적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사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사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집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지키신다. 사람이 할 일은 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삶은 부모가 계획하고 책임진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모든 것이 다 부모의 일이지 아이의 일은 아니다. 아이의 유일한 책임은 부모 안에 거하는 것이다. 즉 부모를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사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이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고 삶의 비결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먼저임을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챙기시는 것을 믿고 그 안에서 평안하며 안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집(인생)을 짓는 방법이고 집을 짓는 재료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하나님이 건축하신다. 아니 하나님에 의해 건축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일은 오직 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이다.

시편127편에서 우리는 '자식'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여기서 시인은 자식을 집의 기반(기업)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집은 일반적인 가정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집의 기반은 무엇인가? 회사의 기반이 돈이고 군대의 기반이 무력이라면 '하나님의 집'(생명의 세계)의 기반은 '생명의 열매' 즉 하나님(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난 인생(백성)들이다. 자식이 없으면 집(가정)이 될 수 없듯이 아들의 생명(인생)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있어서 융성(隆盛)하는 집이란 기본적으로 돈이나 권력이 많은 집이 아니라 자녀들이 많은 집을 가리켰다. 대를 잇는 자식이 없으면 결국 집 자체가 없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성한 아들이 많은 집의 부모는 늙어서도 수치를 당치 않으며 군인이 전통(箭筒)에 화살을 가득 가진 것과 같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인생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개인의 인생(집)에 적용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인생(집)에 있어서 자식은 무엇일까? 자식을 많이 가진다는 것은 결혼해서 아들 딸을 많이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의 열매를 많이 가지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식은 '생명의 열매'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삶'이다. 누가복음 7:35에서 주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서 자녀는 마태복음 11:19에 의하면 신자가 '행한 일'을 가리킨다. "지혜는 자기의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인생을 견고하게 하는 기반 즉 인생이라는 집을 든든하게 짓는 재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삶'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순종하는) 이 삶이야말로 장사의 손에 있는 화살과 같은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또는 원수(사탄)와 말할 때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될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주목할 만한 두 건축물을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바벨론 성이고 다른 하나는 새예루살렘 성이다. 성경의 바벨론 성과 새예루살렘 성은 둘 다 어떤 물질적 성(城,건축물)이 아니라 인류가 쌓아올린 두 종류의 인생(삶)을 상징한다. 바벨론 성은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성의 이름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과 고대의 대제국인 바벨론제국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새예루살렘 성이라는 이름은 구약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따왔다. 바벨론 성은 세상 나라를, 새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바벨론 성의 특징은 화려하고 번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고 편하게 건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만큼 화려하고 굉장한 이 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사서로의 힘을 합쳐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인류(사람)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은 견고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을 쌓는 법대로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성은 화려하지만 기초가 없이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이에 반해 새 예루살렘 성은 초라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런 성이 세상에 있는지, 세워지고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바벨론이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아무도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바벨론이 무너지고 난 후, 즉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을 다 소멸하신 후에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다음은 바벨론 성에 대한 말씀이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계18:1-24)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바벨론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이 성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관계를 가지며 이익을 취하는 곳이다. "여기 있어야 사람이 사는 것이지" 하고 느낄만한 곳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성은 너무도 허무하게 순간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때 이 성에다 모든 것을 걸었던 모든 사람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이 무너질 때 그들의 인생 또한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음은 새예루살렘 성에 대한 말씀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바벨론 성에는 영광과 환희와 노래 소리와 재미가 있었지만 동시에 한쪽 구석에는 성도의 눈물과 피도 있었다.(계18:24) 이 성도들은 바벨론에 살았지만 바벨론에 속하지 않는 (다른 성)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이방인이 되었고 핍박과 거절을 받아서 눈물과 피를 흘린 것이다. 이들은 바벨론 성에 몸을 두고 있었지만 새예루살렘 성에 속한 사람들이다. 새예루살렘 성이 드러나는 그 날 하나님은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이다.

세상(바벨론)에 산다고 해서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세상과 관계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외로움과 핍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집이 있고 다른 인생이 있다. 곧 무너질 집이 아니라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으며 무너질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인생이 있는 것이다. 어디에 인생을 투자하고 어떤 인생을 건축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아울러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듣고도 못들은 체 자기 마음대로 살 것인가? 말씀은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이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들은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보고도 그것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다면 이같은 원통한 일이 없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약속의 세계를 보고도 믿음으로 그곳을 향해 썩 나아가지 않는다면 본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세계에 대해 보고 들었으면서도 마귀의 시험에 빠져 그리고 나아가지 못하고 헤매었는가! 야곱을 생각해 보라.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기 야망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부모를 속이고 형제를 속이고 삼촌을 속이면서 기어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인생 말년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그가 스스로 획득하고 쌓은 것은 다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만 그에게 남았다. 그의 건강과 젊음과 재산과 사랑하는 아내(라헬)와 자식(요셉..)은 다 날아가고 오직 늙고 병든(다리 불구) 몸과 자녀들 간의 분쟁과 번잡함만 남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복 있는 자였다. 그러므로 자기가 쌓은 것(어차피 없어질 것)들은 날아가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로 주신 것들만 남아서 진정으로 부유한 자가 되었다. 그 영광과 권세로 인해 그는 애굽에 갔을 때 바로(애굽 왕)를 축복하였고, 눈이 멀었을 때도 요셉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지혜대로 축복할 수 있었다.  

반대로 야곱과 같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론과 미리암, 아간, 게하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그들이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와 경쟁하며 권세를 추구했다. 아간은 시날의 외투 곧 바벨론(시날은 바벨론의 다른 이름)의 부를 사모하며 추구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에게서 예물을 받음으로써 부를 추구했다. 그리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큰 헌신자라는 명예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 앞에서 큰 권세자를 이름을 얻으려 하다가 문둥병의 저주를 얻었으며, 아간은 부유한 삶을 추구하다가 저주 속에서 돌에 맞아 죽었으며, 게하시는 나아만의 부를 추구하다가 나아만의 문둥병만 얻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위대한 헌신자라는 이름 대신 사망의 저주를 받았다. 그것이 그들 인생의 열매(소득)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말씀)에 의하지 않고 집을 지었다. 그러므로 그 집은 결국 무너졌다.

인생은 출발부터 바르게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새로운 나라로 가려고 할 때 먼저 유월절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넜다. 유월절 밤을 보냈다는 것은 그 날 밤에 있었던 사망을 통해서 옛 사람(자아, 육)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밤에 그들은 어린 양을 전체로 먹으며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었다. 이것은 그들이 흠 없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자기의 생명으로 취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홍해를 건넜다는 것 역시 옛 사람의 장사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만나)을 먹었으며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셨다. 이 떡과 물은 위로부터 오는 생명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수많은 과정을 거쳤지만 실제로(속에서)는 새로운 집으로 건축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기(육신의) 생각과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생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되고 말았다. 결국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했으며 그 영혼이 더욱 파리해졌다.(시106:15) 이것은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7-51)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도 결국 광야의 그들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인생 곧 그리스도를 깊이 받아들여서 자기 생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아무리 주님과 가깝고 친밀한 듯 하여도 결국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무너지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산상보훈을 끝맺으면서 주님의 마지막 교훈을 다시 한 번 새기도록 하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으로써 새로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생이며 우리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인생 길이고 목적이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지 말자. 육신이 있다고 해서 육신이 왕 노릇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육신)는 죽는다. 그때 육신의 모든 영광과 자랑은 다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해놓으신 새로운 삶을 소망으로 삼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맞는 새로운 인격으로 조성해 가신다.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장차 이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영원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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