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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 (2) (마8:5-13) / 2004. 8. 8

2010.04.30 14:27

이상봉 조회 수:3767

2.백부장의 믿음 (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중대장으로 군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백부장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복자의 주구(走狗)에 불과한, 참으로 먼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나아온 것이다. 마태가 이 생소한 이방 군인을 유대인 문둥병자 다음으로 주님 앞에 등장시킨 까닭은 무엇인가? 마태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마태복음이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서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지난 주에 이미 생각한 바와 같이 마태의 메시지는 때가 차매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으로 차별없이 퍼지게 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백부장과 함께 성경에 나오는 또 한 명의 유명한 백부장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이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대라는 로마 군대의 중대장이었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단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로 끝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교제를 가지던 중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받음으로써 신약의 복을 누린 최초의 이방인이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백부장은 이스라엘인이 아닐뿐더러 거칠고 잔인한 로마 군대의 군인이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군대의 지휘관이 하는 일(일상사)이란 사람을 무력(칼)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고 압제하는 것이 그의 직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백부장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백부장이 왜 주님께 나아왔으며 또 (고넬료의 경우) 베드로를 초청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갈대아에서 나온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권속인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많은 이방인 중에서 백부장(로마 군인)인가? 거기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우리의 마음 속에는 '구원(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된다'든지 또는 '구원은 어느 정도 선하고 의로운 사람에게 해당된다'든지 하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 로마 군인은 창기와 세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방인일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과 가장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시대의 한국 주둔 일본군 헌병장교와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들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예비된 한 겸손한 마음'이 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예비된 '믿음'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으로 흘러나오기 위한 통로인 것이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7,18)

백부장의 믿음과 구원은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다만 은혜로) 차별 없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표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22-26)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0-13)

백부장의 믿음과 구원은 갑자기 되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예고하신 약속의 말씀을 따라 되어진 것이다. 믿음 있는 백부장의 등장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음을 나타내는 징표(sign)이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사탄의 방해와 사람의 저항(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에 하나님은 약속을 기다리는 경건한 자들(안나, 시므온, 아리매대 요셉...)을 남겨두셨고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인들과 비천한 자들(마태와 삭개오, 창기...)을 부르사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예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여기의 백부장처럼 이방인 가운데서 그 기뻐하시는 자들을 택하사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마음을 겸손하게 갈아놓으신 것이다.  

주님께서 백부장의 청에 따라 그의 종을 고쳐주신 것은 주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오랜 하나님의 은혜를 일관되게 거절해왔기 때문에 구원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4:25-27)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1,12)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3,14)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8:7,8,13)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임마누엘(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들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과 패역으로 인해 심판의 칼을 갈고 계셨다.


주님이 앞에서 유대인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의 치료 방법과 이방인인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의 치료 방법 간에는 차이가 있다. 문둥병자에게 주님은 직접 손을 대시며 고치셨다. 그러나 이방인인 백부장의 종(이 종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을 고치실 때는 말씀만으로 고치셨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 그 원리를 보여준다. 즉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물론 이방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민족 문제가 아니라 시대 문제인 것이다.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이스라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이스라엘)인 것이다.

신약의 구원 원리는 하나님은 은혜(그리스도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베푸시고 사람은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성령을 따라감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믿음과 성령의 역사는 구원이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주님)을 직접 보고 만지는 체험이 없이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신약의 복이다.

백부장은 주님이 친히 그의 집으로 가서 종을 손으로 만지며 치료하실 필요가 없고 다만 말씀만으로 치료하시더라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의 이해'이다. 그가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족하다고 한 것은 '구원은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역사(구원자-그리스도-의 사역)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지식)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람은 다만 그것을 믿기만(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 백부장의 믿음은 신약 성도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구원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지혜와 그의 방법과 그의 능력과 그의 때를 따라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일하심을 주목하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일하시는 것이다. 그가 오셔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다만 그의 말씀, 다만 그의 작은 행동 하나, 다만 그의 느린 것처럼 보이는 일에 경의를 표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최선의 일이다. 백부장의 말은 이것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작정하신 바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시원하도록 우리의 방식과 우리의 때에 맞춰 역사하시는 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믿어야 한다.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못하고 (다만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에 힘입어) 믿는 자가 더 복되다.(요20:29)


백부장의 믿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권위를 알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문둥병자의 믿음의 특징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이었다면 백부장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권위(권세)의 본질을 알고 거기에 복종하는 믿음이었다. 믿음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인정하는(순종하는) 것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것은 단순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권세에 대해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주를 유지하는 두 가지 근본 원리는 '권세'와 '은혜'이다. 권세는 질서와 관련된 것이고 은혜는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우주) 존재의 기반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우주는 존속되지 못한다. 권세가 무너지면 우주는 무너진다. 그리고 은혜가 없어도 우주는 유지되지 못한다. 사탄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름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유혹했다. 그 보다 먼저 하와로 하여금 자기의 머리인 아담을 거슬러 일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유혹한 것 역시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여기서 인류는 생존의 근본 바탕을 상실했다. 나무가 뿌리를 상실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분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행하기로 작정했을 때 인류는 사망으로 내달은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0:3-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1-14)

교회는 아담이 잃어버린 권세에 대한 복종을 회복한 곳이다. 교회는 평등한 곳이 아니다. 물론 인종이나 직업이나 지식에 따른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와 존엄성은 동등하고 평등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남녀가 평등하지 않고 노소가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가 힘의 원리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식으로 살도록 되어 있는 곳이란 뜻은 아니다. 우주의 또 다른 원리는 사랑과 은혜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며 희생하며 생명을 줌으로써 모두가 다 존귀하고 모두가 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다. 다만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나온 자가 있으면 낳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으면 주는 자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같을 수 없고 뒤죽박죽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탄은 이러한 우주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권세를 무시하며 부정하도록 부추긴다. 모든 반역과 거역은 다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모든 불평과 시비와 원망은 다 사탄이 (선악간의 판단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우주의 근본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추긴 데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4,5)
왜 불평이 나오고 시비를 가리며 원망이 나오는가? 왜 거역과 반역이 나오는가? 얼른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나를 돌보시며 나를 이러한 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불평과 원망과 거역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 우리의 상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그 어떤 권세자도 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그들이 다 잘났고 잘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 까닭에 복종하는 것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복종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작은 인내, 작은 순종, 작은 자기(자기 감정의) 부인(否認), 작은 겸손, 이것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백부장의 순종, 주님에 대한 백부장의 겸손과 복종은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이다. 그는 주님을 알았다. 주님이 피지배 민족의 젊은 무명 선지자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자기는 작은 아이에 불과함을 알았다. 백부장의 믿음(순종)은 오고 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덕목을 잘 표현했다. 그것은 권세를 알고 그 앞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여인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써 "나는 머리가 없습니다(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나의 머리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회복을 선언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백부장의 태도에 매우 감동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여태껏 이런 대접(믿음)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지금까지 이스라엘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이와 같은 대접을 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백부장이 보인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가? 무지(빛이 없음)와 교만과 불순종으로 마음이 완악하고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저주와 심판이다.(사6:9,10) 그러므로 사실은 백부장의 믿음이 특별히 좋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믿음이 너무 형편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합당한 경의를 표하는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우하는가? 말이 아니라 순종과 겸손과 인내가 바로 믿음의 실제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권세를 알고 복종하는 믿음' 이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아버지(권세)께 복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실패한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승리하셨다. 그리고 그 승리를 이 한 이방 죄인 안에서 나타나게 하심으로써 인간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내게 어떤 분인지, 그리고 그 지식의 바탕 위에서 내가 누구며 무엇을 할 자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며 지식의 근본이다. 이 믿음이 있고 이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만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위치에 서서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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