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 (8:14-17)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8:14,15)

주님은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다. 베드로의 장모가 어떤 연유로 열병을 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이 그녀의 병을 고칠 때 (손을 만지심과 아울러) '열병을 꾸짖으심으로써'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녀의 질병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눅4:38,39) 즉 그녀의 병이 자연적인 연유로 생긴 것이 아니든지 아니면 병 자체는 자연적인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열병으로 앓는다는 것은 내부적 원인이야 무엇이든 몸에 고열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열이 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몸 안에서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균과 몸(백혈구...)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병을, 생존을 향한 치열한 인간의 몸부림의 한 단면(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둥병이 죄와 부패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죽어 있는 인류(이스라엘)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열병은 하나님을 떠나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끼게 된 인간이 육신의 일로 헛되이 달아올라 뜨거워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오늘까지 삶(생존)을 향한 인간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 사실 하나님 없는 인생으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주님의 눈에는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유대인)들이 다 열병에 걸려 있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우 집요하고 열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날의 이스라엘도 그러하다. 과거의 이스라엘은 잘 모른다면 오늘의 이스라엘을 보면 된다. 그들은 정치와 경제, 학문, 심지어 전쟁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분야에서 매우 치열하다. 그 결과 오늘날 유대인들은 그 수가 매우 적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주요 나라 속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벨상을 받은 학자들을 포함하여 미국 유명 대학의 유력한 학자 중 다수가 유대계이며 미국 자본의 다수를 소유하고 있고 미국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유력한 경제인 역시 상당수가 유대계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후손으로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믿음과 정신을 배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히 행하는데는 별로 열의가 없었으나 주변 열강 사이에서 생존하고 번성하여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겠다는 목표를 위한 열성은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참으로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역사적 굴곡 속에서 억압을 당하고 실패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자기의 정체성과 존재를 잃지 않고 몸부림을 친 결과 오늘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몸부림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필요없는 것이요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존과 번성을 위해 스스로 몸부림치고 애써야 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인도 받고 보호받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온 몸에 열이 뻗치도록 몸부림을 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아들이 아니라 열병에 걸린 환자에 불과했다.    

크게 보면 유대인뿐 아니라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살았기 때문에 인류는 언제나 뜨겁고 열렬했다. 생존을 위하여, 번영을 위하여, 쾌락을 위하여, 여러 자기 목표를 위해 인류는 언제나 분주했고 뜨거웠다. 뜨거울 정도가 아니라 과열되었다. 그 결과 안식과 평강을 잃고 정신 없이 헤매다가 마침내 혼수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인류는 생존과 안녕과 행복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헐떡였지만 돌아온 것은 그것이 아니라 파김치가 된 몸과 스트레스로 짓눌려 파열되고 분열된 정신, 고독, 미움 다툼 갈등으로 분열된 사회, 전쟁 등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열심(열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잘못된 열심(열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과 열기가 잘못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자리가 잘못되었으며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줄기)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과 은혜를 삶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열심은 뿌리 잘린 나무, 줄기에서 꺾인 가지, 메마른 땅에서 자라는 식물의 열심처럼, 치열하기는 한데 결코 결실을 거둘 수 없는, 근본적으로 무리한 열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그리스도(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그리스도인(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하나님)의 멍에(운명, 자리)를 메고(지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주님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첫째가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의 삶의 특징은 여유와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자의 삶은 여유롭고 그 인생이 쉽고 편하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왜 사람이 악한 꾀를 쓰며 죄를 지으며 남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려고 애를 쓰며 거들먹거리는가? 다 살려고 그러는 것이다. 잘 살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잘 사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지으시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순리대로 사는 것이다. 순리대로 사는 사람은 애쓰고 몸부림치며 열이 뻗칠 필요가 없고 조용히 안식하며 여유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순리를 거스르는 자 곧 역리로 사는 자는 피곤하고 분주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5-8)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

집(인생)은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과 거기 거하는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처럼 인생 역시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을 인생답게 세우실 수 있다.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 열심으로 구축(構築)하는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 없이 잘 살려고 몸부림치고 수고하며 치열하게 사는 인생은 열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진 인생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열심은 열렬하면 할수록 생명의 마모(磨耗)와 마멸(磨滅)과 소진(消盡)을 가져오며 마침내 혼수상태(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만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다시 말하지만 믿음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부유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역사(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승리)로 인해 안식하는 것이다. 주님은 열병에 걸린 인류를 치유하러 오셨다. 주님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헛되고 허무한 열심에서 해방시키고 안식케 하기 위한 당신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이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 안에는 안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범사에 안식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의미]

주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왔다. 주님은 그들을 다 고쳐주셨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는 기사는 산상보훈 바로 앞에도 나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4:23-25)

그렇다면 산상보훈 전에 주님의 질병 치료 사역에 대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여기(산상보훈 후)에 같은 사역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구원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주님이 이스라엘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신 것은 그들의 육신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주님의 목적(구원)이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산상보훈은 주님의 구원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의 영을 회복시키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의 현재적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고 해결해 주는 것도 물론 주님의 사역(구원)의 한 부분이지만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구원은 말씀과 십자가로 사람들의 생명을 근본적으로 살리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다른 구원(육신적 구원)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병자들을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신 주님의 사역은 그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바로 그 구원자(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외형적(육신적) 연약과 질병을 담당하는(고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연약과 질병을 근본적으로 해결할(치료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은 반드시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근본적인 생명의 회복 역사를 포함해야 한다. 육신적 질병의 치료는 이러한 근본적 생명의 치료를 외형적으로 표시한 표지(sign)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이 두 측면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는 주님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바와 같이 사람을 그 현재적 육신적 고통과 저주에서 건져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그의 영적 사망 곧 죄와 저주(귀신들린 상태, 마귀에게 속은 상태)의 자리에서 건져주시는 것이다. 즉 육신을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과 영을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두 방면의 구원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8장에서 말하는 구원은 얼른 보면 전적으로 前者 곧 육신적 구원에 대한 것처럼 바로 앞에 있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서 마태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태에 따르면 주님은 단지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그 질고(疾苦)로부터 건져 건강한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개념상 육신과 영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둘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육신과 영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몸을 구원하는 것은 영을 구원하는 사역과 동시에 진행될 수밖에 없다. 몸을 건지는 주님의 사역은 영을 건지는 사역의 전조(前兆) 또는 징조(sign)이며 (말씀으로) 영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역은 육신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육신의 생명에 활력을 불어넣는 주님의 구원 사역의 징조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0,11)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구원은 전체적이고 전인(全人)적인 것이다. 주님의 구원은 총체적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더 풍성케 하시는 것이지 그 이하는 아니다. 오늘날 본의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구원을 제한하고 축소시켜서 반쪽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구원이 육신적 구원에 치중된 것처럼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육신적 생활이 부유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결과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인격보다는 주님의 능력을 더 사모하며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왜 오늘날과 같은 고통과 저주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간과하고 있다. 육신이 먼저 망한(병든) 것이 아니라 영이 먼저 망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사망이 어디로서 왔는가? 그의 육신적 고통과 저주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은 데서 시작되었는가? 인류의 모든 문제 곧 육신의 모든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즉 하나님께 대해 (영이) 죽음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즉 영이 죽자 육신도 죽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육신적 구원이 온전하고 풍성하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사람은 결국 도로 저주의 자리에 빠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구원이 전혀 육신적인 구원과는 상관없으며 주님의 구원은 오직 (어떤 사실을 믿음으로써, 지식을 가짐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서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인격적)으로 아무런 실제적 구원을 입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은 오직 사람들의 종말적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은 일생을 사는 동안에는 죄와 질병과 저주 속에서 실제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야 하며 그러다가 죽을 때(세상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이름(공로)을 의지하여 (죄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육신적 구원뿐 아니라 영적(생명적) 구원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로부터의 구원(해방)도 결국은 미래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다 잘못된 것이다. 전자의 생각이나 후자의 생각이 다 주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주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미래의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현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고 총체적이며 전인(全人)적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다(구원한다)는 말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것은 곧 사람에게 구명튜브 같은 것을 던져서 물에서 건져 올리는 것을 의미하지 그 사람이 물에 빠진 채로 (어떤 지식을 가짐으로써) 그 상황을 받아들이게(체념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주님의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구원은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영혼과 육체를 총체적으로 건져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전한 자리에 이르도록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은 영만 구원한다든지 육만 구원한다든지 하는 것이 될 수 없고 전체적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주님이 사람의 질병(육신의 회복)을 담당하신 범위와 주님이 사람의 죄(영적 회복)를 담당하신 범위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죄 사함 및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측면에서의 구원(영적 구원)은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시행되지만, 병을 고치고 육신의 삶이 건강하고 풍요롭도록 회복시킨다는 측면에서 구원은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주님의 죄 사함의 능력과 병 고치는 능력에 대해 같은 믿음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반드시 같지 않을 수 있다. 즉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즉각적이고 분명한 만큼 병 고침의 역사도 그렇게 즉각적이고 분명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주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기 전의 이 땅에서는 육신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다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삶은 나 혼자 엮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하늘과 땅과 만물이 어우러져 있는 이 환경 속에서 엮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만 변한다고 해서 어떻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나는 금연을 했다 하더라도 옆의 사람이 계속 담배를 피운다면 내가 담배의 해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담배의 해악에서 완전히 벗어나 맑은 공기 속에서 살려면 반드시 옆의 사람들도 금연을 해야 한다. 이처럼 새 삶은 나(영)의 변화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몸이 다 구비되어야 한다. 그 전에는 인간들의 죄, 나의 육신적 연약함, 환경적인 문제 등이 다 우리로 (주님이 우리를 건강하게 해놓으셨다 할지라도) 다시 병들게 만들며 가난하게 만들며 힘든 삶을 살도록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영적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의 육신을 고난 속에 두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타락으로 인해 약하고 부패한 우리의 육신적 형편상 영이 각성하고 살려면 육신이 너무 안락하고 편안하면 곤란하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종종 육신의 상태와 반비례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

많은 경우에 주님의 병 고치시는 역사는 실제로 사람을 사랑하사 육체에 강건함을 주시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 병 고침은 표적의 성격을 띠고 일어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표적으로 이런 (육신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들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영적 유익과 육신적 유익이 상충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은 영적 유익을 우선하신다. 하나님은 종종 영의 유익을 위해서 육신을 기꺼이 환난 가운데 두신다. 왜냐하면 육신의 삶은 잠깐이지만 영적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신자의 육신의 상태는 영의 상태에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영이 죽으면 육신은 (안 그래도 죽지만)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영이 살면 육신도 산다. 왜냐하면 육신은 영을 담는 그릇이므로 하나님이 육신에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심] (8:23-27)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8:18-27)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곳은 가버나움이었는데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였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 (갈릴리 바다의 남동쪽) 가다라 지역으로 가고자 하셨다.  

주님 일행이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갈 때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파도가 배가 덮었고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이때 주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있었고 제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만드셨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첫째, 바람과 바다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도 주님을 그것을 꾸짖었고, 둘째, 그런데도 주님의 꾸지람을 들은 바람과 바다가 잠잠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주님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먼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자연 법칙조차도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음으로써 잠잠케 하신 이 사건은 이러한 주님의 위치와 주권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잠잠케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천하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그 법칙과 현상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필요에 따라 이 법칙을 초월하여 행하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적이다. 물론 사탄도 잠깐동안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어 사람을 속이거나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마술이나 술수와 같이) 매우 제한적이며 기만적이다. 아무도 주님이 하신 것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한다. 오직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만이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만물의 법칙을 정하신 분이시므로 특별한 필요가 없는 한 그가 정하신 법칙을 깨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견 자연적인 일로 보이는 어떤 현상 뒤에 사탄이 숨어서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단지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잔잔케 하신 것이 아니라 '꾸짖어서' 잔잔케 하셨다. 꾸짖는다는 것은 인격이 있는 존재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바람과 바다 뒤에 무엇이 있길래 꾸짖었다는 것인가? 사탄이다. 사탄이 자연 현상 뒤에 숨어서 주님을 공격한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종종 어떤 사람이나 어떤 자연 현상 뒤에 숨어서 사람을 위협하고 공격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서 복종시켰다는 것은 사실 자연 현상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해치려는 마귀를 꾸짖어 복종시킨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도 주님은 그의 열병을 꾸짖음으로써 병을 떠나게 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눅4:38,39)

누가 비인격인 질병을 꾸짖을 수 있는가? 이 역시 질병 자체가 아니라 그 병을 가져온 사탄을 꾸짖은 것이다. 주님은 종종 이런 식으로 사역하셨다.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생긴 것이다. 결국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사실상 모두가 귀신 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의 치료에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영의 해방(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모든 질병이 다 직접적으로 마귀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질병이 이와 같이 마귀를 꾸짖음으로써 치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의학적인(자연적인) 질병이다. 의학적인 질병은 의학적으로 고치든지 아니면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치유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질병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대응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현상이 같을지라도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의학적인 질병은 능력으로 고치셨고 사탄으로 말미암은 질병은 그 질병에 붙어 있는 마귀를 꾸짖어 쫓아냄으로써 고치셨다.

많은 경우에 의학적인 질병도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순종의 결과이다.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몸을 돌보지 못했든지 탐욕과 스트레스로 인해 몸을 망가뜨렸든지 많은 질병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정하신 법대로 살지 않은 데서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므로 사탄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께 치유를 구하거나 자연적인 치료 과정을 거침으로써 고쳐야 한다. 그러나 마귀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질병은 반드시 성령의 인도 아래서 마귀를 대적함으로써 고쳐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이런 경우에 마귀를 두려워하거나 질병이나 환난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고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반드시 주님을 의지하여 마귀와 정면 대결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첫째 할 일은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회복이다. 마귀의 공격은 오직 주님의 힘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주님께 나가야 하며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주님과의 사이에서 막힌 것은 없는지 먼저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고 품은 죄나 야망이나 불순종이 있는지를 살핀 후 그것을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꾸짖으며 정죄하고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다.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막9:17-26)

이 경우에도 외형은 벙어리이고 귀머거리지만 실제로는 귀신이 들린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외형은 좀 다르지만 마찬가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귀의 공격을 받아서 병을 얻은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막9:17-26의 경우처럼 겉으로 볼 때 귀신 들린 표가 나고,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장모 경우처럼 귀신 들린 표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사탄의 공격 아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마귀의 공격 형태가 다양한 것처럼 목적도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 마귀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어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사람에게 갑자기 까닭없는 질병을 던진다. 무당의 무병(巫病)이나 대부분의 귀신 들린 자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 마귀는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고 훼방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때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런 질병이 생기거나 사고를 만나게 된다. 전도자들이 종종 까닭 없는 병으로 앓는 경우 그리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의 장모가 병에 걸린 것은 그녀가 주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거나 베드로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 마귀는 믿음을 시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사람에게 까닭(자연적 이유) 없는 질병을 던진다. 욥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본질]

위험 가운데서 제자들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면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 책망하셨다. 제자들은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위경에서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말씀 곧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주님은 배에 오르기 전 제자들에게 분명히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마8:18)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바람이 불고 바다가 요동할 때 마치 주님이 그들에게 아무 약속도 하시지 않았거나 혹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자"고 말씀이나 하신 것처럼 두려워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의 핵심이다. 불신앙은 덮어놓고 안 믿는 것이 아니다. 불신앙은 말씀(약속)을 붙들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풍랑이 일 때 주무시고 계셨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별 일 아닌데 요동하였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제자들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그 바람과 풍랑은 매우 위협적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태평했다.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아직 말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환경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약속, 계획)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한, 자신의 삶의 내용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제자들은 죽어도 바다에서는 죽을 수 없고 '건너가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이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안정되고 요동치 않는 것이 되려면 우리 안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안식의 바탕에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이 깔려 있다. 주님에게는 죽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한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의 운명은 아버지 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누구인가? 아들을 전적으로 위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손에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다면 그 이상 안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이러한 권세로 인해 주님은 어느 자리에서든지 요동치 않고 안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마26:55,56)

죽더라도 버티다가 할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때가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려워하던 중에 무엇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때가 되어 삶이 다음 과정(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인생 곧 아들의 평안이다.  
믿음과 말씀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말씀(약속)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약속)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붙들어야 한다. 믿음의 본질은 현상(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것이다. 바다 건너편에 사역이 있으면 제자들은 적어도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탄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위협과 거짓말뿐이다. 풍랑은 결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지 못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사탄의 가장 큰 무기처럼 여기는 것이 사망의 위협이다. 그래서 사망 권세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기만과 거짓 협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죽는 것은 사탄이 죽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정하신 때에 죽음이 집행되는 것뿐이다. 즉 사람이 죽는 것은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것이지 사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말로 두려워할 것은 영혼을 죽이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요동치 않을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4-17) / 2004. 10. 3 이상봉 2010.04.30 3711
78 신랑이신 주님 (마9:14,15) / 2004. 9. 26 이상봉 2010.04.30 3689
77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함 (마9:9-13) / 2004. 9. 19 이상봉 2010.04.30 4409
76 구원의 권세를 행사함 (마9:1-8) / 2004. 9. 12 이상봉 2010.04.30 3675
75 믿음의 본질 (4) (마9:1-8) / 2004. 9. 5 이상봉 2010.04.30 3670
74 귀신 들림 (마8:28-34) / 2004. 8. 29 이상봉 2010.04.30 3730
73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 (마8:19-22) / 2004. 8. 22 이상봉 2010.04.30 3572
» 믿음의 본질 (3) (마8:14-17) / 2004. 8. 15 이상봉 2010.04.30 4154
71 믿음의 본질 (2) (마8:5-13) / 2004. 8. 8 이상봉 2010.04.30 3767
70 믿음의 본질 (1) (마8:1-4) / 2004. 8. 1 이상봉 2010.04.30 3939
69 반석 위에 지은 집 (마7:24-27) / 2004. 7. 25 이상봉 2010.04.30 5036
68 불법 (마7:21-23) / 2004. 7. 18 이상봉 2010.04.30 3961
67 나무와 열매 - 생명과 행위 (마7:15-23) / 2004. 7. 11 이상봉 2010.04.30 3791
66 거짓 선지자 (마7:15-23) / 2004. 7. 4 이상봉 2010.04.30 3667
65 좁은 문과 길 (2) (마7:13,14) / 2004. 6. 27 이상봉 2010.04.30 3594
64 좁은 문과 길 (1) (마7:13,14) / 2004. 6. 20 이상봉 2010.04.30 3584
63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2) (마7:6-12) / 2004. 6. 13 이상봉 2010.04.30 3537
62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1) (마7:1-12) / 2004. 6. 5 이상봉 2010.04.30 3611
61 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이상봉 2010.04.30 3726
60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 (마6:19-33) / 2004. 5. 23 이상봉 2010.04.30 3822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