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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림 (마8:28-34) / 2004. 8. 29

2010.04.30 14:30

이상봉 조회 수:3730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주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귀신 들린 자 두 명이 주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때 귀신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요일3:8)도 알고 있었다. 이로 보건대 마귀는 어떤 면에서 사람보다 훨씬 분명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마귀는 사람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사로잡아 종으로 부리고 있으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들을 정복하셨으며 이로 인해 비록 잠깐의 여유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때가 이르면 마귀와 귀신들은 곧 멸망될 것이라는 것이다.

귀신들은 주님께 자기들이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했다. 주님이 허락하시자 그들은 돼지 떼로 들어갔고 그 돼지 떼들은 바다로 내리달아 몰사하고 말았다. 귀신은 마귀의 졸개들이다. 이 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마귀의 본성과 목표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파멸시키고 죽이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다.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동네에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주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에게 그 마을을 떠나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돼지 치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주님을 거절한 것은 주님의 사역으로 인해 그들의 물질에 손해가 나거나 그들의 삶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마귀의 속박에서 건져내어 생명과 자유를 주시는 구원자를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사람이 마귀에게 얼마나 깊이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이러했으니 이방인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영적인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육적인 일에만 깊이 붙들려 있다는 것은 마귀가 그동안 이스라엘을 얼마나 깊이 속여 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귀에게 있어서 종교란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종교를 안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을 자기들 나름(방식)대로 섬겼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가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속에 깊이 자리잡는 것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사탄은 사람을 마음대로 속일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으므로 (선지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거절했기 때문에) 마귀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속일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여기서 생명보다 돼지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지으신 하나님을 거절한 아담은 이제 자기 생명의 구원자를 거절하고 돼지를 유일한 소망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큰 어둠과 혼란인가! 이 얼마나 귀신 들린 삶인가! 앞에 귀신 들렸던 두 사람은 주님이 그 속에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귀신에게서 해방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 동네의 소위 멀쩡하다고 하던 사람들은 주님의 이러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영원히 귀신에게 매여 종노릇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훨씬 더 불행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41)


오늘 우리의 모습은 혹시 이렇지 않은가?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고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참 사람의 자리를 회복해 주신 주님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돼지 죽은 것과 돈 아까운 것에만 신경이 팔려 주님을 거절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을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특별한 죄인 곧 특별히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보통의 아담들이다. 그들의 반응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실상이 무엇인지 담담히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자유를 주신 주님을 거절하고 돈과 돼지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은 참으로 마귀에게 깊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인생, 진리의 빛이 없는 인생은 영원히 사람보다 돼지를, 생명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인생이 돼지 치려고 지음 받은 것인가? 생명보다 돼지를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 같지만 실은 귀신들린 것이다. 전혀 정상이 아니다. 사탄에게 깊이 속아 있는 것이다. 가다라 사람들이 생명의 구원(영적 회복)보다 돼지를 더 아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살려고' 그런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기를 무서워하여'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돼지인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돼지가 생명의 근원인 것이다. 이 얼마나 소경이고 근시(近視)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히2:15) 인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이런 자들을 그 매인 자리에서 놓아주려고 오셨다. 자기 영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직 돼지 잃는 것만 두려워하여 주님을 내쫓은 사람들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 모른다. 하나님은 돼지(사람들의 생계 수단)를 없애러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명(삶)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켜 온전케 하고 풍성케 하는 것이다.

돼지 2000마리는 크지만 사람의 목숨보다는 크지 않다. 귀신이 주님께 자기들을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살인과 파괴와 파멸의 본성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러한 마귀의 본성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돼지의 몰사를 알면서도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한 생명(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다. 한 명의 영혼이 돼지 2천 마리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것을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돼지를 창조하셨으며 그것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회복이 만물의 회복의 시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즉 사람의 회복을 우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마음 아프지만)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 주님은 한 생명과 돼지 수천 마리를 기꺼이 바꾸셨다. 사람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그냥 귀신을 내쫓지 않고 돼지 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만일 주님이 그대로 귀신을 내 쫓으면 혹시 그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가게 될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주님은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우리의 생명에 있다. 사람을 얻을(건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천하라도 내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거라사인들이 돼지를 친 것은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돼지는 율법에 부정한 동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돼지를 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이 율법(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거라사인들의 돼지는 분명히 불의한 재물이고 부당한 이익이다. 그들은 그 불의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주를 거절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는 생활할 길이 없는가? 작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거절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삶(생계)의 유지 방법'인가? 어쨌든 주님의 복음과 구원 역사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거라사인들은 그들의 그 불의한 재물과 부당한 이익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구원의 주를 내쫓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가? 우리는 삶을 유지함에 있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거라사인들의 일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우리 육신(의 삶)에 약간의 손실을 입히실 때 혹시 거라사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가?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나 주님의 도움과 위로를 받는 것은 좋아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과 영의 유익과 연단을 위해 징계(고난)를 받는 것은 싫어한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이것이 바로 거라사인들의 태도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육신의 삶이 아니라 영혼의 강건함이다.


이 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귀신은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것이다. 주님이 다가가자 귀신은 주님께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나를 괴롭게 마소서"라고 했다. 여기서 '상관이 없다'는 것은 주님이 귀신(마귀)과 아무 접촉점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아무 것도 탐내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므로 마귀가 유혹하거나 손을 댈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계신 곳에는 마귀가 상관할 것이 없어서 결국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라사인들에게 마귀는 상관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했다.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막5:10)

우리에게는 마귀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나는 너와 상관없으니 제발 나를 괴롭게 하지 말고 떠나다오"라고 하겠는가 아니면 "나는 네가 있는 이곳이 좋으니 같이 있고 싶다"라고 하겠는가?  

귀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지만 영물이므로 사람의 영의 상태를 잘 알아본다.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19:13-16)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인격 안으로 깊이 취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권세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다. 마귀를 두렵게 하고 마귀를 내쫓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외적 형편이 아니라 내적 생명이다. 육신의 모양이 어떠하며 생활 형편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가 어떠하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 사람의 마음에 진리(하나님의 말씀)가 있고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와 권세와 영광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 것이다. 그러나 돈에든, 정욕에든, 명예에든, 그 무엇에든 하나님 아닌(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닌) 어떤 것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다면 그가 있는 곳은 여전히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갈2:4,5)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어서 종의 멍에를 벗고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아)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그 지음 받은 본래의 자리 곧 아버지(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는 아들의 위치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마귀에게 속아 있어서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지만 마귀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사람이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계속 종의 상태에 놓여 있도록 만들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의 자유와 영광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 등장하면 우주 가운데서 마귀는 끝장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권세는 '거짓말'과 '사망'으로 사람을 위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부활 생명'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돈(재물)으로부터의 자유, 생활의 염려로부터의 자유, 정욕과 쾌락으로부터의 자유, 죽음과 질병과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사람의 인정(認定)과 칭찬과 판단으로부터의 자유, 헛되고 무의미한 일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죽은 형식과 외식(外飾)으로부터의 자유, 헛되이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심과 질투와 시기와 분노와 다툼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재산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마귀는 우리로 이 자유를 놓치도록 하기 위해 매일 우리 주위의 사람과 사건과 환경을 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우리로 일생(一生)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 자기의 지배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시험은 교묘하며 그의 공격은 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성령) 안에 견고히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안전하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에게 갖다주신 것이므로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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