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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 (4) (마9:1-8) / 2004. 9. 5

2010.04.30 14:31

이상봉 조회 수:3670

- 중풍병자를 고치심 -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2:1-5)


중풍병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자. 문둥병이 불순종과 범죄(하나님 없음)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는 생명을 잃고 죽어 있는 유대인(인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면 백부장의 하인 또는 여기 나오는 주인공이 걸린 중풍병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허약성과 마비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풍병은 몸이 그 기능을 거의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머리(뇌)에서 지시를 해도 몸이 말을 안 듣는 상황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각하는 머리(뇌)는 살아 있는데 그 생각대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머리(뇌)가 기능을 상실하여 결과적으로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풍병자의 현상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하나님 없는 유대인 또는 인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인류의 마비는 머리(생각) 자체에도 일어나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몸(활동)에 일어나 있다. 특히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영적) 지식 없는 신자들, 믿음 없는 신자들의 상황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 머리(지식) 자체가 거의 마비되어 아는 것도 없다. 이것은 뇌졸중(중풍)이 아니라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경우는 정확하게 중풍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생각은 뻔한데 몸이 전혀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생각과 말로는 온갖 것을 추구하지만 행동은 전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 없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분명한 교통이 없는 신자들의 저주 상태이다. 성경에 나오는 앉은뱅이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 -

주님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침대 채로 주님께로 내려보낸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행위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믿음으로 간주하시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셨다.

주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붕을 뜯고 환자를 주님께로 내려보낸 것은 주님의 치료를 받고자 모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순서를 기다릴 수 없었고 주님께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그들이 나만 살겠다는 이기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새치기를 했다는 말이 된다. 거기 온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도 다 급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살겠다고 남의 집 지붕을 뜯어서 망가뜨린 것도 잘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행동은 주님께 무례한 행동이었다. 병 고치는 집회든 말씀을 전하는 집회든 주님은 지금 공공집회를 열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지붕을 뜯고 사람을 매달아 내리는 법석을 떤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붕을 뜯으면 조용히 뜯어지겠으며 떨어지는 잔해물과 날리는 먼지 없이 환자를 가뿐하게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집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완전히 중단시키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의 행동을 용납하시고 죄 사함과 질병의 치료라는 구원을 기꺼이 베풀어주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은 크게 볼 때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게 본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의 동기와 근거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판단할 때 드러나는 외형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되며 또한 사람의 상식으로만 판단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시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을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그의 행동을 볼 때는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한가 합당치 않은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지 합당치 않은지 즉 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지 순종치 않는 것인지는 그의 행동의 '동기' 또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어떤 행동을 판단할 때 반드시 그 동기와 근거를 보아야 한다.

어떤 행동이 그 방법 면에 있어서 조금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 동기가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책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되는 것이다.(요10:10) 어떤 사람이 너무 배가 고파 빵을 훔쳐먹었다면 판사는 그를 심판할 때 정상을 참작하여 너그러운 판결을 내린다. 그것은 그 행동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곧 생명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뜻이 희미하게나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을 죽으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동기와 근거를 따질 때 우리는 어떤 필요에서 그런 일을 했느냐 하는 것과 아울러 무슨 까닭으로 그런 방법을 택했느냐 하는 것도 따져야 한다. 빵을 훔쳐먹는 것은 그 동기에 있어서 생존이라는 인간의 절대적 필요 때문에 한 것이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그러므로 크게 정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죄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경우는 어떤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동기는 분명히 친구를 낫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친구를 살려서 온전케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방법으로 지붕을 뜯고 침대를 매달아 내려서 주님께 대령하는 방법을 택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부분도 우리가 중요하게 따져보아야 할 행동의 동기와 근거이다. 그들이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구원자(하나님의 아들)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생명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 두 가지가 구원 얻는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덕목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주님의 사역을 이루는(돕는) 진정한 사역을 하는 것이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살려고 하는 사람이 제일 필요하다. 그리고 살려고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이 제일 필요하다. 잘난 사람도 필요 없고 점잖은 사람도 필요 없고 오락가락하는 사람도 합당치 않다. 오직 자기의 병을 인정하고 달려와서 주님의 수술대에 눕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무리하다면 무리한, 그리고 무례하다면 무례한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을 주님이 흔쾌히 구원하신 이유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마지못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사랑하시며 기쁨으로 건지신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주님을 부엌에서 섬기려고 한 마르다와 발 아래서 섬기려 한 마리아 중 누가 주님의 사역의 성취를 도운 자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이며 누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한 자인가? 주님을 위해서 분주히 수고한 마르다가 아니라 다만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가 주님을 진정으로 섬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귀찮게 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심심하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려고 사람들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사귀고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을 살리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 적극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힘입어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가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한 여자가 주님께 나아와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은 다 그녀에게 무의미하고 헛된 일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합당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당한 일은 무엇인가? 제자들의 시각에서 그것은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님은 그 여자가 (향유를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고 하셨다. 왜 그런가? 그녀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한 일은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었다. 인류의 구원과 가난한 자의 구원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인류의 마음과 가난한 자의 마음에 역사하셔야만 제대로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의 승리 없이는 인류의 승리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만 위하는 것이 인류를 위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다른 것은 몰랐지만 주님이 자기의 생명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주님을 위하는 것이 곧 자기가 사는 길이며 사람들이 구원 받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한 일은 일시적으로는 분명히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다. 그때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에 매여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때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다소 무리한 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은 자를 죽은 자들(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전도자의 길에 나서야 했던 앞의 사람처럼 우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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