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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9:1-8)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2:5-12)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 전에 주님은 먼저 그 사람의 죄를 사해주셨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자리에 마침 몇 명의 서기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 매우 놀랐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해주다니 매우 황당하고 불경스럽고 오만하다.' 이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행동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생각을 속으로만 했을 뿐이지 밖으로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 내셨다. 곤란한 문제를 스스로 표면화시킨 것이다. 사실 주님은 이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말씀("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신 것이다.

주님이 오신 것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주시고 침략자들에게서 해방시켜주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영혼을 건져주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일부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 사역에 대해 몇 가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미 설명한 것이지만 주님은 왜 병 고치러 온 사람에게 먼저 죄 사함을 선언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육체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기에, 그리고 질병과 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기에 주님은 병자의 병을 고치기 전에 먼저 죄를 사하셨는가 이런 문제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왜 서기관들은 그것을 그렇게 엄청난 일로 생각했는가? 서기관들은 심지어 죄 사함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기관들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죄를 한 번도 사한 적이 없는가? 이것은 곧 죄 사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 병을 고치는 것과 죄를 사해주는 것 중 어느 일이 더 쉬운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곧 사람의 육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중한, 급한) 일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행하신 사역을 살펴보자.


서기관들은 주님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친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그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서기관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은 서기관들의 이런 생각을 '악한' 생각으로 간주하셨다. 서기관들은 주님의 행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주님은 도리어 그들의 그러한 태도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틀렸고 주님이 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중풍병자의 병을 즉석에서 고치신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중풍병자가 자기 침대를 메고 걸어나간 것은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그렇다. 주님은 옳았고 그들은 틀렸다.

주님이 서기관들의 생각과 태도가 악하다고 한 것은 그들이 사람(죄인)이 감히 다른 사람(죄인)들의 죄를 함부로 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죄)는 첫째, 그들이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하신 약속 곧 때가 되면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구원하시며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혹 그들이 일반적으로(막연히) 그 약속을 믿었다 하더라도 지금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가 약속의 메시아(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표적과 선행을 행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 약속(구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의 문제는 사람이 (죄 사함이라는) 하나님의 권세를 감히 행사하는 것을 비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이다. 사람은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한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죄인(사람)의 권세를 넘어서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사울이 제사장인 사무엘을 제쳐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이 망령되고 악한 일인 것처럼 사람이 자기 분수를 넘어서 어떤 일을 하려고 나서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비난한 것이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모르며 하나님의 일에 대해 모른 것이다. 즉 하나님을 모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며 그러므로 주님이 지금 행하시는 역사적인 사역에 대해 무지했고 반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들 앞에서 어떤 일을 하고 펼치고 계신지 전혀 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죄다. 주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한 죄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눈 앞에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기관들이 지금 주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는 자리에 와 앉아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보았고 무언가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는가?

주님의 족보에 올라 있는 특이한 인물 라합의 선(善, 美)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문을 듣고 그 백성(정탐꾼)을 영접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모든 면에서 아무 칭찬할 것 없었지만 오직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지금 곧 강력한 신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민족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신에게 붙어야겠다.' 이것이 바로 라합의 유일한 지식이고 유일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녀의 완전한 善과 德이 되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니라"(수2:8-11)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2:12,13)

바로 이런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사람이 아무 것도 듣고 본 것이 없는 가운데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많은 표적과 증거와 소문(복음)을 들려주고 보여주신 후에 그 마음을 합당하게 가지는(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4,17)

주님이 서기관들을 악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는 헛된 형식 논리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무시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문제이지만 형식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없었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그런 일을 사람에게 시키신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런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미리 약속하셨고 또한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그 일을 시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믿어야(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사람을 살리고 죄를 사하며 귀신(사탄)도 물리치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일이므로 쉽게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로 눈에 보이는 사역들 곧 병자들을 고치며 이적을 행하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다. 이 역시 지금까지 그런 일을 행한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일을 행한 주님이 사람의 죄를 사하고 여러 가지 영적 권세를 행사하는 것도 당연히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는 자인가? 형식 논리에 빠져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으며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으며 사람은 절대로 율법 규정을 넘어서 곤경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마음)과 이름(권세)을 가지고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인가?

서기관들이 주님의 죄 사함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사람은 언제나 죽은 형식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헛되이 하나님을 높이며 헛되이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다. 지금 하나님의 최고 역사, 하나님의 최고 기쁨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건짐을 받으며 잃은 양들이 회복시키는 그것이다. 그런데도 서기관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 역사를 방해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높인다 하는 그것을 통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주님은 서기관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주님이 물으신 것은 결국 영을 구원하는 일과 육을 구원하는 일 중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것이다.

죄 사함과 병 고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가? 아니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주님께는 두 가지가 다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서기관들에게 둘 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여 온전케 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 안에 그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몰랐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잃었을 때 그것은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교통이 없었으므로 그 지도자들조차도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은 죄와 불순종으로 병들고 지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여 살리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무지한 이스라엘의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치유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누구보다도 추구해야 할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이다. 큰 능력은 큰 사랑에서 나온다. 마음만 있으면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 사함도 어렵고 병 고치는 일도 어려웠던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마음도 없었고 권세(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죄로 인해 저주받아 병들고 눌려 있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치료와 구원의 능력은 그 백성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는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형제들의 죄와 질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을 해결할 마음도 없었고 그것을 해결할 믿음도 없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는 다 쉬운 일이 그들에게는 다 어려웠던 것이다.


다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쉬운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세상 사람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안 보이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더 쉬울 것이고, 반대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적인 사람에게는 둘 다 어려웠을 것이다. 영적 세계에 대한 관념이 없는 사람들은 죄 사함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권세를 행사하는 것보다 불치병자를 낫게 하여 걸어가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크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고, 그 둘 다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둘 다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주님께는 어느 것이 더 쉬웠겠는가? 궁극적으로 보면 주님께는 다 쉬운 일이다. 죄를 사하는 것이나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나 다 쉬운 것이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주로서 주님은 얼마든지 병자를 낫게 하실 수 있으며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있는 것을 업게 하실 수 있는 분이므로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죄도 얼마든지 사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건지시며 기뻐하지 않는 자를 버릴 권세가 있는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18-21)

또한 주님은 자기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실제로 죄를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이므로 얼마든지 죄를 사하실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경중(輕重)을 가리자면 병자를 낫게 하는 일보다 사람의 죄를 사하는 일이 더 중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란 사실 용서하거나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왜 죄를 쉽게 사하실 수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의롭기 때문이다. 죄란 의와 반대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힘이나 능력의 문제, 의지나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존재와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은 곧 의며 사랑이며 진실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자, 미움이 있는 자, 살인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를 받으실 수 없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은 종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우주가 다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과 같이 있지 못한다면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 없는 곳,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는 곳 바로 지옥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죄를 사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구약시대 때부터 사람의 죄를 사해오셨는가? 사실 하나님은 죄를 사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심판하여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해오셨다. 주님이 중풍병자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것은 그의 죄를 (심판하지 않고) 덮고 넘어가거나 죄를 죄가 아니라고 간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의 죄를 덮어쓰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는(멸망당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죄(赦罪)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죄 사함은 자기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대속(代贖)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사한다(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넘어가거나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절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 죄 사함의 실상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죽음과 부활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곧 "너는 내 아들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너는 죽었다." "너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라 딴 사람이다." "너는 새 피조물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왜 그토록 극단적인 방법(아들의 희생)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 가운데 법칙을 세워놓으셨다. 이 법칙은 생명의 법으로서 이것이 무너지면 세상도 무너진다. 이 법칙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음식을 먹고 살도록 지으셨다면 사람은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밥을 안 먹고 술만 먹을거야" 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괜찮다. 나는 그러한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사람은 반드시 밥을 먹어야 산다'는 진리에 의거하여 밥을 꼭 먹으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밥을 안 먹는 자를 용서(용납, 인정)하실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 그의 생명의 속성을 따라 세운 법칙이므로 하나님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이 진리라면 밥을 안 먹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즉 밥을 안 먹는 것은 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보다 더한 생명의 법칙이 바로 죄를 범하면 안된다는 법칙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모든 진리 중 최고의 진리이고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법칙이다.

밥을 굶는 것이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죄도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죄를 짓고도 무사히 살 수 있다면 죄는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용서받을 뿐 아니라 처벌 자체도 할 필요가 없고 회개하라고 할 필요도 없다. 죄를 지어도 (생명에) 별 문제가 없다면 정죄도 필요 없고 용서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죄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죄는 反하나님적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시므로 반(反)하나님적이라는 것은 곧 反우주적이며 反생명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이므로) 곧 죽음과 멸망을 의미한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러한 시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조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문제, 또는 죄는 지을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안 지을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 또는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사함 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반드시 먼저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규정하시며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알지 못하면 다른 문제들은 다 의미가 없다.  

이제까지 말한 바에 따르면 주님이 죄인들의 죄를 사하신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하신 것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불가능한 일을 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도 불가능한 일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에게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냐 하나님이냐가 아니라 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마음이 없다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 것이다. 그 한 가지 마음이란 바로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함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아들들로 지음 받은 사람(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3-8)

이와 같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주님의 권세는 주님의 희생과 순종의 마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의 바탕에는 믿음과 자유(권세)가 있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자기의 희생이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룸으로써 모두가 영광을 얻는 길임을 알았다(믿었다). 이 믿음으로 인해 그는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인해 그는 자기의 목숨을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렸다.

주님에게 이 순종의 마음과 믿음과 자유(권세)가 없었다면 그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이 일, 곧 사람의 죄를 처리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 이 두 가지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주님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사람의 죄를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의 대표자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사람의 원형이요 근본이시다. 아담(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지어진 그리스도의 형상이다.(고전11:3-7)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원본이요 생명의 근원이다. 이는 마치 나무(실체)와 그늘의 관계와 같으며 최소한 나무의 뿌리와 줄기 또는 잎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그늘)도 없다. 그리고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죽는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났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탱되고 있으며 그에게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길은 죽음(지옥으로의 멸망)밖에 없다.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아니면 사람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람과 이러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는 사람을 대신하여 즉 사람을 자기 안에 포함하여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처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에 있는 그가 또한 사람들을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죄 사함(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님에 비해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며 그들의 지위는 어떠한가? 그들은 백성들의 선생이요 인도자였으므로 마땅히 백성들의 죄와 고통을 이해하고 그 짐을 담당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겼으며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으로 백성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에 힘쓰지 않았고 도리어 기만하고 멸시하였다.

모세에게 홍해를 갈라지게 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갈라지게 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 엘리야에게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못하게도 하고 다시 비가 내리게도 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 그 엘리야의 권능을 사모하며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추구한 엘리사에게 갑절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추구하며 순종하기만 했더라면...

모든 권세와 능력은 어차피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므로 사람의 능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마음이다.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그 죄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와 고통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며 짐을 지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이스라엘은 그때의 저주의 자리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8-18)

우리는 어떤가?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능력이 있는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 더 나아가서 가까운 형제들과 이웃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영혼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능력은 어떤가?

주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헤매는 무리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14:16) 제자들도 빈손인데 무엇으로 줄 수 있다고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바로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아들의 권세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믿음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사랑만 있고 마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사람의 욕망은 다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은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런 믿음과 마음을 가지고 그의 권세를 행사할 아들들을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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