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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은 어느 날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세관 앞을 지나가시다가 거기서 일하고 있던 세리 마태(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 세리(稅吏)는 어떤 사람인가?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인데 어느 나라에서든지 세금 거두는 사람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주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그들이 정복자 로마인과 그들의 꼭두각시인 압제자 헤롯에게 바치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무리하게 세금을 짜내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규정보다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착복했기 때문이다.  

마태는 그런 세리였다. 그러므로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유대교의 '거룩한' 지도자들로부터는 더욱 멸시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없었고 오직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여러 '죄인'들만 있었다. 주님이 그를 제자로 부르신 후 그는 자기 집에서 주님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그때 그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함께 식사를 했지만 그들은 다 동료 세리와 '죄인들'뿐이었다.  

주님은 왜 이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이런 죄인들을 건지러 자기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회복시켜서 자기 아들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즉 주님이 마태를 부르신 것은 주님이 바로 마태 같은 자들을 부르러 오신 분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주님은 자신의 말대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이런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는 즉각 반응하여 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 참으로 주님은 은혜롭고 마태는 복(믿음)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이 세리를 그 나라의 기둥으로 쓰일 일군으로 부르신 것에 대해 오늘 우리는 특별한 느낌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마태 같은 자는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안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존귀하고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는, 이런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하며 순리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1-9)

하나님은 언제나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시며 거룩케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치 못한 사람은 없다. 도리어 큰 죄인일수록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합당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일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비난하였다. 마태의 집에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주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경건치 못한 자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11:19)

이에 대해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으로 답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은 그런 자들을 거절하거나 배척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필요로 하며 그들을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의사에게는 환자가 필요하다. 마지못해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맞이하며 환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건강한 사람만 있다면 의사는 있을 필요가 없다.
의사가 존재한다는 것, 의과대학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의과대학에 가장 유능한 학생들이 지망한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는 건강치 못한 사람이 많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다 예비 환자이며 오고 오는 세대에도 항상 환자는 넘쳐날 것이라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알게 모르게) 다 환자이다' 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병원에서 전 분야에 걸쳐 정밀 검사를 받는다면 우리 중 대부분이 환자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앞으로 언젠가는 결국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의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이 (진단을 받으러) 병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육신의 형편이 이럴진대 영적 형편이야 두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정죄 되었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기 양심 앞에서 다 죄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주님은 자신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罪人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에는 죄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한 번쯤은 다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왕이 한 감옥을 방문하였다. 왕은 죄수들에게 '너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고 한 사람씩 물어보았다. 그때 모든 죄수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고 말했다.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곳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그 중 한 죄수만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큰 죄인이며 여기서 내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간수장에게 '즉각 이 사람을 여기서 석방하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선하고 무죄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므로 죄인이 있기에 합당치 않다. 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 가운데 불의한 죄인이 있으면 여러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니 즉시 이 자를 여기서 내 보내라"

감옥에는 오직 죄인이 있을 뿐이다. 종류가 있다면 하나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죄인이고 하나는 자기의 죄를 인정치 않는 죄인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도 인류는 다 같은 죄인일 따름이다. 여기도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自服)하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죄인이다. 혹 세상 감옥에는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인류의 죄인 됨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9-20)

이것이 하나님의 진단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없다. 영적으로 볼 때 세상에는 환자 아닌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온전한 사람, 의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죄인 곧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죄인과 그것을 모르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멸시하는 어리석은 죄인만 있을 따름이다.

요한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6-10)

무엇이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고 무엇이 어둠 가운데서 행하는 것인가? 요한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요한이 말하는 진실한 삶, 빛 가운데의 삶은 사람이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고 반대로 거짓된 삶, 어둠 가운데서의 삶은 자기의 죄를 모르고 도리어 자기가 선한 줄 알고 형제를 멸시하며 교만히 행하는 것이다.
요한은 신자들이 형제를 사랑하며 용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하며 이 글을 쓴 것이다. 요한(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교회에 형제 사랑이 없다면 그 교회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멸시하며 거절한다면 그는 생명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는 것이며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형제 사랑과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자백하는) 것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의 죄를 인정치 않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지(용납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그 사람과 같은 죄인이며 자기 또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와 똑 같이 용납되지 않으면 안될 사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분개하며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진실의 기초는 자기의 실상을 아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 즉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동정하고 용납하는 것은 그의 연약한 형편 곧 그의 죄인 됨을 이해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납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그러한 이해는 나 자신이 바로 그와 같은 죄임임을 알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진실한 사람만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그 사람만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다. 어두운 사람은 어두운 행동을 한다. 자기를 보지 못하니 남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죄인이 죄인을 정죄하고 멸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요한은 교회에 이런 풍조를 만연하게 될까 우려하여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이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거절하며 자기를 스스로 높여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다. '죄 없다' 하는 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 중 말로는 자기가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 '나는 죄인이고 인류는 다 죄인이다' 라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데서 나타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불신앙과 무지(진리 없음, 어둠)가 밖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주님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만일 우리가 형제를 죄인으로 멸시한다면 그것은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신 것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죄인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죄인은 죄인이며 냄새나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고 은혜를 받더라도 오랫동안 죄인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며 오래 향기롭지 못한 냄새를 피운다. 우리는 심지어 많은 허물들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간다. 회개한 창녀나 도둑이 우리 곁에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도로 옛 죄에 빠지기 쉬우며 그로 인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바로 그들과 같이 (종류만 다를 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을 수 없는 냄새를 여전히 피우고 있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죄인이 죄인인 줄 몰라서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와 같은 죄인이기에 그리고 미쁘신(신실하신) 주님이 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서 깨끗케 하시고 다루어 온전케 만드시기에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수용적이며 낙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오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선을 원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선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이며 따라서 거기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만 사람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다만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은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죄인)을 불러 의인을 만들려고 오셨다. 장차 다시 오실 때는 (당신이 미리 불러내어 조성하신) 의인을 찾으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합당한 자세는 마음을 열고 죄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차별 없이 전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과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1-17)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2-11)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오래 전부터 그 종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되고 강조되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유대인들이 드리고 있는 그런 제사를 원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이 원하는 제사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었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서로 동정하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달으라고 하셨다. 제사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서 즉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너희는 다 형제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같은 죄인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다 형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용납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나아와 은혜를 얻기를 바라신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거절한 것은 그들 안에 生命果(하나님의 생명)가 없고 善惡果(마귀에게 속은 거짓된 생각)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고 싸우고 분열하는 것은 바로 이 선악과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생명'에 있고 '사랑'에 있다. 그러나 사탄에게 속은 아담(인류)의 관심은 언제나 '선(善)'에 있고 '아름다움(美)'에 있고 '좋은 것'에 있다. 자기에게 무언가 선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그것을 추구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는데도 즉 자신은 더럽고 못났는데도 다른 사람에게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찾는다. 물론 한편으로 이러한 행동의 배경에는 사람이 (아름답고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깔려 있다. 그러나 지금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져 버린 상황이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선과 아름다움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선과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안 나오면 정죄하고 멸시하고 비관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 안에서 선(아름다움)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하신다. 내가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형제들이 함께 은혜를 받도록 사람들을 그 은혜의 세계로 이끌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들 안에서 (선악간에 판단하고 시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하며 생명을 목적으로 모든 일을 하기 원하신다. 사람을 살리는 수단은 긍휼과 자비이며 용납과 희생이며 섬김과 피차 가르치는 것이다.

사탄에게 속은 인류는 항상 무언가 '크고' '멋지고' '힘세고' '잘나고' '잘하는' 것만 추구해 왔다. 그렇지도 못하며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좋고 나쁨을 따지고 잘하고 못하는 것만 따져왔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이것은 철저히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극단에 이를 때 히틀러처럼 자기 기준에 맞는 (좋은, 선한) 사람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리는 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사탄의 올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죄인이나 세리가 아름답고 멋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반대로 토색질하지 않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 같은) 소위 '경건한 신자'가 죄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같은 죄인이며 다 같은 사람이다. 다 하나님의 은혜(구원)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서로 정죄하고 멸시하고 거절해서는 안된다.
멋진 제사(예배), 멋진 사업, 멋진 성전, 멋진 목사, 멋지고 완벽한 인간,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 사탄에게서 나온 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 종교를 이룰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우리 안에서 (사람이 살아나고 아들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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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무와 열매 - 생명과 행위 (마7:15-23) / 2004. 7. 11 이상봉 2010.04.30 3791
66 거짓 선지자 (마7:15-23) / 2004. 7. 4 이상봉 2010.04.30 3667
65 좁은 문과 길 (2) (마7:13,14) / 2004. 6. 27 이상봉 2010.04.30 3594
64 좁은 문과 길 (1) (마7:13,14) / 2004. 6. 20 이상봉 2010.04.30 3584
63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2) (마7:6-12) / 2004. 6. 13 이상봉 2010.04.30 3537
62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1) (마7:1-12) / 2004. 6. 5 이상봉 2010.04.30 3611
61 비판하지 말라 (마7:1-5) / 2004. 5. 30 이상봉 2010.04.30 3726
60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2) (마6:19-33) / 2004. 5. 23 이상봉 2010.04.30 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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