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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어느 날 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때 주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금식할) 수 있느냐?"고 답하시면서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신랑이 신부와 잔치를 하는 것이므로 신부나 손님들 곧 주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금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장에 의하면 주님이 행하신 첫 표적은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다. 주님이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려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부르신(택하신) 자들로 자기의 신부를 삼아 천국 혼인 잔치를 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오신 목적을 죄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는데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고 신부를 부르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를 불러(구원하여) 하나님의 생명(말씀)으로 양육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부로 단장시켜서 마지막 날 (새롭게 된 세상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이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것은 좋은 날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기쁨과 즐거움과 잔치의 날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만 좋은 날이 아니라 하나님(주님)께도 좋은 날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부를 취할 신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신 후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금식이 아니라 신랑이신 주님을 기뻐하며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생명의 잔치를 누려야 한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의 위치는 그리스도(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금식은 신랑(하나님)이 없을 때 하는 것이다. 즉 금식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으며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서 자기 생명을 키워 가시는 지금은 금식이 아니라 찬송과 감사를 해야 한다. 신랑이 있는 자리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잔치의 기쁨이다.

하나님이 없는 옛 종교로서의 유대교 안에는 신랑이 없었다. 그러므로 금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을 비롯한 구약의 경건한 성도들이 주야에 금식하며 하나님을 기다린 것은 합당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자가 아니었지만 자기 백성의 대표자의 입장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을 기다렸다. 그때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올바르게 처신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후에는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주님을 즐거워하며 주님을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한편으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금식할 수도 있다. 즉 금식하는 자의 심정으로 여전히 주님을 대망(待望)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아직 세상에는 의가 없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전히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상이 아직 완전히 주님의 나라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즐거움과 오락을 멈추고 금식과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지금 우리는 이미 주님과 함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망하는(기다리는) 우리의 입장은 주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의 완전한 통치,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더 알고 더 깊이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결코 신랑으로 알 수 없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누릴 수 없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랑으로 알 수 없었으며 신랑으로 누릴 수 없었다.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주인과 종, 신과 피조물의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정한 예법을 따라 떨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제사) 뿐이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과 생명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유일한 일은 떨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슬퍼하며 심판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알 때, 신랑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할 대상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더 나아가서 기쁨과 만족을 주는 신랑으로 다가올 때, 사람은 제사가 아니라 찬송을 하게 될 것이다. 신랑이 없는 동안에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지만 신랑이 있으면 기도와 금식이 아니라 찬송과 잔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님이 오셔서 자기를 신랑으로 제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하나님을 신랑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신랑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 친구로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신부로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직 전능하신 신, 창조주, 심판자, 주인 등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신랑과 아버지로 소개했다.

신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다. 그리고 신랑은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다. 회사의 사장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가 결혼식장에 있을 때 그는 하객으로 온 직원들에게 무서운 상사가 아니라 다만 즐거운 신랑이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이기는 하지만 지엄하고 심각하며 두려운 자는 아니다. 그는 직원들로부터 철저한 업무를 기대하며 훈계와 질책을 하는 상사이지만 지금은 그러한 자리에 서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바로 이와 같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영광스럽고 존귀한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여서 그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그를 즐거워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와 함께 누려야 한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식의 말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서 원하신다. 우리는 사시사철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랑과 함께 하는 신부처럼 그를 즐거워하며 그와 사랑을 나누며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8,19)

지난 7,80년대에 크게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조용기 목사님의 순복음교회는 그때까지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의 오래된 교파들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엄숙한 제사와 두려움과 심판, 헌신과 의무만을 강조하고 있을 때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다. 조용기 목사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며 친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서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전까지는 사실 하나님은 전능하고 두려운 신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의 앞에서는 떨며 잠잠한 태도를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가지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허물이 많고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순복음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적어도 한 가지 진리를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주님은 오늘 자기를 단지 사랑의 아버지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소개하셨다. 아버지는 다소 일방적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주장하고 아들은 다만 아버지께 순종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적다. 다만 일방적으로 주고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는 그러하지 않다.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며 위하여 모든 것을 줄 뿐 아니라 신부로부터 동일한 사랑을 받는다. 신랑만 신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 역시 신랑을 사랑하며 신랑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신랑은 신부를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통하여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결혼한다. 그러므로 신부는 신랑에게 단지 구원과 긍휼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대상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이 사랑을 오직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사랑은 신랑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부는 그를 '기뻐하며 즐거워함으로써' 그에게 화답을 해야 한다. 금식하는 것은 신랑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우는 것도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즐거움으로 찬송하는 것만이 신랑을 기쁘게 한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21:9,10)

이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부는 자기 앞에 있는 분을 아버지나 친구나 주인으로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신랑으로 알아야 한다. 신랑이므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이는 곧 그의 사역(나에게 해 주는 일)으로만 그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역의 배경이 되는 그의 인격과 그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두 연인 사이에는 남이 볼 때 하등 기쁘고 즐거울 만한 일이 없어도 기쁘고 즐겁다. 그저 보기만 해도 그저 있기만 해도 기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일(행위) 이전에 '존재'가 좋다는 것이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아1:2-4)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6,7)

이것은 솔로몬의 아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세상에서 아직 이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적이 없으며 이보다 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확하고 합당하게 표현한 성경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계시하셨다. 이 존귀한 왕은 얼굴이 검은 한 비천한 소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그 관계는 결국 일방적이고 시혜(施惠)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소녀가 왕을 찾고 사랑하고 필요로 했을 뿐 아니라 왕 역시 그 이상으로 그 소녀를 사랑하고 필요로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과 가지기 원하시는 관계이다.  

사랑하는 사람 간에는 두 가지 없는 것이 있는데 그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격식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 간에는 두려움이 없고 격식이 없다. 제사는 언제나 까다롭다. 그 절차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두 사이 곧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받는 자(귀신?) 사이에 인격적 관계나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모른다. 다만 (재앙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혹은 의무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진정한 사랑이 없는 곳에서 생긴다. 사소한 문제로 서로 따지고 시비가 붙고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자리에 가보면 언제나 거기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 데 사랑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최고의 길은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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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좁은 문과 길 (2) (마7:13,14) / 2004. 6. 27 이상봉 2010.04.30 3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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