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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음 ]

주님은 금식을 요구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혼인집의 신랑과 같은 분임을 말씀하신 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을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옛 유대 종교의 틀에 담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생베와 새 포도주, 새 부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복음 곧 '성령 안에서의 삶'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낡은 옷, 묵은 포도주, 낡은 가죽부대는 구약에 속한 '종교적 삶'을 나타낸다. 이 종교적 삶(행위)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 제기한 금식이다. 금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인간)의 위기와 절망을 호소하며 은혜의 구원을 갈망한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금식의 목표는 하나님의 구원자 그리스도가 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가 오면 금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기쁨과 만족의 잔치를 배설하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온 다음에는 금식은 옛 유물일 뿐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할 일이 아니다. 금식 뿐 아니라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과 각종 율법적 일들이 다 그러하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담기에는 적합지 않은 그릇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입을 수 없는 낡은 옷이며 담을 수 없는 낡은 가죽부대이다.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두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이고 둘째는 삶의 틀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하냐 하는 문제이다. 영이 살아 있고 그 마음이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향하여 열려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받을 수 있다. 오직 정직한 영 또는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그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담는 훌륭한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 곧 자기(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 곧 하나님을 안다 하나 하나님과의 참되고 실제적인 교통은 없는 자들, 그리하여 하나님이 전에 무엇을 약속하셨으며 지금 그것을 어떻게 이루고 계시는 지(하나님의 현재적 臨在와 役事)에 대해 무지하고 둔감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받을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현재 역사를 놓치고 뒷북을 친다. 이들의 무지와 고집과 교만은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종종 하나님의 일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훼방함으로써 마귀를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그 인격(마음)이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적합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합당치 않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협조도 기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경계하셨으며 그들과의 충돌도 불사하는 태도를 취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세례 요한도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8-10)

또한 주님이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즉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인 그곳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의 기득권자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시지 않고 변방 갈릴리의 어부들과 같은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신 것은 옛 종교에 깊이 인박힌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담기에 적합지 않은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현재적 말씀보다 옛 생각에 더 사로잡힌 사람,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자기)의 생각과 전통에 더 사로잡힌 사람, 생명(영)의 인도보다 선악적 관념에 더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적합지 않다.

두 번째 문제는 삶의 방식 또는 원리(틀)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언약과 새 축복은 그것을 담기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틀(체제, 원리)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고 확장되며 충만케 될 수 있다. 그 틀은 무엇인가? 바로 '영으로 사는 것'이다. 즉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주님이 신랑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신랑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이제 하나님이 저 멀리 바깥도 아니고 우리 옆도 아니고 오직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와 한 생명이 되어 교통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8장에서 약속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의 실현이다. 이 하나님의 복된 약속은 신랑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교훈이나 명령, 의식과 절차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을 누린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 밖에, 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신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생각이 되시고 우리의 부담이 되시고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책망이 되시고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우리의 겸손과 인내와 사랑이 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로 행하게 하신다. 이러한 것은 도저히 옛 종교의 틀 안에 담아둘 수 없다. 사람도 새로워야 하지만 체제(system, 생활의 틀)도 새로워야 한다.

옛 체제 곧 종교(구약, 유대교)의 틀, 율법적 신앙의 틀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적합하지 않다. 율법적 신앙은 성령과 믿음의 원리로 대체되어야 한다. 성전 제사를 비롯한 儀文에 속한 의식 절차들은 '성령(그리스도)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금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잔치(찬양과 감사)로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그 생명의 충만을 위한 갈망으로, 안식일 준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안식하는 것'으로, 사람의 전통은 '그리스도의 말씀(성령의 인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생베(새 천)는 낡은 옷을 깁는데 쓸 수 없음]

주님이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은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이는 것 자체가 합당치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완전히 낡아서 버려야 할 옷(예를 들어 걸레감이 된 옷)에다 손질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말씀이다.

생베는 무엇이며 낡은 옷은 무엇인가? 생베는 그리스도이고 낡은 옷은 인간이고 세상이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 유대교, 오늘날의 그리스도 없는 인생과 세상, 이 모두가 낡은 옷이다.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일 수 없다는 것은 곧 주님이 세상을 위한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주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방법은 세상을 옹호하고 보수(補修)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그 가운데 열어 그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틀을 짜러 오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금식으로 대표되는 구약 종교를 보수하고 강화하기 위해 오신 줄로 알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이 성전을 수축하고 안식일과 제사 제도를 보수하며 강화하기 오신 줄로 알았지만 도리어 주님은 그것들(구약 종교)을 폐하러 오셨다. 그는 옛 것(육신에 속한 것)을 폐하고 새 것(하늘에 속한 것, 영에 속한 것)을 주시려고 오셨다.

구약 시대에 이미 경험된 사실 중 하나는 이기심과 탐욕을 가진 자들이 그 마음을 버리지 않은 채 전에 섬기던 우상(을 섬기는 틀)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틀)을 취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 아무 실질적 변화(구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빌3:19, 롬16:18) 자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나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제사 드리는 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그 손에 악한 피를 묻힌 채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전에 섬기던 구약의 여호와를 버리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를 섬긴다 하더라도 그들은 거기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결코 그들의 세계를 옹호하거나 그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리스도는 결코 그렇게 쓰여질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조그마한 탐욕이라도 만족시켜주지 않으실 것인데 그것은 그가 그런 목적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 나라나 유대인을 위해 오신 분도 아니고 옛 종교를 꿰매고 때우러 오신 분도 아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것을 모르고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주님 당시 가룟 유다나 열심당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해서 찾고 부르며 섬겼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상을 위한 분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고통들을 제거하고 세상을 해방하여 세상을 더 살기 좋고 더 새로운 곳으로 개조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움직여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붙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그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해어지도록(찢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러 오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주님이 던지는 복음 진리는 모든 거짓과 모든 인간의 허무한 일들을 (옹호하고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분쇄한다. 세상이 고통과 상처로 신음하는 것은 사탄과 그의 거짓말에 속은 인류의 어리석은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새롭고 온전하게 되려면 반드시 먼저 사탄(의 거짓말)이 없어지고 옛 사람(의 죄)과 옛 세계가 없어져야 한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한 세상은 언제나 그 묵은 고통과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이 오신 것은 곧 진리가 온 것이며 빛이 온 것이다. 진리는 결코 죄와 거짓을 옹호할 수 없고 빛은 결코 어두움을 보존하며 세울 수 없다. 오직 분쇄할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위할 수 없는 것이다. 생베는 헌 옷을 위할 수 없다. 그것은 옷감의 낭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진리 앞에서 거짓이 보존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진리가 거짓의 세계를 땜질하고 거짓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주님은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가 세상의 몰이해와 배척과 거부 속에서 고난을 받고 피를 보며 성장하는 것 외의 소위 어떤 성장이라고 하는 것들은 진정한 성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상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 속에서 영접되고 확대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제국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진리와 십자가의 체험(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교회로 들어옴으로써 기독교가 큰 세력으로 확대되는데 기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상의 수호신으로, 제국의 수호자로, 가정의 수호자로 생각했으며 그가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원했다. 교회의 거짓된 지도자들은 그러한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여 그리스도가 마치 그런 분인 양 소개하고 제시했다. 이리하여 그릇된 연합과 그릇된 영접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교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선한 행실을 돕는 선생이 아니다. 그의 가르침은 단지 자녀들로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거나 아내로 남편에게 순종하게 함으로써 가정을 더 행복하고 화목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국민들로 국가에 충성하게 함으로써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오직 사람을 십자가로 끌고 가서 처리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개조라면 개조고 변화라면 변화지만 만일 이것은 도저히 변화나 개조라 할 수 없고 도리어 파괴요 분쇄라고 한다면 주님은 변화나 개조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파괴하고 분쇄하러 오신 분이다.  

주님은 단지 건설하고 세우는 분도 아니요 단지 파괴하고 폐하는 분도 아니다. 그는 폐하고 세우시며 파괴하고 건설하는 분이시다. 그는 이전의 모든 것을 다 폐하시고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나아오는 사람은 그에게 이것을 해주고 저것을 해달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오직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가야 한다. 주님을 이리 오라 저리 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다만 그를 따르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 이전의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다 세상에 대해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보내졌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1:9,10)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 옷이다. 그는 우리의 헌 옷을 때우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새 옷 자체이다. 이 새 옷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우리의 새 생명을 가리킨다. 이 생명 안에서 우리의 옛 생명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장사되고 없어졌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그와 합하여 부활함으로써 얻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이전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얻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은 그로 옷 입을 생각을 해야지 자기의 낡은 옷을 메워주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을 수 없음]

금식은 낡은 부대이다. 그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자를 담기에는 적합하지만 신랑 자신을 담기에는 적합지 않다. 그것은 너무 낡았다. 그런데 주님 당시의 요한의 제자들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러한 낡은 부대에 그리스도를 담으려고 시도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죽은 의문 율법의 종교 세계를 탈피하여 보다 생동감 있는 신앙 생활을 하기 원한 사람들이 종종 일어났다. 그들은 생명 없는 죽은 종교의 자리를 벗어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산 신앙의 체험을 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을 시도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패로 끝을 맺었다. 왜 그런가? 그들이 그리스도(성령)를 합당한 부대에 담지 않고 그를 이전의 종교적인 틀 안으로 억지로 구겨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근대와 현대의 오순절주의자들과 일부 천주교 내부의 은사주의자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일군의 개신교와 천주교 지도자들이 숨막힐 정도의 답답한 옛 신앙의 묵은 틀을 깨고 보다 자유롭고 활기 있는 새 신앙의 틀을 짜려고 소위 '성령 운동'이라는 것을 일으켰다. 이것은 좋은 동기와 과정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내가 이 운동들을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운동들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버렸기 때문이고, 어떤 운동들은 낡은 가죽부대 안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낡은 부대를 터뜨려 버린 것이 실패라는 것은 그들의 체제가 혼란에 빠져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위 제3의 물결이라고 하는 현대 오순절주의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들의 체제는 본래 전통적인 장로교 그 중에서 개혁주의의 틀이었다. 그들은 성령 은사 운동을 추구하면서도 그 틀을 그대로 유지하기 원했다. 소위 '예배'를 드리며 성직자 체제를 유지하며 장로교의 전통적 가치관과 진리들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취한 성령주의, 은사주의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한 성령과 은사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참 그리스도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취한 그 무엇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본래 틀을 깨고 말았다.

그리스도는 오직 그의 몸인 교회에만 담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오순절주의식의 성령 은사 운동에 담기지 않는다. 은사운동은 그것대로의 틀이다. 담길 수 없는 것을 담았으므로 정체 불명의 체제가 되고 만 것이다. 남들이 정체 불명이다 이상하다 하는 것은 관계없지만 자신들이 (자기의 하는 일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어서) 혼란에 빠져 그 일을 지속하기 어렵게 된 것이 문제이다.

결국 각 시대마다 등장한 많은 성령 은사주의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옛날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성령의 체험을 하고 은사의 체험을 하는 것이 구약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복을 받기 위해 또는 생활을 위해 의문 율법에 속한 의식들을 행하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성령 외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체제(틀) 안에서만 담길 수 있으며 거기서만 온전하게 역사하며 보존된다. 그 틀은 장로교도 감리교도 오순절 은사주의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명(진리)의 말씀으로 교통하며 섬기는 교회만이 성령을 담고 그리스도를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다. 그 어떤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따라 소위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훌륭한 봉사를 해도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이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담지 못한다. 구약 제사장을 그대로 빼닮은 성직자들이 구약 성전을 그대로 빼닮은 돌로 지은 성전에서 구약 제사를 그대로 빼닮은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듯이 십일조를 바치며, 하나님 섬기는 일은 목사나 교역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돈 버는 일과 율법에서 시키는 대로의 몇 가지 순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 속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온전히 역사하며 왕노릇하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가 충만한 교회가 되려면,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려면, 집회의 내용과 성격이 바뀌어야 하고 신자의 인격과 삶의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새 포도주가 그 속에 담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야 했고 안식일과 제물과 제사와 절기와 모든 옛 절차가 다 폐기되고 새롭게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는 주님이 그런 것들을 박물관에 보관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면서 도로 옛날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모양으로 실패했다. 그들은 새 포도주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부대에 넣었다. 그런데 앞의 사람들과는 달리 낡은 가죽부대가 터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것은 왜 실패라고 하는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은사주의자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성령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미사와 마리아 숭배를 동시에 시행했다. 이런 혼돈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만일 거기서 일어난 일들이 참된 성령의 역사이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었다면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옛 틀(천주교의 거짓된 모든 것들)은 반드시 오래지 않아 깨어졌어야 했다. 그래야 정상이다. 그러나 천주교 안의 은사 운동은 그들의 낡은 가죽 부대 곧 교황과 온갖 거짓된 일들이 가득한 그들의 죽은 체제를 터뜨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체험한 체험은 온전치 못한 것이며 설사 온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더 이상은 새 포도주가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교회만이 새 가죽부대임]

교회 생활은 사람과의 생활이고 하나님의 실제적 임재를 누리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지도를 받고 위로를 받고 책망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괴롭기도 하다. 정상적인 교회 생활은 어떤 생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정상적인 천국 생활은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다. 이것을 알고 싶으면 다음 질문을 해 보면 된다. '하나님과 함께 살면 어떨 것 같은가?' 교회 생활은 정확하게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생활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안에 충만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성향이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때로는 좋지만 때로는 피곤하고 싫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형제들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귀에 즐거운 말, 곧 육신에게 듣기 좋은 달콤한 말, 자기를 높여주는 말만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지 육신을 기분 좋게 하며 만족시키는 말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는 진리일 뿐이다. 내게 맞고 안 맞고는 내가 진리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결정한다. 내가 진리를 거스려 허무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싫고 편치 않은 말이 될 것이다.

교회 생활이 신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 생활이 항상 수준이 높고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교회 생활은 교회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교회 수준이 낮으면 즉 신자들의 수준이 낮으면 교회 생활도 보잘것없을 수 있다. 사실 많은 교회들이 수준이 낮기 때문에 교회 생활도 별볼일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낮은 수준의 집회와 낮은 수준의 교제라도 그런 교제를 가지지 않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여러분이 겪은 학교 생활이나 가정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거치지 않은 것보다는 유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시한 가정 생활이라도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는 낫다. 하물며 교회 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교회는 약하나마 주님의 생명을 지닌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얻는 손해와 부작용이 얼마가 되든지 그것보다는 유익이 훨씬 크다.

살아 있는 곳은 항상 생동감이 있다. 생동감이 있다는 말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시끄럽고 어지럽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고 경건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 입고 아름답게 치장이 된 곳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출하며 좋은 말(설교)을 주고 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앉은 사람들을 흐뭇하고 뿌듯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그 자녀들이 아버지를 즐거워하며 아버지를 주목하고 아버지를 말하며 아버지께 배우고 아버지의 말을 듣기(순종하기) 원하신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사귀고 일을 함께 하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부딪히고 서로 싸매며 서로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삶이다. 삶이 무엇인가? 살아 있는 자의 생활을 삶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모임이나 활기 있는 형제들의 모임을 보고는 시끄럽고 경건하지 않으며 무질서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조용하고 질서 있는 곳은 공동묘지이다. 그곳에는 시끄러운 소리나 삐거덕거리는 것이나 부끄럽게 되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도 없다. 왜 그런가? 다 죽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는 모든 자가 질서 있게 누워 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것은 사망의 세계이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의 세계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곳이다. 산 주님이 산 사람들 안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곳이다. 이 생명이 미약하나마 사람들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자극을 주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위로와 책망과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잘 차려 입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매끈한 예배를 드리지만 거기에는 살아 있는 생명의 활력이 없다. 이러한 곳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적합하지 않다. 즉 새 포도주를 담기에 적합한 새 가죽부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학교도 아니고 성전이나 제단도 아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사람이 안으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거기에 줄을 대고, 밖으로는 그 속에 있는 생명(그리스도)을 나타내는 것이 교회다.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원이 아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생명을 나누는 곳이며 함께 사는 곳이다. 교회에서 서로 말을 하는 것 즉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함께 있으면 서로의 마음과 생명을 언어나 기타의 수단으로 삼아 서로 소통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말과 노래와 기타의 방법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함께 찬양하며 서로 사랑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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