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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마5:21-26) / 2004. 2. 1

2010.04.29 13:42

이상봉 조회 수:3799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과 기타의 율법 말씀들을 주셨는데 거기에는 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덕률이 있었다. 사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보편적이고 당연한 계명이다.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법이 다 이 계명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넣으신 것은 사람 안에 그만한 상식이나 양심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미 아는 것을 다시 강조하거나 새로 가르쳐주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이미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계시의 기능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수단의 기능도 있다. 즉 율법은 언약서이며 이런 차원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믿음의 징표요 언약의 징표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한(살인 안하는) 정도의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구원)을 믿는다면 이런 (살인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표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죽이고 무시하고 짓밟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다.

총 들고 있는 아버지가 그 옆에 서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그 아들을 마구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신데 그의 아들을 마구 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것을 믿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면 아무도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선행도 아니고 (거룩한) 생명도 아니고 다만 믿음이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었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단지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그는 사울을 심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불의가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살인하지 말라, 복수하지 말라는 계명은 선행을 촉구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말할 때는 정말로 간음하지 않음으로써 세상 질서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말할 때는 그것(가정 질서의 유지)은 나중 문제고 먼저는 하나님을 믿느냐를 물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감히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형제의 가정을 파괴하고 형제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삶의 모습) 요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요구는 사람이 서로 죽이지 않는 선에서 결코 만족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그의 생명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요구는 무엇인지 설명하시게 된 것이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완전케 된 율법은 옛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을 훨씬 넘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과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과 '형제에게 극히 작은 부담을 지우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이것을 소극적으로 즉 금도(禁道)의 차원에서 설명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이 서로 뜨겁게 제 몸처럼 사랑하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해 주신 계명은 단 한 가지이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화목하며 서로 연합하라는 것이다. 이 이하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형제가 '서로 싸우고 물고 뜯고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율법이 이런 수준으로 인간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 사람의 죄인 됨 곧 사람의 살인자 됨을 드러내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살인자 됨을 드러내는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만으로도 충분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하는 자이므로 마귀에게 속은 인생도 그 본질상 살인자이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든 안 죽이든 사람의 본성 안에 살인하는 것이 있다. 살인자의 독이 그 속에 들어 온 사람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다만 그럴 필요가 없거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할 따름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극한 분노가 일어나서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충만케 된다면 법의 제재나 기타 옆에 있는 사람의 제재, 양심이나 이성적 판단에 의한 자제력이 없다면 누구든지 살인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는 인생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이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면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은 단지 살인하지 말라는 최저의 요구를 이스라엘에게 계명으로 주셨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은 이같이 낮은 수준의 요구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살인자임을 여실히 드러내 왔다.

주님은 외형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다루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미워하는 것과 살인을 같이 보신다. 사람이 형제에 대해 미워하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할 수만 있다면) 죽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살인은 실제로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그 미움의 감정이 이성적 판단이나 자제력을 넘어섰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형제가 적극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지 않는 것은 그 관계가 어떠한 상태이든지 살인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만족할만한 요구 수준은 단지 살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를 전혀 미워하지 않고 나아가서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수준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화를 낸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가 자기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에게 맞추어 받아들인다면 궁극적으로 자기 외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이 본질상 형제이며 하나임을 느끼게 만들며 따라서 어떤 외형적 차이가 있든 간에 무조건 받아들여서 사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생명을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고 자기에게 맞는 사람만 받아들이려 하거나 그 어떤 다른 기준을 따라 사람을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지만 결국은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미워하고 거절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기에게 맞는 사람이나 좋은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이 아니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실제적 문제가 아니고 사탄에게 속은 생각의 결함 문제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어떤 것도 다 부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종종 본다. 이것은 사물이 실제로 좋으냐 좋지 않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생각이 어떠하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합과 사랑은 생명의 문제이지 육신적 조건 문제가 아니다. 만일 우리 안에 사랑의 생명이 있고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면 어떤 사람도 사랑스럽고 연합할 수 있으며 그의 행위에 대해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생기거나 함으로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일시적으로 화를 낼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형제의 불의를 보고 화를 내며 책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주님조차 때로 화를 내시고 책망하시기도 했지 않은가? 그러나 연약해서 화를 내든지 진리 때문에 화를 내든지 간에 해지기 전에 화를 풀라는 바울의 말(엡4:26,27)처럼 우리는 형제 간에 계속해서 어색하고 거리끼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제와 불화하는 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특히 돈 문제나 송사 문제 등으로 걸린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보다 다른 무엇을 더 귀히 여기는 태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치 않은 태도이다. 사랑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는데 이런 저런 문제도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런 저런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월간 잡지 신동아 2004년 1월호를 보니 강금실 장관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남편과 헤어지게 된 것과 관련한 내용도 있었다.
기자가 그에게 "남편이 남긴 빚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는데,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도 그런 문제가 생기면 헤어지게 되나 보죠?"라고 묻자 강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사랑은 하는데 돈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구요. 그 문제를 겪는 과정에 사랑이 깨져나간 거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거죠. 사랑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죠. (빚을 지운다는 것은) 고통을 주는 거죠. 상대방한테. 내가 깨달은 것은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결혼 전 연애할 때도 사랑과 고통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됐는데, 사랑한다면 고통을 줄 수 없는 거예요. 고통스러울 때는 이미 사랑이 아닌 거예요.”
강 장관은 “아 이게 사랑이 아니구나, 깨달았을 때 이혼을 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가해를 할 수 없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많은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감수한다고 착각하는 거지. 그걸 깨달았어요.”
이 말에 기자가 다시 물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서로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게." 이에 대해 강 장관은 "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 봐요. 고통을 주지 않잖아요. 종교적 사랑이 충만하면 남한테 해도 안 끼치고.”라고 답했다.

강금실 장관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령을 따라 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을 통해서 진리의 일단을 깨닫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보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사랑하는 형제에게 나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부담을 지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섬기거나 그로 인해 사랑의 빚을 지거나 서로 짐을 나누어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 안에는 무례함이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부유한 분이어서 누구에게도 빚을 질 필요가 없다. 그는 누구에게든지 '주는 분'이지 받는 분이 아니며 더욱이 꾸는 분은 아니며 더구나 꾸고 안 갚는 분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이다.

26절에서 말한 호리(狐狸)란 원어로 고드란트인데 이것은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서 앗사리온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놋쇠 동전이다. 이 액수는 오늘날의 일 원 짜리와 같이 작은 액수이지만 주님은 우리와 형제 사이에 이런 것이라도 짐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신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어떤 율법이나 윤리 규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어떤 생명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말씀을 교회 생활이나 형제들 간의 관계, 세상에서의 생활에서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금전 문제에 있어서 극히 철저해야 한다. 돈은 생명이다. 돈을 거저 줍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힘들게 버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은 인생과 시간과 삶과 몸과 땀을 주고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돈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잘못이듯이 남의 돈을 쉽게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우리는 돈을 하나님 사랑과 경쟁시켜서도 안되고 형제 사랑과 분리시켜서도 안된다. 돈은 사람의 귀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자식들은 부모가 주는 돈을 귀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정뿐 아니라 교회나 사회에서도 각 구성원들은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이룬 열매에 대해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에게 아주 작은 짐이라도 지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시면서 맨 첫 부분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완성함으로써 모든 율법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어떻게 함으로써 완성되어지는가? 곧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이다. 이로서 모든 율법이 완성된다.  

주님은 마태복음 특히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 계속 천국은 어떤 곳이며 천국 시민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님은 천국은 {사람이 형제를 받아들이고 마음으로부터 그를 사랑하여 함께 사는 세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 역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까닭으로도 한 생명을 가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공의와 사랑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불의에 대해 분노할 수 있다. 문제는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화를 내는 과정에서 사탄이 틈 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5-27)

문제는 마귀가 틈을 타는 것이며 그로 인해 좋은 것이 죄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분노) 자체는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표현이다. 잘못을 잘못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의 감정 안에는 사탄이 틈 탈 여지가 그리 많지 않지만 분노와 화 냄의 감정 안에는 사탄이 틈 탈 여지가 많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너무 길게 분을 품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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