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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먼저 화해함]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의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형제를 사랑하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살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형제를 욕하거나 멸시할 수도 없고 심지어 미워할 수조차 없으며 또한 형제에게 아주 작은 손해라도 끼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3:5) 무례하다(unbecome, rude)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편의주의(便宜主義)와 이기주의(利己主義)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우리의 생명 안에서는 이런 태도가 나올 수 없다.

내가 형제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르거나 손해를 끼침으로써 형제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문제를 풀어서 형제를 안식케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요청함으로써 문제를 끝내려고 하는 태도는 사랑이 아니라 편의주의와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죽은 행동이다. 하나님은 이런 행동을 수용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에 우선한다. 그러므로 혹 사람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보여지듯이 하나님은 종종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과 화목할 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과 불화하면 하나님과도 화목할 수 없는 경험을 종종 한다. 사람과의 문제 처리를 소홀히 하면 아무리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 문제를 다 처리했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론으로 무마할 수 없는 것이다.

형제와 송사를 벌이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형제의 억울함을 듣는 형제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며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처리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만 범한 죄라면 사람과 문제를 처리할 일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당사자가 있는 문제라면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용서를 비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먼저 우리가 손해를 입힌 상대방을 찾아가서 갚을 것은 갚고 용서를 빌 것은 빌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형제의 억울함과 그로 인한 호소가 하늘에 닿고 있다면 공의의 하나님이 덮어놓고 우리를 받으실 수 없으며 결코 일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이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저질러놓고는 나에게는 한 마디도 없이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를 빌고 난 후 '나는 이제 죄를 사함 받았다, 나는 아무 문제도 없다' 하고 문제를 끝내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의 행위를 인정할 수 있겠으며 그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피해 당사자와의 관계 개선 및 화해 없이 하나님과만 일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실한 자기 부인과 진실한 사죄로 인도하며 진실한 믿음으로 인도한다.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아니하고 형제의 이익을 구한다. 그리고 형제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음은 물론이고 형제가 행복하고 평안할 수 있도록 내 것을 내 주며 희생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진실한 믿음의 세계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도 사랑하고 형제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하나님이 나도 살게 하고 형제도 살게 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내가 잘못을 하면 나는 죽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죄인도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아들을 보내어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것을 우리가 알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아들을 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왜 이 말을 하는가? 우리가 형제에게 잘못을 했을 때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여 문제를 끝내지 않고 일일이 상대방을 찾아서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일이 빚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갚는 식으로 산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나겠으며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의심이 우리에게 있을까 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들의 생명이 없는 자에게는 수고하고 무거운 율법 짐이 될 것이다.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는 문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는 자에게는 순종하기 어려운 무거운 계명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에 그대로 순종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의 영광의 세계로 속히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또한 믿음은 빌린 자가 빌려준 자에게 갚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그의 생명에, 그의 영에 순종하여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줄 것을 주고 갚을 것을 갚는 자에게 죽지 않고 살도록 그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우리 일생은 이것을 체험하는 일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간음 또는 음행이라는 것은 부부가 아닌 사람이 성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단지 남편이 남의 부인 또는 다른 여성과 성적 관계를 갖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가정 질서를 넘어서는 모든 행위가 다 간음이고 음행이다. 즉 여기에게는 결혼을 하지 않은 남녀가 성적으로 연합하는 것, 가정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는 결합하지 않더라도 이성(異性) 간의 교제 차원에서 사귀는 것 등이 다 포함된다.

간음은 왜 하는가? '하고 싶으니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간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사람 자신도 알지 못하는 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없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는가? 아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결국 다른 것과 연합하며 하나님 아닌 것과 동거하는 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네가 만일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사탄과 같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귀찮은 간섭 없이 너 혼자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며 네가 하나님의 종 자리에서 벗어나 주권자가 될 것이다" 라고 속삭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는 고독과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여 사탄과 결합하였고 그의 종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간음의 배경이 단순한 육체의 욕망이 아니라 사탄의 거짓말(속임수, 독)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간음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육체의 욕구이다. 육체의 성적 욕구이다. 그러나 그 욕구는 정당한 욕구를 넘어선 지나침이다. 사탄의 속임수는 언제나 사이비(似而非)다. 비슷한데 조금 모자라거나 조금 지나치는 것이다. 간음은 성적 욕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 성적 욕구는 잘못된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육과 번식을 위해 육체에 심으신 정상적인 욕구이다. 인간의 성적 결합은 생명의 신비이다. 하나님이 사람 혼자가 아니라 둘의 연합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도록 정해놓으신 것은 하나님이 연합을 기뻐하시며 사람은 홀로 살 수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홀로 살 수 없으며 생명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상 연합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누구와 연합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사탄과 연합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참된 반려자와 연합하는 것 아니면 악한 반려자와 연합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이 없으면 세상 친구들과 썩어질 것을 추구하며 함께 술이라도 퍼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이다. 부부간의 사랑 안에서의 연합이 아니라면 음녀와 간음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좋은 친구와 사귀지 않으면 나쁜 친구하고라도 사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자기와 연합하게 하며 자기에게 붙들어두려고 한다. 이 연합은 간음과 음행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결국은 언제나 성적 문란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철학 문제로 사상 문제로 출발한 사람도 그 결국은 음행이고 처음에는 도덕 문제로 선행 문제로 출발한 사람도 나중에는 결국 음행으로 끝나는 것을 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처음 문제는 불순종이고 믿음 없음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보나 그 이후 가나안 정복과 정착 생활을 보나 결국의 문제는 언제나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귀착되었다. 왜 그런가? 사탄이 거기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의도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내어 자기와 결합시키며 자기의 무질서, 살인, 파괴, 거짓말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며 거기 고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처음에는 단지 하나님을 떠나도록 부추기지만 일단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결국에는 그와의 철저한 연합에 이르도록 (사탄과 하나가 되도록) 철저히 파멸시키는 것이다.

사탄과의 철저한 연합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먼저 사탄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탄의 세계는 거짓말과 살인과 폭력과 술수와 음행과 우상 숭배의 세계이다.(계21:8) 사람을 처음부터 이런 세계로 오라고 하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처음에는 이런 것을 철저히 숨기고 단지 '선을 추구하자'(도덕), '진리를 추구하자'(철학), '아름다움을 추구하자'(예술, 탐미), '공평하고 행복한 사회를 추구하자'(정의)는 식으로 사람을 꼬셔서 일단 사람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는 일에 주력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본격적인 자기의 세계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보다 큰 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의 시험을 이기기 어려우며 심지어 그의 술수를 알아차리기조차 어렵다. 간음과 우상 숭배는 사탄이 사람을 데리고 가는 종착지이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을 완전한 그의 종으로 굳히는 자리이다. 그러나 간음과 우상 숭배는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다. 많은 간음과 우상 숭배가 죄 또는 사탄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죄 의식 없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많은 선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간음은 결국 사람을 사탄과의 연합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본인이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탐심이다. 우리는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不淨)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 이 네 단어는 다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음행(간음)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탐심과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했는가? 그것은 탐심이 간음과 우상 숭배의 원인이고 통로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여자를 탐하는 마음이 간음을 가져오고 재물과 육체의 형통을 탐하는 마음이 우상 숭배를 가져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우리는 간음과 우상 숭배가 다 같이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 헛된 탐욕을 품은 것을 밖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탐심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간음과 우상 숭배인 것이다.

그렇다면 간음과 우상 숭배는 어떤 관계인가? 간음은 우상 숭배의 육체적 표현이다. 우상 숭배는 간음의 종교적 표현이다. 둘은 하나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잘못 연합된 것이 우상 숭배이고 간음이다. 우상 숭배는 결과적으로 (알든 모르든) 사탄을 숭배하는 것이다. 사탄은 그를 숭배하는 자들을 꼭 간음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우상을 숭배하던 고대 사회의 많은 종교적 의식에 음행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렘13:27, 겔16:16-21)) 성경에 나오는 미동(美童)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간음(성행위를 통해 신을 자극하여 복과 재물을 구하는 행위)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6)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음행을 특히 싫어하신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이 간음이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사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창하던 도시 소돔과 고모라, 봄베이를 비롯한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의 여러 도시들이 다 무엇으로 망했는가? 바로 음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한 것이다. 이런 심판들은 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간음의 의미와 그 배경에 있는 사탄의 책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다면 간음치 말 것을 종용하셨다.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과 연합하느냐 다른 것(사탄)과 연합하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면 관계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윤리 도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다른 신과 연합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정해 주신 아내(남편) 외에 다른 사람과 연합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참으로 간음 문제는 생명 문제이고 믿음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단지 행위로서 간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속에서부터 사탄의 거짓말과 그로 인한 거짓 연합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단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에 해당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 마음의 생각이 기회를 타서 행동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않으려면 간음의 마음이 없어야 하고 간음의 마음이 없으려면 간음하지 않아도 되는 생명을 가져야 한다. 배고픈 사람에게 단지 훔쳐먹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효과가 없으며 그것은 죄를 제거하는 주님의 방법이 아니다. 주님은 간음하는 여인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훈계하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간음할 필요가 없도록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주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간음하면 안된다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이방 나라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간음과 같은 성적 범죄로 만연되어 있었다. 왜 그런가? 가르침과 징계가 없어서 그랬는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서 즉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니 외롭고 공허하고 허전한 것이다. 혼자 있어도 허전하고 결혼을 해도 만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라도 간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직 당신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곧 아들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이다. 그들에게는 간음이 합당치 않으며 필요치 않으며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간음을 하거나 다른 여자를 탐한다면 그는 단지 속은 것이며 착각한 것이다. 이는 마치 방금 잔뜩 먹어서 배가 부른 사람이 밥을 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사람을 속인다. 그리고 아무도 속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속임수에도 사람은 종종 속아 넘어간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런 사람들이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 성령님도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종종 일깨우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은 대체로 '결혼한 남녀의 성적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꼭 그것만 간음이 아니고 정상적인 결 생활의 범위를 벗어난 모든 성적 관계는 다 간음이다. 요즘 유행하는 바와 같이 부부 아닌 사람이 애인으로 지내거나 결혼 전의 남녀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 등은 명백한 간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간음은 다 건전한 가정생활과 사회 질서를 파괴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린다. 하나님께서 간음을 엄금하신 것은 하나님이 제정해 놓으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사회 질서의 근본은 가정 질서이며 가정 질서의 근본은 부부 관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1-4)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자라면 어떤 경우에도 가정 질서와 교회 질서, 그리고 국가 질서를 포함한 어떤 질서도 흔들거나 파괴해서는 안된다. 실제적 간음은 물론이고 마음으로라도 음란한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정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실 남녀간에 서로 끌리는 본성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부부 관계를 제외하고는 남녀간의 결합을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진정한 삶, 참된 사랑과 행복은 반드시 생명의 질서 안에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며 결합하고 싶으면 반드시 정당하게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만 하거나 성적 관계만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의 결과는 사탄의 살인과 파멸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한 남녀는 각기 자기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며 그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남녀간에 (결혼을 통하여) 얼마든지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굳이 간음을 하고 음욕을 품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생각과 욕구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왜곡되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상이라면 영이 육을 지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욕구(하나님의 말씀)가 사탄의 충동을 받은 육체의 그릇된 욕구를 이기고 몸의 거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음행을 하는 사람은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남편은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짝지어 주신 아내가 가장 사랑스럽고 만족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간음하지 않고 음욕을 품지 않으려면 단지 결심만 가지고는 안되고 반드시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영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같다. 남녀간의 문제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영역에 포함된다. 감정대로 사는 사람, 다만 지식과 교훈만 있는 사람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오직 영을 좇아 사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남녀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를 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 믿음(성령님)은 우리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호와께서 거기에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편)라는 찬송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완성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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