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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해롭게 하거나 귀찮게 만드는 사람 곧 싫은 사람과 반갑지 않은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육신의 삶은 육신과 돈(물질)과 시간으로 구성되고 유지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돈을 갖다 주고 시간을 갖다 준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우리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고 시간을 빼앗아 가며 우리를 때린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다. 돈을 갖다 준다는 것은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니까 우리 삶(생명)에 기여하는 것이고, 시간을 갖다 준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을 남이 대신해 주는 것이니까 내 삶에 여유를 갖다 주는 것이며 내 삶(생명)에 기여하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안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누가 우리 일을 대신해 주며 누가 우리에게 돈을 듬뿍 갖다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두 가지 이유로 우리는 이런 환경을 기대할 수 없다.
첫째는 세상에는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돕고자 하는 사람보다는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처에서 우리를 위해주는 반갑고 사랑할만한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인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우리가 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 상황을 만들어 줄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희생과 수고를 하지 않고 남의 수고와 희생 위에서 안식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육신이 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생의 필요에 대해 하나님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쉬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불러서 그 안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의 능력과 여유로 세상을 섬기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섬겨주는 사람을 만나기 보다 섬겨야 할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주님은 우리가 만나게 될 두 가지 형태의 반갑지 않은 상황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첫째는 육체적 강압이고 둘째는 물질적 시간적 강압이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라는 말씀은 육체적 강압에 대한 말씀이고,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은 물질적 시간적 강압에 대한 말씀이다.

이런 강압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주님은 두 가지 원리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 중에 이 두 말씀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최고의 인내,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그리스도인)의 인내의 특징은 처음 강압만 참는 것이 아니라 다음 강압까지 대비하여 여유롭게 참는 것이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무저항주의가 아니라 억울하게 강압을 받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제공하는 것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생명의 여유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큰 힘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은 바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여유롭게 받아들여서 인내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뿐이고 시간과 돈도 제한된 것인데 그것을 내 필요가 아니라 상대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여유로운가!

그러나 이런 여유, 이런 힘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지 사람에게는 없다.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고 돈이 없고 몸이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이런 희생과 인내를 감당할 수 없다. 오직 몸이 두 개 이상이고 목숨이 두 개 이상이고 돈이 무한정 많은 사람만 이렇게 할 수 있다. 바로 천국에 줄을 대고 있는 사람, 영생이 있는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무한정 공급 받는 사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남이 하자는 대로 다 해주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죽음)를 요구하는 말씀이요 믿음(그리스도 안에 있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행함을 요구하는 말씀이기 이전에 주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가 어떤 마음과 생명을 가졌는가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여유롭고 넉넉한 분이므로 그 안에 거하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부당하게 남에 의해 재산상의 손해 또는 억지 요구를 받게 될 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심을 믿고 소극적이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는 주님과 같이 남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어야 할 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자일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줄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나 어떤 행동, 어떤 행위이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느냐 육신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다. 강압을 당할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 즉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까지 돌려대거나 속을 요구받을 때 겉옷까지 벗어주거나 오리를 요구받을 때 십리를 같이 가주는 것은 내적 생명의 자연 발생적 표현이어야지 결코 의무에 따른 억지나 위선이어서는 안된다.

왜 우리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하나님의 어린 양 됨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며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전혀 억지로서가 아니고 기쁨과 여유로서 다른 사람의 모든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음(自意性)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행동들은 크든지 작든지 다 사랑의 생명이 있어야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화를 낸다면 또는 겉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속으로 상대를 미워하고 있다면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를 축복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에는 애정적(육체적)인 사랑, 존경의 사랑, 친절적(교양적) 사랑, 자비적(긍휼적) 사랑, 이기적 사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 곧 하나님의 자비적 사랑에 바탕을 둔 사랑이어야 한다.

자비적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사랑하신 사랑이며 조건이나 까닭 없이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모든 다른 사랑은 이 바탕 위에 서야 한다. 이런 사랑을 베풀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온갖 교리를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한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다. 온전한 사랑은 공의와 같이 간다. 즉 공의에서 나온 사랑만이 참 사랑이다. 이것은 곧 '차별 없는 사랑'을 말한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의 義나 능력이나 지혜나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온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며 차별 없이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자리에서 가족과 형제를 위하고 더 나아가 나와 무관한 사람들까지 위하고 더 나아가 악한 자들이나 나를 해롭게 하는 원수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다. 육신은 이런 사랑을 할 수 없다. 이 온전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범사에 우리가 이 아들의 생명으로 살라는 것이며 범사에 바로 이 사랑의 생명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이제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 들어가 보자.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억지로 무엇을 달라고 하거나 빼앗으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은 대항하지 말라고 하신다.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싸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가 하자는 대로 해 주어야 한다. 물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이지만...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선악을 따져서든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든 사람과 싸우고 대항하는 성질(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사람과 싸우거나 시비하는 생명이 아니고 아버지의 사랑과 여유로 사람을 넉넉히 상대할 생명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에게 와서 까닭 없이 도와달라고 할 때 우리는 나발이 다윗에게 한 것처럼 "당신이 누군데 내게 와서 그런 말을 하시오? 나에게 뭐 맡겨 놓은 것이 있소?" 하고 거절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상식선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며 보존하고 아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상식선이란 무엇인가?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사는 사람의 최선이다. 육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구하는 자에게 정중하게 "내 마음이야 주고 싶지만 형편이 안됩니다. 그러니 다음에 봅시다" 하고 조용히 돌려보내는 것이다.

인간적 상식으로 말하면 나발은 다윗 일행의 암묵적 도움을 받았으므로 다윗을 어느 정도 도와주는 것이 좋았지만 그래도 반드시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와주지 않은 것이 인색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죽을 죄나 치명적인 잘못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죽이셨다. 그는 반드시 다윗을 도왔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다윗을 도우지 않은 것은 단지 인색하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한 범죄행위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곳이 아니고 인간 상식만으로 살아도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주목되어져야 하고 통용되어져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반드시 도왔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식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것은 내가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발도 하나님이나 다윗에게 할 말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그의 삶을 끝내시고 말았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상식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선악적 판단을 따라 살거나 육신의 기호에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 법과 상식과 시비는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가 상대방에게 그가 요구하는 대로 해 주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어떠하며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으면 마음이 있더라도 줄 수 없고 마음이 없으면 돈이 있어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돈이 있어서 마음은 없지만 상대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오직 생명을 따라서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여유를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 대항하는 것은 불법적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불의가 아니라 정당한 것이지만 적어도 그것은 생명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육신적이며 옛 성질을 따른 것이지 영의 인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상대방을 다루고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되살아 역사하는 옛 성질, 곧 육신적 自我를 다루고 제어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반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억울하게 여기며 통탄스럽게 생각할 것은 우리에게 부당하게 억지를 쓰는 상대방이 아니라 사탄이 죽은 우리 옛 사람을 도로 살리고 부추기고 흔들어서 우리로 매사에 선악을 따지게 하고 억울함을 느끼게 만들며 혈기를 내게 만들고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지음 받은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사탄과 거기 속는 우리 자신이다.

상대방이 내게 양말을 달라고 했다면 내가 화가 안 났을 텐데 속옷을 달라고 했으므로 화가 났다면 문제는 속옷이나 양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성질의 문제인 동시에 생명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이다. 생명이란 자신의 존재를 말한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존엄성과 소중함과 고귀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 하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궁극적으로 다치거나 죽거나 감소되거나 손해 보지 않는다. 일시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로 귀착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9) 이것이 우리 생명의 존귀함에 따른 우리의 미래이다. 그리고 이것을 확신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면 우리가 헐벗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이며 사탄이 주는 염려와 두려움이다. 이기적이고 악한 인간은 까다롭고 강한 사람에게는 가까이하지도 않지만 사람 좋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요구하고 덤벼들어서 그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까지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탄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사탄만 있고 악한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또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그 생명대로 그 영광의 광채를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 인생을 보호받으며 간섭받는다. 나는 시비나 선악 간의 판단 없이 그저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삶에 간섭하셔서 어떤 사람이 나를 해롭게 만들 정도로 한 없이 내게 와서 무엇을 달라고 하지 못하게 하실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나서는 상황을 만들어내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가 그 생명으로 행하느냐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다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과 운명과 미래를 우리 것으로 누리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을 수 있겠으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누가 하나님의 자녀를 죽거나 망하도록 곤고하게 만들거나 손해를 끼치며 곤경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분노하고 성질을 내고 방어를 하고 다투고 싸우며 복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상대방과 나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기초하는 것이다. 내가 싸워서 방어하고 내가 싸워서 획득하고 내가 싸워서 확보하지 않으면 나의 미래는 없으며 내게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여유를 가지고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불신앙이다. 입으로야 무엇을 말하며, 지식으로야 무엇을 생각하든지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신의 능력과 행위만 믿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물질이나 시간에 대해서 되는 대로 사용하거나 분별 없이 어리석게 대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물질이 귀한 줄 알며 그 이상으로 우리의 시간이 귀한 줄 안다. 돈과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며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나오는 용어를 빌자면 그것은 불의한 재물 곧 남의 것이다. 이 남의 것을 우리가 어찌 함부로 쓰며 갖다 버리다시피 누가 요구한다고 해서 마구 주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시간이나 돈을 되는 대로 써도 된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만 우리의 삶이 거기에 매여 있거나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으로 살고 시간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즉 돈(물질과 건강...)에서 생명(삶)이 나오고 시간(시간이 많고 기회가 많음)에서 생명(삶)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경우는 도리어 우리 안에 있는, 위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급)이 돈과 시간(인생)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돈을 가져가고 시간을 축낸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축나고 거덜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 돈을 우리에게 갖다 주고 (복권에 당첨되거나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버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많은 시간(기회, 일)을 준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빛나고 풍부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풍부하고 부유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구약은 공의에 기초하고 신약은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의는 하나님의 생명의 중요한 특성이지만 그것은 결코 전부가 아니고 일부분이며 기본적인 특성이다. 하나님의 더 큰 특성은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의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근본이고 기초이다. 왜냐하면 공의가 없이는 사랑은 전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의는 약자를 강자와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장하고 담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근본이다. 이것이 안되면 사랑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의는 사랑의 소극적 측면이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주로 말씀하신 것은 의롭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 정도 이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은 사랑하고 미움 받을 만한 사람 곧 잘못하는 사람이나 원수는 미워해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허용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의 실상을 드러내시게 되었다. 그것은 자비와 긍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오직 이 생명을 따라 사람을 대하며 이 생명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적인 기호가 그것을 허용하거나 법과 체면에 의해서거나 우리의 선악간의 판단과 계산을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런 생명이고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만족은 우리 육신의 상황으로 인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생명이 만족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됐다고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리 이기고 이익을 얻었고 속 시원하게 한 바탕 쏘아주었다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한다.

아들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사는 것과 같다. 날마다 생명을 따라 사는 삶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과 같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이웃을 주시면 우리는 "하나님 이렇게 좋은 이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찬양하며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아주 좋은 사람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만을 주시지 않는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않은 죄인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사람을 두고 싶어도 그런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두실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우리를 다루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육신의 좋은 모양을 나타내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곁에는 좋지 않은 사람들이 배치될 것이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사람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이때 우리가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연적인 생명, 육신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선하고 흠이 없는 사람보다 허물투성이의 죄인들을 더 사랑하셨다. 적어도 똑 같이 사랑하셨다. 바로 그 주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우리로 그 길을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결국 주님을 따르는 우리 삶이 한편으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삶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마음으로 음욕을 품지 말라는 계명, 이혼하지 말라는 한 계명만 해도 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만다. 하물며 악한 자를 도무지 대항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르면 나무에 매달리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정없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가르치거나 권면하거나 설득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3-45)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똑 같이 비추시며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똑 같이 비를 내리시니 우리도 좋은 이웃과 좋지 않은 이웃(원수)을 똑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6-48)
무슨 상이 있겠느냐 하는 말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는 말과 같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마귀의 종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마음과 성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그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하나님의 행실을 나타낼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곧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육신이 죽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면 우리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 아버지의 성질대로 산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사람은 벌써 틀린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사는 자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결국 온전함이 없을 것이다. 선악과 상식과 의지를 따라 일을 하는 사람은 결국 언젠가는 한계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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