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산상보훈의 성격 재고(再考)]

마태복음 5:17-48에 주님은 우리의 외적 행위를 다루지 않고 오직 생명을 다루신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성질과 정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생명을 놔두고 산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수행하신다. 첫째는 우리의 죽은 생명을 드러내신다. 우리 옛 사람의 죽은 실상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모든 자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만다. 산상보훈은 우리에게 먼저 절망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합당한 요구 앞에 설 때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고 죽기에나 딱 맞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는 필수적이며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주님이 사람의 정상적이고 완전한 세계를 이렇게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정상이며 꽤 쓸만하고 괜찮은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대충 살아도 되는 존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자기 기준에 따라 적당히 선하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해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듣는 모든 자들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거기에 부합할 수 있는 육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죽은 생명을 드러내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안에서 지금 역사하는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의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보라.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마치 당연한 듯이 하나님 아들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 주님은 다만 사람들에게 저주와 정죄와 절망을 가져다 주기 위해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즉 다만 하나님 앞에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 곧 자기 안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들을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들로 보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주님의 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조차 주님 앞에서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죽은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 엄청난 말을 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기에 합당한 사람인가? 특별하고 위대한 사람인가? 전혀 그렇지 않고 오직 주님 앞에 모인 그 사람들, 즉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그 사람들이다. 문자 그대로 다만 주님을 '따르는'(믿는) 그들이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들(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들 안에 부으신 생명이 완전하고 거룩한 생명 곧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면 주님의 모든 요구들은 헛되고 무의미한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이상을 말씀하시거나 천사들 안에서나 가능한 일을 말씀하시거나 미래의 완전한 세계에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사람이신) 자기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요 또한 자기에게 붙어 있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지하고 무력한 백성들에게 단지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말씀들을 쏟아낼 수 있으며 그런 삶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현재 실제가 아니라 사람의 영원한 실제이다. 사람의 영원한 실제는 그 속에서 역사하는 생명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속의 생명)을 따라 보신다. 그런 점에서 주님을 진실로 따르는 무리들 곧 하나님이 아들의 소원대로 부르신 자들은 결국 주님의 모든 말씀들을 받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아들의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는 것은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외적 모습뿐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 속에 역사하는 아들의 생명 곧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영의 영원한 능력이다. 아들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의 청중들이 비록 주님의 부름을 막 받아서 겨우 제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들의 현재 모습은 거의 하나님의 아들답지 못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에게 시간을 초월하여 대하셨고 그들의 생명에 합당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주님의 눈은 언제나 사람의 실패와 무능을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기는 생명을 본다. 주님은 희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눈에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보였고 또한 그들의 최후 영광이 보였다.

참으로 주님은 사람을 오직 생명으로만 보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 생명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주님은 십자가에서 구속을 이루시기 전이었고 성령도 오시기 전이었고 사람들은 멍청하고 아무 소망도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거듭난 자로 보셨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간주하시며 그들의 운명과 삶과 능력에 대해 그 엄청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이 (방금) 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 하나에 기초한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는 시간 개념이 없다. 그의 구원은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과 순서에 매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명은 자라는 것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영원하며 따라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명은 땅에 있는 동안에 육체가 시간을 두고 자라는 것처럼 과정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자라며 온전케 된다. 생명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실제로 누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시간과 체험의 정도를 따라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말하면 산상보훈의 말씀들 특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불가능한 이상을 제시한 말씀도 아니고 단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주어진 말씀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하든지 그렇게 하도록 애쓰라고 하신 말씀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큰 역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이 어떤 부름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따라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어떤 영광과 승리를 계획하고 계신지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원칙은 언제나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사람은 다만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사람이 할 일은 참으로 다만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따라간다는 것이 결코 관념적이지 않고 매우 실제적이고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실체는 첫째, 옛 사람의 죽음이고, 둘째, 새 사람의 누림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주님 안에서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거친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거친다는 것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을 거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의 이기는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어떤 선한 부자 청년이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잘 따랐다(믿었다)고 주님께 말하는 것이 나온다. 그 말을 들은 주님은 그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다. 이것은 그 사람이 그동안 실제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랐다면 자기 것을 버리고(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이 사람에게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항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버리라는 요구)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추종이란 있을 수 없다. 자신과 하나님이 동시에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이 되면 하나님의 세계는 실현할 수 없다. 내 생명이 왕노릇하면 산상보훈의 세계는 요원하다.

물론 여기 있는 우리 중에는 아무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주장하고자 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 주님을 따라가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먼저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 자기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절망해 보지 않고, 포기해 보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 있는 자리, 자기에게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그 역사를 참으로 의지하는 것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이유]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목표이다. 누구를 겨냥하고 누구를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겨냥하고 행동한다면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고 사람은 눈에 보이니 보이는 사람 쪽으로 행동이 기울 수밖에 없다.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은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바로 그의 유일한 보상이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행동의 유일한 보상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외형에 주의하는 것은 사람의 눈이 속의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 드러나는 외형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속을 보시며 생명을 보신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주님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믿음 없음에 있음을 아셨다.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은 주님의 외모가 영광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의 눈이 없었고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사람의 영광만 구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39-44)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2,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주님 자신은 어떠했는가?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2:23-25)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7:18)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8:50)

땅에서 난 자는 스스로 영광을 구하나 하늘로부터 난 자는 스스로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아버지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요8:54)

문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영광이 헛되고 거짓된 영광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4:8) 사람의 영광은 마귀가 보여주고자 한 세상 영광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영광이고 무너질 영광이며 작은 영광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이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을 구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도 오랫 동안 헛된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2-27)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결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이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이 영광을 구하지 않고 헛된 것들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이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가게 될 것이니 헛물켜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광 곧 주님의 영광만이 우리의 영광이다. 그것만이 우리 것이며 다른 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합당치 않은 거짓 영광이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 주님이 주신 것 외의 다른 영광은 사탄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주님의 약속의 세계, 아들의 생명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권세를 생각하지 않았고 세상의 작은 영광, 사람으로 말미암는 영광을 생각했다. 이것이 시험이고 부끄러운 것이다.

마가복음 10:37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께 와서 한 말을 보면 사탄의 시험이 얼마나 교묘한지 알 수 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주의 영광을 보기 원하며 주의 영광에 참여하기 원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자기들을 남(다른 사도들)보다 높은 위치에 앉혀달라고 부탁한다.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는다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를 높임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영광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의 영광은 섬김을 받고 우러러 봄을 받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쳐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6-28)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9:35)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제자들이 이렇게 자기에게 걸맞지 않은 인간적이고 거짓된 영광을 구하면 구할수록 그들은 더욱 영광스럽지 못하고 비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31-34)

베드로에게 한 것처럼 사탄은 오늘도 날마다 주님께 우리를 청구한다. 지옥으로 같이 가도록 자기에게 내어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탄은 우리에게 무슨 거짓말을 하며 무슨 시험을 하는가? 그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 한쪽에 형제 위에 나를 높여서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생각을 넣는 것이다. 형제의 발도 못 씻는데 어떻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 이것이 바로 거짓말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거짓말이 아니고 사탄이 사람에게 심은 것이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바로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만 알지 자기 안에 있는 사탄의 교활하고 교묘한 거짓말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영광 곧 주님의 영광,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도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정욕을 추구한 것이 아니고) 의를 행하는 것이므로 힘든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며 육신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육신의 욕망을 부인하고 영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그 자리에서도 사탄은 도로 육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만드니 이것이 바로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사람을 청구하는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1) (마6:19-33) / 2004. 5. 16 이상봉 2010.04.30 4129
58 삶을 바로 보는 눈 (마6:19-34) / 2004. 5. 9 이상봉 2010.04.30 4198
57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4) (마6:11-15) / 2004. 5. 2 이상봉 2010.04.30 3548
56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3) (마6:11-15) / 2004. 4. 25 이상봉 2010.04.30 3646
55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2) (마6:9-13) / 2004. 4. 18 이상봉 2010.04.30 3487
54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1) (마6:9-13) / 2004. 4. 11 이상봉 2010.04.30 3706
53 기도 (3) (마6:9-13) / 2004. 4. 4 이상봉 2010.04.30 3536
52 기도 (2) (마6:5-13) / 2004. 3. 28 이상봉 2010.04.29 3495
51 기도 (1) (마6:5-13) / 2004. 3. 21 이상봉 2010.04.29 3911
50 외식하지 않음 (2) (마6:1-8) / 2004. 3. 14 이상봉 2010.04.29 4169
» 외식하지 않음 (1) (마6:1-6) / 2004. 3. 7 이상봉 2010.04.29 3512
48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삶 (마5:38-48) 2004. 2. 29 이상봉 2010.04.29 3537
47 맹세하지 말라 (마5:33-37) / 2004. 2. 22 이상봉 2010.04.29 5170
46 간음하지 말라 (2) (마5:27-32) / 2004. 2. 15 이상봉 2010.04.29 3822
45 간음하지 말라 (1) (마5:23-32) / 2004. 2. 8 이상봉 2010.04.29 3564
44 살인하지 말라 (마5:21-26) / 2004. 2. 1 이상봉 2010.04.29 3799
43 율법을 완전케 함 (2) (마5:17-20) / 2004. 1. 25 이상봉 2010.04.29 3527
42 율법을 완전케 함 (1) (마5:17-20) / 2004. 1. 18 이상봉 2010.04.29 4048
41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 (마5:14-16) / 2004. 1. 11 이상봉 2010.04.29 3803
40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 (마5:13) / 2004. 1. 4 이상봉 2010.04.29 3623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