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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는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지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5장에서 언급된 것은 미워하는 마음(살인)과 음란한 마음(간음), 거짓되고 과장된 말을 하는 마음과 받은 만큼 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이것들은 다 육체의 본성 곧 육체의 왜곡된 정욕에서 나오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은 사람이 동물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은 결국 사람의 동물적 욕망, 동물적 성질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보다 앞서고 의지보다 앞선다. 많은 죄가 바로 이 육체의 동물적 본능이 조절되지 못한 데서 나온다. 동물적 본능의 기초는 '생존 본능'이다. 살려고 하는 것이다. 살자니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종족을 보존하자니 (이것도 생존 본능이다) 성적 결합을 해야 하고, 살자니 나에게 이로운 사람은 좋아하고 해로운 사람은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간음은 이러한 본능의 파생물이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성적 욕구를 사람 안에 두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왜 있겠는가? 또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허풍을 떠는 것 역시 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타락하여 영이 죽음으로써 이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의 종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정욕대로 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죄와 악이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면 그 죄와 악은 다 사람의 동물적 본능 안에서 나온 것이다. 생존은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 생명을 공급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방향이 이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육신(사람)에게는 이러한 '정욕(동물적 욕망)' 외에 또 다른 본성(본능,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는 본성이다. 여기서 명예욕과 권력욕이 나온다. 동물적 욕망이 통제되지 못하고 지나침으로써 정욕이 된 것처럼 이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도 잘못되었다. 우리는 종종 육신에 속한 사람, 옛 사람을 가리켜 자아(自我)라는 말을 쓴다. 사람을 자아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할 사람이 홀로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고 나대로 있어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다. 자아의 특징은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독립(獨立)적이고 자존(自尊)적이며 교만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에서 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self-lover) 돈을 사랑하며 자긍(自矜)하며(boastful) 교만하며(arrogant)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自高)하며(conceited)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1-4)

말세란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죄악된 본성이 극도로 증폭되고 표현되는 환경을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정욕과 명예욕이므로 말세에는 이것이 현저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말세의 현저한 현상은 자기 사랑 곧 교만과 자존(자기를 높이는 것) 그리고 쾌락 사랑과 그에 필요한 물질 사랑이다.

사람이 정욕 이상으로 추구하는 것이 명예와 권력이다. 밥만 먹을 만 하면 다음에 바로 추구하는 것이 이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사람들 위에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정욕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 육체의 왜곡된 욕망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의를 자랑하고 사람들 앞에서 외식(위선)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음으로써 자기 안에 아무 영광이나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타락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하나님(아버지)이 없고 영이 없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없고 (하나님의 생명에 연동하는) 영이 죽으면 인생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육체의 본성적 욕망을 따라 이것도 추구하고 저것도 추구하며 방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마치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거나 모래 위에 디디고 있는 사람처럼 그 인생에 무언가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생이 항상 공허하고 허전하고 외롭고 배고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과 영광을 받기를 원하며 '너 잘났다', '네 존재와 삶은 의미가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라는 말을 그렇게 들으려고 안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 아들로 회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외식할 필요가 없고 아무 헛된 일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참 불쌍하다. 세상의 소망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이라도 없으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이것도 가지지 마라 저것도 가지지 마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들은 너무나 공허하고 배고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가져도 소용없다. 그것이 그들에게 궁극적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져도 만족이 안되고 안 가져도 만족이 안되는 불쌍한 존재이다. 왜 사람은 이것 저것을 채워도 여전히 배가 고픈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따라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이 되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으면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난 금요일(3월 12일)에 일어난 일로 인해 요 몇 일 동안 온 세상이 시끄럽게 된 것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의 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일 말이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이 일은 상당히 무리하고 이상한 일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무리하다는 것은 별 탄핵 사유가 안되는 일로 대통령을 억지로 탄핵했기 때문이고, 이상하다는 것은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리한 일을 강행했을까 하는 것 때문이다.

왜 그런 무리한 일을 왜 했을까? 야당도 그렇고 노대통령도 그렇지, 다 조금씩 참고 조금씩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극한까지 가고 파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러나 결국은 다 필요하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으면 안하지 왜 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 한 것이다. 밖에서 보는 사람이야 어떻든지 자신들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은 자기대로 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다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정치를 한 사람들이 상식이 없고 판단력이 없겠는가? 사람이 상식과 체면과 윤리를 쓸 수 있는 것은 다 살만한 때요 (생명의) 여유가 있을 때지 죽을 자리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은 다 소용없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한계이고 동물의 한계이다.

오직 영으로 살고 하나님(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여유)으로 사는 자만이 육신의 한계(사망 권세)를 넘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 그 앞에 걸리고 만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살지 않고 자신으로 살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선) 그 자리에 설 때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체면과 상식은 다 살고 난 다음에 찾는 것이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무슨 여유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는데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인생은 뻔히 알고서도 죽는 길을 갈 수밖에 없고 뻔히 알고서도 생명이 안되고 양식이 안되는 헛된 것들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영광을 구해야 한다. 무슨 영광이 참된 영광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이 바로 인생의 참된 영광이다. 이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영광스럽게 높여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다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영광스럽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영광스럽지 않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는데 인생이 스스로 좋게 여기며 추구하는 것은 다 사람의 참된 영광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9)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눅12:2)

이 말씀은 참된 영광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솔로몬의 영광은 아마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귀와 권세, 지식과 명예, 그 모든 것을 솔로몬은 다 가졌다. 그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며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회와 모든 영광을 다 누렸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솔로몬의 영광도 꽃 한 송이의 영광만 못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누린 영광은 사람이 만든 영광이고 꽃의 영광은 하나님이 만든 영광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영광, 손으로 만든 영광은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며 아무리 추구해도 끝이 없고 만족이 없는 헛된 영광이다. 아무리 거창하고 아무리 화려해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같지 못하다. 꽃의 영광은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사람이 감히 재현할 수 없는 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것은 꾸밀 필요가 없고 억지로 자기를 나타낼 필요가 없다. 꽃은 화장을 하지 않으며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충분히 향기롭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지고 있다. 사람도 그러하다. 사람도 꽃과 같은 피조물이 아닌가? 사람은 꽃보다 더 영광스럽고 존귀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사람도 자기를 억지로 꾸미거나 영광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지금은 초라하고 비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은 주로 생각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이므로 그 생각을 회복하고 마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게 된다면 여전히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몸은 비록 죄로 인해 죽은 상태를 어쩔 수 없지만 영은 살아나는 것이다.(롬8:10)

우리는 날 때부터 무엇이든지 보태고 꾸미는 데 익숙해져 있고 또 그래야 하는 줄로 알고 있으므로 무언가를 보태거나 꾸미지 않고 사람 그대로만 있으면 허전하고 초라하게 느낀다. 이것은 사탄에게 속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그 속에 있는 충만한 영광으로 인해 바깥으로 어떤 영광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이미 영광스럽다. 가난하고 몸이 약하고 육체적 아름다움이나 지위나 명예가 없어도 그대로 영광스럽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그 속과 바깥이 다 아름답고 존귀하며 그렇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데서 억지로 헛된 영광을 추구할 필요도 없다.

이것을 아는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상태의) 사람에게는 영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것은 영광이 없는 존재에게서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 남들로부터 애써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서 영광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떠나 비참하고 초라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데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생의 형편이다. 그러니 누구에게 영광이 있겠는가? 내게 없는 영광이 다른 사람에게는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헛 일이다. 무릇 칭찬과 인정이란 자기보다 높고 영광스러운 존재로부터 받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닌 모든 것은 영광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영광스러운 자가 나를 인정하고 영광스럽다고 해야 영광이 되는 것이지 영광이 없는 자가 인정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논문을 쓴 학생은 학계의 석학들로부터 그것을 인정받아야 영광스럽지 경로당 할머니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가지고는 영광이 안되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 다 이와 같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지 않고 서로 영광을 돌리고 서로 영광을 취하는 것은 다 헛일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붙어 있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 분 안에 견고히 붙어 있으며 그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생은 견고하고 영광스럽다.  

사람의 영광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있다. 이 생명이 영광스러우므로 인생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 영광스러운 사람이다. 말씀이 있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있으면 생명이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속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영광스런 인격에서 나온다.

이런 사람은 다른 데서 영광을 취하지 않아도, 또한 혹 누가 나를 영광스럽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영광스럽다. 교회는 이런 영광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육체의 영광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으며 육체의 아름다움을 따라 영광스럽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교회는 있지도 않은 육체의 영광을 있다고 헛되이 말해줌으로써 서로를 기쁘게 해주는 곳이 아니라 형제들 안에 있는 참 영광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고 서로 영광스럽게 여기며 서로 사랑하는 곳이다.

외식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다음 말씀을 기억하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눅14:10)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역사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청한 자 곧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인생을 영화롭게 할 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셔야 사람에게 영광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 주님이 지적하신 외식의 몇 가지 실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주님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가장 대표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요구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선행 중 가장 직접적이고 대표적인 것이다. 불쌍한 이웃을 섬기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불쌍한 형제의 아버지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제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기도는 내가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금식은 무엇인가? 금식은 단지 굶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금식은 이스라엘의 구원(회복)을 비롯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갈망하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그것을 촉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마땅히 나올 덕행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것을 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당연히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으니 힘들어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난다. 주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만 하지 않고 사람들이 보도록 사람들 앞에서 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만 상대해서 해야 할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된 일은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은밀한 중에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본래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구원)로 말미암아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 자비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구제와 선행은 이 생명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영광은 인색한 인생이 변하여 자비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다른 사람이 나의 이런 모습을 알아주느냐 몰라주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광스러운 생명을 누리며 날마다 그 생명의 위력 앞에서 놀라며 감격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삶이다. 이 영광을 가진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되기 마련이지만 그 자신이 이것을 인식하거나 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자기 안에서 주는 기쁨과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해 구제를 하거나 그런 선행을 남이 알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영광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자 하고자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냥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때문에 자기가 이런 저런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의 칭찬과 영광에 매달릴 때 그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과 영광이 그것밖에 안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불신앙을 나타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누가 참으로 구제하고 참으로 기도하며 참으로 금식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는 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마음)을 가진 자, 오직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만 구하는 자가 그렇게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알고 누리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는 그 사람이 구제하며 기도하며 금식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구제를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혹 시작했다 하더라도 항상 그것을 유지(지속)하기는 더 어렵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 세상밖에 없고 이 몸(생명)밖에 없고 이 삶밖에 없다는 얘기와 같다. 그런 상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돈이다. 돈으로 생활과 건강을 유지하며 기쁨과 영광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까운) 돈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주겠는가?

그런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후해서) 구제를 하고 산다. 왜 그렇게 하는가? 사람들 안에 있는 양심이 어느 정도 그런 일을 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이다. 체면 때문이든 감정(동정심) 때문이든 구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힘은 없다. 그러므로 무조건 그 일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구제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그의 일을 알아주고 칭찬해 줌으로써 보상을 받기 원한다. 이것은 그가 생명의 여유를 따라서(성령의 강권을 따라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설사 하더라도 지속할 수 없다. 영으로써가 아니면 사람은 인색할 수밖에 없고 자랑할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는 사람만이 계산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육신밖에 없고 돈밖에 없고 이생밖에 없는 사람은 진리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대로 하면 죽기(죽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릇 섬기는 것은 큰 자가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다. 구제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며 생명이 풍성한 사람이 빈약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명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다. 구제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 예를 따라서 형제에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섬김은 어떠한가? 그것은 언제나 후하며 따지지 않고 오래 참고 계속하며 은밀하게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 분이 여유롭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섬길만한) 힘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섬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장 작고 가난하고 고달픈 자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부자를 섬기려 하고 아이가 어른을 섬기려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서 사람의 구제란 언제나 인색하고 까다롭고 조금 하다가 지치기 마련이며 공개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은 무엇인가? 구제는 성령 안에서 생명의 능력으로만 해야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 행위를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아로 행하면 결국 외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기에 앞서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선행과 경건의 일을 은밀하게 진행할 것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주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외식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밀히 행하라는 것은 율법적 명령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은밀히 행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은밀히 행할 때 우리의 자아와 육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행하게 만든다면 아마도 많은 선행들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죽은 일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일이 새롭게 설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의를 전시함으로써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의 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의 명예욕을 만족시켜주는 방법들을 사용함으로써 기부금을 모으며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한다. 이런 식으로 하여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고 큰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나온 것으로만 세워진다.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죽음을 뚫고 나온 생명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사람의 육신적 능력과 열심, 사람의 칭찬과 자랑 위에서 세워지는 것은 사탄의 바벨론이지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나라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탄과의 싸움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 곧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도록 부추긴다. 그가 매일 하는 일은 우리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서 아들의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 자신을 항상 외롭고 고독하고 초라한 자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가운데서 인정과 칭찬과 사랑을 받지 않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거짓 가운데서 싸우는 우리의 위치이며 우리의 전선(戰線)이다. 내가 혼자 있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나를 생각하며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면 열 번의 선행 중에 아홉 번을 사람 앞에서 행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도리어 단 한 번이라도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은밀하게 행하는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단 한 번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선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서 외식하지 않고 은밀히 행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근본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진리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아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며 그것도 은밀히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사탄과 싸울 일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만 은밀히 행하는 연습이 의미가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있지 않은 사람은 선을 행하고 그것을 은밀히 하기를 힘쓸 것이 아니라 선행이고 무엇이고 다 내려놓고 먼저 주님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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