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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목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재미로 하거나 별 목적 없이 단지 기도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바로 '사는 것'이다. 기도는 살려고 하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영혼과 육체의 생명의 보존을 포함한 우리의 '생존'이다. 무슨 생존인가? 누가 죽이려고 하는가? 사람은 어떤 죽음의 위협 아래 있는가? 그렇다.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미 죽어 있다. 사람은 이미 죽었으며 또한 날마다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그 생명력을 잃고 사탄의 사망 권세 아래서 날마다 죽은 자로 살고 있으며 또한 죽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삶(생명)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특별한' 것이다. 죄로 인해 즉각 죽었어야 할 인생이 7,80년이라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7,80년이라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구원)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참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여 영원히 하나님께 함께 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 역사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는 우리의 구원(생존, 삶)을 놓고 하나님과 의논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챙기는 행위이다.

우주 가운데는 살아야 할 것이 있고 죽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몸 안에도 살아야 할 것이 있고 죽어야 할 것이 있다. 몸 안에 있다고 다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은 살아야 하지만 어떤 것은 죽어야 한다. 정상 세포는 살아야 하고 암 세포나 병균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살아야 하고 마귀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자신의 생명과 생존과 보존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사탄을 향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과 보존과 확대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탄의 멸망과 위축과 수치와 실패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싸움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다. 사탄은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 한 번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 그가 죽기 때문이다. 진리가 서고 의가 서면 사탄의 모든 거짓말과 불의와 죄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기 위해 기도하고 이기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사탄 또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를 시험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생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존 문제는 단지 세상(사회) 속에서의 생존이다. 직장을 얻고 각종 사회적 환경적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문제가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존 문제의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문제이며 인간 문제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 육신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들일 뿐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 생명에 부속되어 있다. 육신이 죽게 된 것은 육신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이 죽게 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죽게 된 자리를 알아야 삶의 회복 방법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살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하신 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하시고 죄 용서를 구하게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셨다. 이것은 다 삶(영생)을 추구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면 우리는 삶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망(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싸우는 때이다. 지금은 주님이 이미 이루신 승리를 거두는 때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싸워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도 아니고 환경과의 싸움도 아니다. 오직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이고 죄와 사망과의 싸움이다. 이것은 곧 믿음의 싸움이며 진리의 싸움이다.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서 그가 이루신 승리를 누리는 자는 살고, 반대로 눈에 보이는 환경(육신의 약함, 가난, 대적들...)을 전부로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싸우는 사람은 사탄에게 정복당한 채로 죽는 것이다.
참으로, 죽는 것은 쉽지만 사는 것은 어렵다. 죽는 것이 쉬운 것은 사람이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도 육신적으로는 죄와 사망의 몸을 여전히 입고 있으므로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죽으려면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살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필요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날마다 실제로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실제로 누린다는 것은 곧 날마다 죄와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2.죄 용서를 구함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후반부 중 첫째 내용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에 우리가 생각한 것은 그 중요성 면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보다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전반부는 천국 자체를 구하는 것이지만 후반부는 그 천국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첫째 제목은 당연히 의의 성취와 누림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6:33) 그의 나라는 그의 의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나라냐 세상 나라냐 하는 것은 영토 문제도 아니고 사람 문제도 아니고 오직 성질과 성격 문제이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죄와 불의가 바다처럼 충만한 곳은 세상 나라요 마귀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는 어떻게 거기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만 말해서는 안되고 그것이 어떤 나라인가 하는 내용 문제도 반드시 함께 말해야 한다. '예수를 믿어서' 천국을 간다는 것은 형식 문제이고 방법 문제이다. 그것은 구원의 방법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천국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계21:2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22:15)

이 말씀들은 천국의 성격, 곧 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 말한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지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 천국은 무슨 티켓을 가지고 가는 나라가 아니라 아들(아버지)의 생명(인격)을 가지고 가는 나라이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죄 용서 문제를 제일 먼저 언급하신 것이다.

의 문제는 곧 죄 문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서기 위해서는 죄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죄 문제의 처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역사가 필요하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대속(십자가에서의 구원) 역사이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실제 삶이 죄를 이기고 의와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이 두 문제가 다 해결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신 후이므로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날마다 죄를 이기는 생명을 실제 삶 속에서 누리는 이 문제이다. 믿는 이들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실제로 역사하여 의와 진리와 거룩이 회복될 때만 이 땅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5-17)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항상 유지되며 확대되며 표현되어야 한다. 사탄은 날마다 사람을 거짓말과 죄로 쓰러뜨리려고 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의 손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고 혹 빠지면 거기서 건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기도로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강(화평)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가 있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셔야 하고 우리에게 아들의 (의로운) 생명을 주셔야 한다. 그러나 평화가 있으려면 우리가 서로 죄를 사하고 서로 받아야 한다. 평화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이다. 하늘의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땅의 평화가 곧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이미 어떤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셨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안에는 평화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관련된 이 두 가지 문제를 항상 함께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죄 문제 하면 오직 하나님의 용서 문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문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는 이미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구원)이지만, 둘째는 날마다 (주님의 생명으로) 죄를 거부하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원리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형제를 서로 받고 형제의 죄를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죄를 품고서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죄인들로서야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열어놓으신 방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죄 문제를 실질적으로 처리하는 주님의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주님의 구속을 의지하여 죄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의 죄를 사함으로써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루신 의를 가져오고 충만케 하는 것이다.
죄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두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죄 문제가 법적이고 형식적인 구원을 받는 것으로 다 처리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실제 생활 속에서 (이기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실제로 이길 때 비로소 완전하게 처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서로 사해주는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문제를 오직 구원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 용서 문제도 오직 구원과만 연관지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이 나온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여) 사함을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죄 용서를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으므로 범죄 후에 반드시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등) 철저히 처리하려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죄 문제는 단지 형식적으로 죄 용서를 구하기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둘 다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언제든지 형식적이고 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생명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과거 어느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사느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의 실제이지 단순한 법적 지위가 아니다. 법적 지위(법적 칭의)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신자에게 실제로 의와 거룩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 의와 진리와 거룩이 없다면 구원 받았다는 이름이나 법적이고 형식적인 칭의는 아무 의미도 없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계3:1)와 '살았다는 이름도 없고 실제로도 죽은 자'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신자 안에 있는 의로운 생명, 죄와 상관없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는 생명이 죄에 대해 혐오하고 거부하고 죄를 떨쳐버리려고 역사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영은 살았지만) 몸은 여전히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롬8:10) 이것은 죽는 날까지, 부활로 말미암아 새 몸을 입는 그 날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미 죄를 이기는 생명,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 아들의 거룩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심상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더구나 죄를 품고 있을 수는 없다.

죄를 사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탄을 거부하고 죄와 사망과 이 썩어질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중요하다. 아들의 생명, 회복된 생명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다 이러하다. 죄를 계속 품고 있을 수 없으며 죄를 심상히 여길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새롭게 처리된 인생을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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