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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인생이 무엇이며 바르고 진정한 삶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이 한 제자에게 말씀하신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3-15)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이 말씀이 바로 주님이 인생을 보는 시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의 능력을 떠나서, 그리고 내 것이냐 아니냐, 혹은 내가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탐심을 물리치고 소유의 넉넉함(부유하게 되는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보다 깊고 근본적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자 하는 그 근본적인 욕망(탐심)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고 단지 어떻게 정당하게 돈을 버느냐 하는 문제만 손을 댄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과연 많은 돈을 가져야 할 이유와 필요가 있느냐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 손을 대신다. 이것은 인생이 무엇이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다.

형에게 부당하게 재산을 탈취 당한 동생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것은 공의와 신의의 원칙에 합당한 것이며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돌아보실 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재산,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보물이 어디 있는지를 돌아보게끔 하기 위해 그의 요구를 물리치시고 도리어 그것을 탐심이라고 몰아붙이셨다. 그가 세상밖에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형의 재산을 싸워서라도 빼앗아야 한다. 그의 생명이 오직 돈의 힘에 의해 유지될 수밖에 없는 (버려진) 인생이라면 그는 죽더라도 돈을 잡아야 한다. 그럴 때 그가 돈을 추구하는 것은 탐심이 될 수 없고 생존을 위한 당연한 활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그를 만났고 그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가치를 알아서 따르는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의 유산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을 유산 확보하는 분으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쓰레기를 얻어서 담아오기 위해 금 그릇을 만들고 그것을 코팅하고 광내는 것과 같다. 주님 자신이 형의 유산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귀한 재산이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다. 보물을 땅에 쌓아둔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며 부유한 상태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축을 하지 말고 지금 있는 돈을 즉시 선한 일에 다 써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돈을 관리하는 문제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와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청지기는 돈의 용처를 잘 정해야 뿐 아니라 돈을 시기에 따라 잘 분배하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청지기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며 시간과 돈의 사용을 포함하여 삶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믿음의 문제요 시각의 문제다. 무엇을 보느냐, 무엇이 인생의 참 가치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늘(하나님의 나라)을 본 사람은 하늘에다 투자할 것이요 땅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땅에 모든 것을 투자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고 영원한 가치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고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주님의 의도는 단지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믿으라는 교훈을 주시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신 주님의 또 다른 의도는 무엇인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탄의 시험과 신자의 연약함을 염두에 두고 안전 장치를 해두려고 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다.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신자는 하늘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육체적으로)는 땅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연약하고 미약한 생명(사람의 영적 능력)은 육체의 생명(정욕)을 이기기 어려워 삶은 언제나 육체 쪽으로 기울기 쉽다. 그리고 육체(사람의 관심사)는 자기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투자된 쪽으로 기울기 쉽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사 주님은 돈을 하늘에 투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당나귀 앞에 당근을 매달아 흔듦으로써 당나귀를 앞으로 내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돈과 칭찬을 좇아 움직인다. 돈(이익)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적인 동인(動因)이고 칭찬(명예)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정신적인 동인이다. 그러므로 이것만 잘 이용하면 사람을 얼마든지 일하게 할 수 있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죽도록 내달리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성한 눈을 가지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2-24)

여기서 눈은 앞에서 말한 믿음의 눈 곧 인생을 보는 시각(視覺, view), 삶을 보는 관점인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보고 자기(자기가 누구이며 어디서 어떻게 지음 받았는지)를 제대로 보고, 또한 인생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고,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사람이 무엇으로 살며 어떻게 사는지, 내일을 어떻게 대비하는지)를 제대로 보는 사람은 눈이 밝고 성한 것이고, 반대로 그것은 보지 못하고 오직 육신과 재물 곧 세상 삶과 세상 영광만 보는 사람은 눈이 성치 못한 것이다.

눈이 성치 못한 것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심하게는 소경부터 시작해서 근시(近視)와 원시(遠視), 난시(亂視), 약시(弱視), 사시(斜視, 사팔뜨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5-11)

여기서 베드로는 영적 눈이 아주 나빠서 소경인 사람, 그리고 멀리 있는 영원한 것은 보지 못하고 오직 눈 앞에 가까이 있는 것만 겨우 보는 근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실족하기 쉽다는 것이다. 실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헤매다가 결국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약속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면 결국 헤매다가 놓치고 만다. 옛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를 멸망의 자식, 아비 없는 고아의 자리, 흑암의 권세 아래서 헤매는 자리에서 건져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된 자신의 신분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 것을 찾아서 방황하고 헤매지 않을 것이다.

돈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육신이 편한 것이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것보다 좋고 그렇게 육신이 편하게 되려면 돈(재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는 사람이다. 우리도 남이 보는 것을 다 볼 줄 알지만 가까이 있는 것만 보는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것까지 보는 자인 것이다. 우리는 근시가 아니라 원시이다. 바로 코 앞에 있는 이익, 바로 눈 앞에 있는 영광과 재미는 잘 보이지 않고 오직 멀리 있는 영원한 것만 보이는 원시가 바로 복 있는 눈이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무엇이 참된 부이며 무엇이 참된 영광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난 주에 생각했던 바와 같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되려는 것 곧 재물을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해롭고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지난 주에 생각했던 다음 말씀들을 음미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6-12)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생활의 염려나 부자가 되려고 하는 욕망에 빠지지 말고 오직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생각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거두실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루 하루 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염려할 필요도 없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다음 일은 하지 못한다. 생존은 기본이다. 생존 다음에 찬송도 있고 사역도 있다. 우리만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아신다. 우리의 문제는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에 바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이것이 6장의 마지막 말씀이다. 이 말씀은 믿음은 염려하지 않는 것이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다. 일에는 시간적 문제가 있고 담당 책임 문제가 있다. 시간 문제는 그 일이 오늘(현재) 해야 할 일이냐 내일(미래) 해야 할 일이냐, 아니면 어제(과거) 일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 문제란 누가 그 일을 담당하며 수행하며 책임지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에 대한 염려는 오직 오늘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책임자가 하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내 것이 아니다. 양면에서 그렇다. 내일 일은 오직 '하나님이', '내일' 감당하실 것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우리 것이 아니요 책임 면에서도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간은 오직 지금 숨쉬고 있는 이 순간뿐이다. 어제도 이미 지나갔으므로 내 것이 아니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내 것이 아니다. 내일 우리가 살아 있을지 어떨지, 그리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상황이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오직 지금 현재 이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다. 오늘 일은 오늘 살아 있는 동안에 있는 힘을 가지고 처리하면 되고 내일 일은 내일 가서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그리고 힘이 있으면 그대로 처리하면 된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고 힘을 넘어서 애쓰고 용 쓸 것이 없다.

사람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스스로 사는 부분이 있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멀리 바라보고 살아가기 바란다.


하나님을 믿고 멀리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계시(啓示) 문제이고 시각(視覺) 문제이다. 일은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이것을 하겠다 하면 이것을 얻는 것이고 저것을 얻겠다 하면 저것을 얻는 것이다. 최소한 그 비슷한 것이라도 얻는 것이다. 서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서울에 도달하는 것이며 하다 못해 과천에라도 도달하는 것이지 제주도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삶이 무엇인가? 추구하는 일과 일이 모여서 삶이 되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날과 날이 모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삶은 목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인생 또한 그렇다. 내가 소망하며 바라보며 쳐다보는 것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우리 인생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얻고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과 돈을 추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오직 돈을 바라보는 사람, 오직 재물을 쳐다보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수도 있고 못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얻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그를 바라보며 그를 좇는 사람은 그를 확실하게 얻을 뿐 아니라 돈과 건강과 기타 모든 것을 포함한 '인생(삶)'이라는 선물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돈을 좇는 사람은 돈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돈(財貨)이란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은 그를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얻도록(누리도록)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자는 아무 제한 없이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협조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재삼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부자라는 것은 본래 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정도 가지고 이 정도 살면 부자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을 때 부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다 걸어다닐 때 내가 차를 타면 부자인 것이지만 다 차를 타고 다니면 차 타는 것을 가지고 부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걸을 때 나는 말을 타고, 다른 사람이 혼자 말을 탈 때 나는 고삐 잡는 종을 부리면서 말을 타야 부자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겠는가? 말을 타는 사람이 있으면 고삐를 잡는 종이 있어야 하고 가마를 타면 그것을 메는 가마꾼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 편하고 다 행복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누군가가 부자가 되면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 반의 모든 학생이 다 일등이 되고 다 반장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 즉 많은 재물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잘못된 소망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삶을 주셨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같은 자녀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가마를 타기를 원하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최소한 다른 두 사람을 가마꾼으로 만드셔야만 한다.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왜 이런 기도를 들으시며 이런 일을 지원하시겠는가?  

그러므로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소망이며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혹 되더라도 수많은 부작용과 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전도서 5장은 부자가 되려는 사람과 부자가 된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저가 모태(母胎)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전5:10-17)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재산이 많아지면 돈 쓰는 사람도 많아진다. 많은 재산도 임자에게는 다만 눈요기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적게 먹든지 많이 먹든지 막일을 하는 사람은 잠을 달게 자지만, 배가 부른 부자는 잠을 편히 못잔다. 나는 세상에서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아끼던 재산이, 그 임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 가지 못한다. 또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평생 어둠 속에서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살 뿐이다."(표준새번역)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욕심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 또한 헛된 일이다"(전5:10, 공동번역)

전도자는 돈을 추구하는 일이 헛된 이유를 세 가지 들고 있다. 그 첫째는 육체의 요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져도 사람은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은 그것을 유지 관리하기가 힘들고 그것 때문에 삶이 편치 않다(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부자가 영원히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허무한 일로 인해 날려서 빈털터리가 되는 일이 많으며 더구나 죽을 때는 빈손으로 허무하게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다음 말씀에서 사람이 일생동안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分福)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關念)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전5:18-20)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을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표준새번역)

낙(樂)을 누리라는 것이다. 낙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분복(分福)을 제대로 챙기며 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지으신 참 사람의 자리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참되고 진실한 유일한 인생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아들로서 지음 받은 자신의 위치와 목적과 영광을 알고 하나님을 누리며 섬기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참 사람의 길이다. 주님은 그 일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참 사람의 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무 헛된 망상을 가지지 않았으며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아셨으며,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 분명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어야 한다. 그의 길로 행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의 아들의 위치를 받아들여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죄 사함와 죄로부터의 자유, 그 생명 안에 있는 의와 거룩과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누림, 이러한 삶은 장차 죽은 후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즉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저주와 사망 아래 놓여 있는 이 땅에서, 이 약한 육신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지금 바로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결코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현재 즉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물론 세상이 끝나고 이 육신이 끝난 후에 더욱 완전하게 누릴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님이 마태복음 6:33에서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지으심 받고 부르심 받은 우리가 추구할 것은 절대로 육신적 삶 자체가 아니다. 육신적 삶이란 사람이 하나의 동물(생명체)로서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자고 그런 식으로 그저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 잘 살려고 그런 것이다. 즉 잘 먹고 잘 입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그러는 것이다. 절대로 그저 돈을 많이 틀어 쥐고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아주 정신이 왜곡된 사람들의 경우 그렇기도 하지만) 부자가 되려는 목적은 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잘 산다는 것이 결국 아무 진정한 삶의 목적도 없이 단지 삶(목숨, 동물적 생명)을 잘 유지하고 끝까지 유지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단지 산다는 의미의 '삶 자체'는 인생이 추구할 목적이 될 수 없다.

삶은 오직 하나님이 살도록 허락하신(생명을 주신) 동안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지 사람이 애쓰고 잘 준비한다고 영위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돈을 버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이와 같은 본질적 삶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 반드시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잘 먹고 잘 사는' 삶 곧 육체의 동물적 생명을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은 삶의 내용이 아니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릇이다.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의 삶의 정상적인 내용은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우리의 목적이고 목표이다. 그것을 위해서 육신의 생명이 주어진 것이며 돈과 건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이 단지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어떤 아이에게 "네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커서 어른이 될래요" 하고 대답하는 아이와 같다. 어른이야 다 되는 것이고 사람이야 다 되는 것이지만 어떤 어른이고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이런 식의 사고 구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다. 덕담과 권면 자체도 "열심히 하라"는 것이고 그 답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무엇을 열심히 하겠다는 것인가? 열심히 해야 할 내용은 없고 그저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겠다는 이런 말은 사탄이 사람의 혼을 빼놓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귀에 "어른이 되는 것도 열심히 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돈도 열심히 모으고 그것을 위해 사기도 열심히 치고 죄도 열심히 짓겠습니다" 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열심히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눈이 성한 자이고 세상을 바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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