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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본래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데다가(눅2:4) 나중에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후 다시 나사렛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다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요셉과 마리아는 메시아가 유대 베들레헴 출신인 것으로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 아마도 예루살렘 근처 유대 땅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헤롯이 죽은 후 그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 임금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그를 피하여 나사렛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롯이 죽은 후 그가 다스리던 이스라엘은 세 등분되어 각기 그의 세 아들들에게 맡겨졌다. 헤롯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맡았고, 헤롯 빌립 1세는 바타네아와 다른 지역을,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맡았다. 그 중 아켈라오는 포악한 자기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매우 잔인하고 포악한 성질을 가진 자였으며 나중에 실제로 유대를 다스리는 동안 폭정을 실시하여 유대 지도자들에게 큰 원성을 샀다. 이에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황제에게 호소를 했고 결국 아켈라오는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 자리에는 다시 왕이 세워지지 않고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이 직접 다스리게 되었다. 그 첫 총독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빌라도이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을 다스린 헤롯 안디바는 동생의 부인을 뺏아 자기 아내로 삼은 자이며 그것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죽인 자이며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의 부활체로 알고 불안해했던 장본인이다.

마태는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나사렛 사람이 된 것에 대해 구약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어느 곳에도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어느 선지자도 메시야를 나사렛 사람으로 예언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언되어 있었으며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성경이 예언한 것은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대로 메시야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실제로 주님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그 인생 전체를 통해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수많은 멸시와 천대와 싫어버림(사53:2,3)을 받음으로써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졌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그들의 본적은 유대 베들레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고 거기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했다. 다만 미가서 5:2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 아기를 낳을 무렵에 베들레헴으로 인도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 로마 황제를 움직이셨다. 로마 황제는 인구 조사를 위해 제국 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하도록 명령했고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을 무렵 그 명령에 의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내려감으로써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으면서도 나사렛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이 고향인 한 나사렛 사람을 택하셔서 예수를 낳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서 멸시받는 자들 가운데서 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대표자와 구원자를 삼기 위해서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데에는 경멸과 무시의 뜻이 담겨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런 모양으로 오셔야만 했다. 그런 자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주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서 나게 하시고 살게 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시다. 왜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 나야 했는가? 바로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신은 한편으로 유대 베들레헴이므로 존귀하지만 한편으로 나사렛이므로 비천하다. 우리는 한 사람 안에 이 두 성질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 이것이 주님의 운명이고 또한 우리의 운명이다.

주 예수님에게는 아무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영광이나 화려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광스런 아들의 생명과 인격, 영원한 말씀이 있었을 따름이다. 구약 성경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오실 것이며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사52:13-15)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1,2)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3-5)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성경은 분명히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아임을 깨달았다. 얼마 후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증거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때 빌립은 다만 "와 보라"고 응답했다.(요1:43-46) 빌립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와서 보라'는 것뿐이었다. 와서 보지 않으면 그리고 그것도 한참이나 함께 살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외모만으로는 도저히 판단될 수 없는 사람 오직 그 속에 있는 생명을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한복음 7장은 나사렛이나 갈릴리라는 말이 유대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7:40-52)

주님의 말씀과 행위를 본 사람들은 다 그의 말씀에서 권세와 능력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를 끝까지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주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리는 과거에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주님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방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곳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표현했다.(마4:15)


갈릴리는 이스라엘과 이방의 경계 지역이었기 때문에 각종 강제 이민자들, 유민들, 죄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므로 그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가 어찌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영원한 이름이 되겠는가? 거기에는 율법과 경건과 고상함과 선은 없고 오직 무지와 세속적 욕망과 비천함과 죄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주요 세 성읍 곧 회당이 있는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은 그나마 갈릴리 지역의 종교와 율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그 세 도시의 형편은 정말로 형편없었다. 주님이 열심히 표적을 행하며 말씀을 전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마11:20-24) 그만큼 세속화되고 이방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사는 정통 유대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을 멸시할 만 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보배요 하나님의 비밀일 수밖에 없었다. 오직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는 자들에게만 드러나는 보배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길가에 핀 꽃이 아니라 산중 깊은 곳에 홀로 피어 있는 꽃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찾고 또 찾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구약 시대의 성막은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을 덮어 겉덮개를 했다. 이 해달의 가죽은 거칠고 볼품 없는 모양이었으므로 겉으로 보기에 성막은 그다지 멋지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금과 보석과 세마포들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사람, 사물이 가진 영원한 특징이다.

그것은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렇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감추어진 보배이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 역시 그렇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다 드러나는 분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드러나시는 분이다. 누가 주님을 알아보고 그를 깊이 누릴 수 있는가? 그것은 '은혜를 입은 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신령하고 은혜로운 눈을 가진 자' 곧 육신의 썩어질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영생을 추구하는 자이며 그로 인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생명을 따라 취하는 사람이다.

나사렛이라는 걸림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외식하여 경건한 척 하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장치였다. 이런 사람들은 보배를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오직 계시를 받은 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보배는 감추어져 있다.

주님이 낮은 자리에서 나신 것, 비천한 모양으로 오신 것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비천한 모양으로 인해 절망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4-18)

사망의 자리에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없다. 사망으로서 사망 권세를 이기는 것이다. 주님의 낮은 자리는 욥이 낮은 자리에서 사탄을 이긴 것처럼 낮은 자리에 처하여 사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모든 속박을 풀기 위해 필수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될 자리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를 세상에서 더 낮출 수 없을 정도로 낮추셨기 때문에 그 자신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지만 그 안에서 나타난 생명의 역사로 인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마침내 자기에게 (사실은 그 안에 있는 영원하고 영광스런 아들의 생명에 대해) 굴복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그 생명을 주신(자기를 낳아주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다.

이러한 주님의 삶은 사람이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즉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흙(육체)의 영광은 흙(육체) 자신에게 돌려지고 생명의 영광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려진다. 인물이 잘 생긴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천성이 착한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로 영광을 받지만 그 영광은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 돌려진다. 그러나 낮고 비천한 사람, 천연적인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된 사람은 그 받는 영광이 사람에게로 돌려지지 않고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돌려진다. 그러므로 육체의 영광이 하나님과 사람 자신에게 진정한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아름답지 않은 육체 안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생명으로 말미암는 영광이 그 자신과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본래적인 영광을 되찾기만 하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며 모든 만물로부터 또 서로로부터 영광을 받는다. 영광스럽게 지음 받은 존재가 어찌 영광스럽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받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사탄에게 속아서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헛되어 영광을 구하며 서로 헛되이 영광을 돌리는 이 자리에서는 참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흙에는 영광이 없다. 그것은 만물보다 못하거나 만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보다 뛰어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누리려면 흙(육체)의 모양에다 목을 걸고 그 안에서 영광을 찾아서는 안된다. 우리 주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오시고,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 유대의 백성으로 오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시고,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는 사람으로 오신 것은 사람의 영광이 흙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아들의 생명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육체에서 영광을 찾아서는 안된다. 육체와 관련된 모든 것 곧 외모와 소유와 힘(능력), 이 모든 것들은 다 썩어지고 쇠하여지는 것이다. 이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사람의 참 영광을 드러내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

주님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사렛 사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成育身)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라는 말로 동일하게 표현했다. 사람의 참된 가치, 참 영광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인생이 빛나고 영광스러웠던 것은 그에게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반할 수밖에 없는 멋진 모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도 결국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와 진실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과 삶이 인간의 지음 받은 자리와 영원히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그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육체를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결국 그의 말씀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진리'를 이길 수 없다. 육체의 영광이 있든 없든 진리는 사람을 영광스럽고 권세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권세는 그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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