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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마3:1-4) / 2003. 9. 7

2010.04.29 13:21

이상봉 조회 수:37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주님이 장성하여 사역을 시작하실 무렵에 주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한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유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는 요한이다. 주님은 요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11:7-14)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단지 주님에 대해 예언한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주님이 수행하실 사역의 일부를 직접 수행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과 같이 천국을 전파했고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구약 말라기에서 예언된 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주(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역이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그는 하나님의 사자였지만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곧 메시아(언약의 사자) 자신은 아니고 다만 그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3:1,2)

하나님이 이런 사자를 보내신 것은 진짜 메시아(언약의 사자)가 바로 나타나면 그 백성들 안에서 충격이 너무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간격이 넓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와 사망, 무지와 불신앙이 가득한 땅에 바로 주님이 임하시면 모두가 심판을 받아 멸망할까 싶어서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선지자 엘리야(요한)를 보내실 것이라는 말이다.

요한의 임함에 대해서는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한 바 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사40:3-8)

그가 와서 할 일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를 지적하고 허무한 인생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일이었다.


요한의 사역과 주님의 사역을 대비해 보자. 요한의 사역은 주님의 사역과 어떻게 같았으며 어떻게 달랐는가?

요한의 사역과 주님의 사역이 같은 점은 그 시대에 대한 비판과 책망을 하며 심판을 경고했고 회개의 촉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다는 점과 마침내 죽음으로써 그 봉사를 마감했다는 점이다.

요한의 사역이 주님과 달랐던 점은, 그는 주님의 날에 대한 예고를 하는 자였고 시대에 대한 부정(否定)과 애통의 표시로 금식과 고행을 하며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삶으로써) 일상적 삶을 거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비해 주님은, 당신이 오심으로써 구약에 예언된 종말(천국)이 도래했으므로 사람들 안에서 친히 다스리며 심판하며 구원하는 일을 시행했다. 그리고 그는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적으로서 여러 가지 기적과 선행 및 구원 사역을 행하셨다. 그리고 기다리던 약속의 날(천국)이 도래했으므로 요한이 하던 것처럼 슬퍼하며 탄식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으로 잔치를 베푸는 일을 하셨다.

주님에게 주님만의 독특한 인생이 있었던 것처럼 요한에게도 그만의 독특한 인생이 있었다. 주님과 세례 요한의 인생은 외형상 많이 달랐다. 우선 주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주님이 잔치하는 분이었다면 요한은 금식하며 애통하는 사람이었다. 주님이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서 살며 구원을 행하셨다면 요한은 사람들에게서 떠나 살며 심판을 선포했다. 주님이 신랑으로서 잔치의 주역이었다면 요한은 신랑의 들러리로서 신랑의 기쁨을 위해 일하는 자였다.

그러나 주님과 요한은 그 외형상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둘 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바쳐서 살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주님에게는 주님만의 인생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지 않았고 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 주님은 인류를 위해 살았고 요한은 그러한 사역을 수행하실 주님을 위해 살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성전에 거하며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음식을 먹으며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광야로 나가서 들짐승처럼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백성들에게 심판을 외치며 살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이 다 무너졌으므로 그것을 멸시하며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이며 하나님의 정신(의와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렇지 않으므로 요한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더 이상 중보자(제사장)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성전을 떠나 사람이 거하지 않는 광야로 나가서 심판을 외치며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실상,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사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오셔서 구원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터를 닦는 작업이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먼저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주님이나 요한이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 인생을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처럼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처럼 살아야 하는가? 즉 이 시대의 잘못됨을 깊이 통찰하고 인식함으로써 심판을 외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애통하며, 오실 주님을 갈망하며 소망 중에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기쁨으로 잔치를 누리는 삶을 통해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살아야 하는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오직 세례 요한처럼 산다. 그들은 다만 선지자처럼 시대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그들은 마치 아직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은 것처럼 눈물과 기도와 금식 가운데서 장차 임할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오직 잔치하는 주님처럼 산다. 그들은 현재 자신과 세상 안에 아직 존재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완전하게 자기 안에 임해 있는 것처럼 오직 기쁨과 찬송 속에서 산다. 그들은 언제나 잔치를 누리는 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답은 무엇인가? 사실 그것은 간단하다. 둘 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인생과 주님의 인생을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이 시대가 두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며 구원의 시대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볼 때 이 시대가 구약에서 약속된 그 약속이 성취된 시대이므로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임하시고 은혜로 사람들을 구원하고 다스리시는 시대라는 말이며,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이 시대가 아직 모든 것이 결정된 최종적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시대가 은혜의 시기고 구원의 시기라는 말은 지금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준비시키는(그리스도께 바쳐질 신부로서 단장시키는) 시기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다만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느 것도 완전하거나 결정적이지 않다. 혼란과 안정이 공존하며 고통과 안식이 공존한다. 주님이 오신 것은 자기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려고 오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은혜와 구원의 역사가 끝난 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같이 기쁨 속에서 잔치하는 자로 삶과 동시에 요한과 같이 깨어 근신하며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요한과 주님은 다 같이 사람들 가운데서 천국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요한은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그렇게 했지만 주님은 당신이 왔음에도 그렇게 했다. 그것은 그때도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함께 부름 받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셨으며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고 우리의 왕과 주와 아버지로 역사하고 계심을 항상 말하며 일깨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며 방황할 필요가 없으며 가난과 고통 속에서 저주의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자고 권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아직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은 죄의 몸이요 죽을 몸이며 마귀에게 극히 취약하다는 사실과 세상에는 마귀가 아직 역사하고 있으므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죄와 고통과 사망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 곧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생명으로 죄를 대적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뿐임을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처럼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므로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날마다 아버지의 풍성을 누리는 잔치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세례 요한처럼 또는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하셨던 것처럼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하며 사탄(귀신)을 대적하는(쫓아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한의 때에는 요한처럼 사는 것이 합당하고 주님의 때에는 주님처럼 사는 것이 합당하다. 비상시에는 비상하게 행동하고 일상시에는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없을 때는 궁색하게 사는 것이 맞고 약속을 믿으며 소망 중에 살아야 하고, 있을 때는 풍요롭게 그리고 믿음으로 누리는 삶을 살며 기쁨과 찬송 가운데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이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중간 시대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요한처럼 때로는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이렇게 하고 어느 때에는 저렇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 시점 안에서도 한편으로는 요한처럼 살면서 동시에 주님처럼 사는 두 가지 태도를 함께 나타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 앞에, 하나님의 목적 앞에 우리 인생을 내놓는 것이다. 울든지 웃든지 내 감정이나 내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면 그것이 완전한 인생이고 합당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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