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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사실상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외친 것이다. 천국은 회개해야 할 사람들 곧 죄인들에게는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 자기 나라가 아니라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대상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 상태에 놓인 백성들에게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니 그것이 어찌 복음이 되겠는가?

그것을 알고 나아왔는지 모르고 나아왔는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왔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될 것이다. 백성들에게 요한은 잠자코 세례만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상을 신랄한 말로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그렇다면 요한이 촉구한 회개란 어떤 것인가? 요한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는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이 단지 율법에 충실하고 그들의 종교적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천 년 이상 해 오던 그들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요구한 것이다. 삶은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에서 나온다. 모든 죄와 불의 그리고 선과 의도 다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회개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고 사고 방식을 바꾸고 인생의 목적과 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회개란 단지 후회와 송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회개는 후회와 탄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고 삶의 목표를 바꾸지 않는다면 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죄는 타락한 마음과 생각의 산물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다 그의 생각 곧 어떠한 것을 추구해야 하겠다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한 단순한 탄식과 후회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목표를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실행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생각과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범죄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말하기를 자기는 길은 아는데(생각은 뻔한데) 몸이 생각대로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만 옳은 것이다. 같은 죄를 계속 거듭 짓는 사람은 사실상 길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며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길을 안다고 하는 것은 선악에 대한 판단 능력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지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정말로 의미가 있는 '생각'이란 그런 선악적 판단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계시(빛)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해 확고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나는 진리 외에는 인생에 결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그러한 생각이다.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아는 그런 지식이다.

진리의 길, 하나님의 아들의 길이 좋기는 하지만 그 길로 갈 수도 있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둘 중에서 육신이 편한 쪽으로 가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진리의 길이 육신에게 있어서는 편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고 좁은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반드시 이 길로 가야한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어야 그 길로 가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생각이 있다면 아무리 선악을 판단할 줄 아는 지식(생각, 상식)이 있다 해도 진리의 길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그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올바른 마음과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유일하고도 단순한 마음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로 지음 받고 보냄 받았으므로 아버지가 요구하시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자기 살을 뜯어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몹시 궁할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지식이고 참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지식과 생각은 바로 이와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지식과 생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알고 그리 가지 않으면 죽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개의 핵심은 이런 생각으로의 돌이킴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빛(계시)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요한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것은 바로 그들에게 이러한 근본적인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유대인들 중에서 율법에 소홀하고 무지한 자들뿐 아니라 율법에 정통하고 열심이 있는 자들 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왔을 때도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의롭고 회개할 것이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지만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외치며 회개를 촉구했다.

요한은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 주님도 나중에 그렇게 하셨다. 그것이 없으면 죄 문제는 처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는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1-3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먼저 바리새인들에 대해 살펴보자. 바리새파는 주전 200년 무렵에 헬라제국이 유대인들을 헬라화하려고 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고 전통적 유대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형성된 유대교의 엄격한 원리주의자들(하시딤 :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의 후손들이다. 그들의 생활의 특징은 모세 율법을 엄격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그것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있었다.

본래 바리새주의는 종교적(신앙적) 열심에서 나온 것인만큼 그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세월이 지나면서 (모든 종교나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점차 본질(마음)보다는 형식적 면(율법 의식과 규칙의 준수)에 치중하는 쪽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헬레니즘이 한창 강하게 압박하고 있을 때는 헬레니즘을 반대하고 히브리즘을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차츰 한편에는 헬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신앙의 고백이 보편화되어가자 분명한 신념과 열심이 없는 자들도 바리새파에 가담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중에는 저급한 동기를 가진 사이비 바리새인들이 진지하고 열심 있는 참 바리새인들의 수를 월등히 능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탈무드에서도 바리새인을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로 분류하여 정통적이지 못한 바리새인들의 증가에 대해 개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탈무드는 바리새인들을 일곱 종류로 나누었는데 모두 실감나는 형용사를 붙여 생생하게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1.잠시 대기형 : 이들은 항상 선행을 기피할 구실을 찾고 있다.
2.멍든 상처형 또는 유혈형 : 이들은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가다가 벽에 부딪혀 멍이 들거나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다.
3.어깨 으쓱형 :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선행을 하는 자들이다.
4.곱사등이형 : 거짓으로 겸손한 척하면서 허리를 깍듯이 굽히고 걷는 자들이다.
5.계산형 : 자기의 악행을 상쇄시킬 만큼의 선행만 하기 위해 늘 계산을 맞추는 자들이다.
6.하나님 경외형 :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바리새인이다.
7.하나님 사랑형 또는 '하늘로부터 난 자'형 : 이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참 아들이요 진짜 바리새인이다.

그러므로 이미 요한의 때에도 바리새인들 중 극소수만 진실한 사람들일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적 바리새주의에서 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에 대해 살펴보자. 사두개파는 주님 당시 수적으로 소수파였지만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대개 많은 교육을 받았고 고위직에 있었다. 당시 많은 대제사장들이 사두개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정치적인 면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볼 때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이루고 있던 세속적 도시민층을 대표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지주들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지지자가 별로 없었다. 일반 대중들은 대체로 바리새파를 동정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특징과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자.

1.바리새파는 예정론을 주장했으며 이 교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도 합치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인간 각자의 자유에 따라 자신의 인생과 역사가 좌우된다고 주장하면서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2.바리새파는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 그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행한 행위에 따라 선악간에 내세의 상급과 보응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3.바리새파는 천사와 악마의 사상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사두개파는 그런 사상을 거부했다.
4.바리새파는 기록된 히브리어 성경과 구전을 다 같이 신앙의 권위 있는 지침으로 받아들였으나 사두개파는 다만 성경만을 받아들였고 구약에서 가르치지 않는 일체의 신앙과 관습을 배제했다.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확대하는데 사용하였던 여러 가지 구전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 인정한 것은 그들이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종교인, 율법주의자, 원리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삶을 종교적(신앙적) 원리에 따라 규정하고 구속하려고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유전(성경 해석과 확대 적용에 따른 전통)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자신들부터 그런 규례를 따라 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반 민중들이 이러한 율법 규례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여 잘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 의(義)와 교만 그리고 형제를 멸시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오류에 빠졌다. 율법 규정의 엄격한 실행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 신앙의 본질과 동떨어진 종교적 외식적 생활에 빠졌고 진리의 실행과 열매는 없으면서 원리와 당위성만 강조하며 가르치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주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로 책망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현실주의자였다. 그들은 신학적으로는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적극적이고 현대주의(자유주의, 진보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으며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을 싫어하였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와 위선,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형식적으로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지키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것 즉 율법의 정신은 소홀히 여긴 것에 대해 질책하셨다. 그러나 요한과 주님의 책망은 모든 바리새인에게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본래적 바리새 정신 곧 외세의 압박 속에서 세속화되고 타락되어 가는 유대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영적 회복을 위해 애쓰던 바리새파의 근본 정신에 충실하지 못한 대다수의 잘못된 바리새인들에 게 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7:37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은 주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누가복음 13:31에 보면 어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와서 헤롯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일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형식주의와 위선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큰 책망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모의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한 시대에 가장 경건하고 진실한 무리들이 세월이 흐른 후 마귀의 자식이 되어 악을 행하는데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 바로 인류 역사의 비극이다.

문제는 바리새파만 타락하고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 모든 운동이 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유대교를 넘어서 새로이 나타난 것이지만 그 역시 결국 중세 천주교와 같이 세월이 지나면서 세속적으로 변질되고 타락하여서 바리새파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천주교에서 나온 개신교도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거의 죽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항상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회개하고 항상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요한의 경고는 아들(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인격), 아들의 열매 외에 그 어떤 기득권, 특권, 외식도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길가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는 요한의 말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으실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요한은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실 주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의 세례는 그의 세례가 실제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백성들로 그리스도의 임박한 구원과 심판 역사에 대비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주님의 세례는 실제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수행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주님이나 다 같이 '회개하라'고 외치지만 요한의 의미와 주님의 의미가 다르다. 요한의 회개 촉구는 임박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말라고 준비시키는 작업이고 주님의 회개 촉구는 자기 사람을 부르시는 역사 즉 실제로 구원과 심판을 수행하는 수단이다. 불렀을(회개를 촉구했을) 때 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붙이신 자기 백성이고 안 오는 사람은 멸망되기로 작정된 자 곧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르심은 결정적인 것이며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

그러한 주님의 사역에 대해 요한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한 것들을 분류하여 알곡은 곡간으로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없애는 사역이라고 묘사했다. 이런 상황이란 받아들이면 살고 안 받아들이면 바로 죽는 그런 상황 즉 다음에 다시 기회가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고, 듣지 못하는 자, 들어도 반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복이 없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선지자의 사역이다. 선지자는 왕과 제사장이 잘못하고 있을 때 그리고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바른 삶의 길에서 이탈했을 때 나타나서 죄를 책망하고 바른 길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 정상적이고 온전할 때는 선지자가 필요 없다. 언제나 (영적으로) 문제가 있고 위기가 닥치고 멸망과 심판이 임박했을 때 선지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할만한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활동했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가 크게 잘못된 시대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사람도 아니고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해 온 사람도 아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들에게 그런 점도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사정없이 그들의 실상만 드러내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1-9)

이것은 주님이 이스라엘의 열매 없음에 대해 탄식하며 그들 앞에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경고하신 것이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은 멸망해 가는 (사실은 벌써 멸망하여 하나님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은혜로 건짐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사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주님)의 백성이 아니라 남의 백성이다. 소식을 전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다. '아직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놓치면 너희도 끝장이니 사실상 너희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여 있다' 이런 말이다.

세례 요한의 심정이나 세상에 계실 때 주 예수님의 심정은 다 같이 위기의 상황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을 일깨워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려고 하는 마음이었다.

세례 요한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여 일반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주님은 세례 요한이 한 것과 같이 일반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 일도 하셨지만 그 이상으로 실제적인 구원과 심판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 받은 무리에 대해서는 위로와 치유와 가르치는 것과 먹이시고 키우시는 사역을 수행하셨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악한 실상을 드러내며 최후 심판을 경고하는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사정없이 공격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고이고 회개의 촉구였다. 죽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돌이켜 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말을 결국 듣지 않았다. 그런 후 주 예수님이 오셨다. 주님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다" 라고 말씀하셨다.(요8:31-45) 그러나 그 말씀은 회개의 촉구가 아니라 이미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자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예비 심판은 좋은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7,18) 예비 심판은 최후의 본 심판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일생은 어떤 점에서 볼 때 심판의 일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쉴 새 없이 위기가 닥치고 환난이 닥치고 징계가 따랐다. 그것은 그로 최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언제든지 (예비) 심판은 좋은 것이다. 심판을 받지 않아서 잃게 되지 심판을 받아서 잃게 될 것은 없다. 얻으면 얻지 잃지는 않는다. 시험을 자주 치는 사람은 틀릴 것을 이미 다 틀려봤기 때문에 본 시험을 치면 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과 책망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독사의 자식 곧 마귀의 종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서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우리에게 너는 잘못되었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우리와 상관없는 말이며 그런 말이 우리를 독사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우리가 실제로 그런 말을 듣기에 합당한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는 자라면 그 말은 듣지 않으면 안된다. 들어서 자극을 받고 고쳐야 한다. 그것으로 삶을 얻으면 얻지 잃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비) 심판으로 인해 잃을 것은 헛된 자기 의와 그로 인한 교만과 자존심뿐이다. 수치를 당하는 것은 조금도 인생을 망가뜨리지 못한다. 수치스러운 인생을 살면서도 수치를 당치 않고 끝까지 그대로 가는 것이 인생을 망가뜨리지 내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일러주는 자의 말을 듣는 것은 아무런 해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징계와 위로 두 가지이다. 징계와 심판은 우리의 망상과 교만, 착각과 어그러짐을 깨고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와 가르침, 먹이심은 생명을 살리고 키우고 살찌우기 위해 가해진다. 주님은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례 요한과 같이 임박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해 전파하신 후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아무 책망이나 심판도 하시지 않고 오직 사랑과 격려와 위로와 공급을 통해 살리는 일만 수행하셨다. 주님을 영접한 창기나 세리나 강도에게 주님은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책망하지 않았으며 아무 짐도 지우지 않았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해 죽으셨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에게나 되어지는 일이 아니고 오직 그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에게만 되어질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 나는 죽어도 싸며 내 인생은 죽기에나 합당한 쓸모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은혜를 갈구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책망이 필요 없고 오직 살리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 세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멸망할 세상을 향한 것이고 하나는 자기 백성을 향한 것이다. 정기적인 태풍과 홍수, 기근, 전염병, 전쟁, 테러, 사고 등에 의한 혼란과 고통은 멸망당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이고 신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세상이 영구할 것이라고 착각하여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성도들을 향한 직접적인 성령의 일깨우심 즉 직접 성도의 삶에 닥치는 환난과 풍파, 책망과 경고를 통해서 신자의 삶을 흔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 곧 세상을 향한 경고이든지 성도의 경성과 근신을 위한 책망과 징계든지 심판을 날마다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받아들여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졸지 않고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더욱 복이 있다.

지난 추석 다음 날 태풍 매미가 우리나라 남부와 영동지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한 지역 중에는 작년에 이미 태풍 루사로 인해 큰 피해를 겪은 곳도 많다. 이런 태풍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비하면 하나님의 한낱 작은 콧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바람 하나에도 천지가 요동하는 판인데 불과 성령으로 심판하는 주님의 역사 앞에 누가 서겠는가? 인간이 구축한 견고한 구조물과 위업과 역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 천국 곧 주의 날이 이르면 주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태풍과 소란과 격변 속에서 우리 모두가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음성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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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주님의 사역 시작 (마4:12-17) / 2003. 11. 9 이상봉 2010.04.29 4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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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주님의 시험 (2) (마4:1-11) / 2003. 10. 5 이상봉 2010.04.29 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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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모든 의를 이룸 (마3:13-17) / 2003. 9. 21 이상봉 2010.04.29 4122
» 세례 요한의 사역 (마3:1-12) / 2003. 9. 14 이상봉 2010.04.29 3812
23 세례 요한 (마3:1-4) / 2003. 9. 7 이상봉 2010.04.29 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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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황금과 유향과 몰약 (마2:8-11) / 2003. 8. 24 이상봉 2010.04.29 5302
20 라헬의 애곡과 위로 (마2:13-18) / 2003. 8. 17 이상봉 2010.04.29 1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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