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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주 예수님은 3년 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런데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회개와 죄 씻음의 세례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것을 만류하며 세례를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요한에게 꼭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요한은 결국 주님에게 세례를 주고 말았다.  

주님은 왜 기어이 세례를 받으려고 했는가?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내용과 성격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랬는가? 아니면 다만 요한과 그가 행하는 사역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를 높이기 위해서 그랬는가? 주님이 요한에게 기어이 세례를 받으려고 한 이유는 그의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모든 의(義)를 이룬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모든 의란 어떤 의인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가장 타당한 것은 '내 의와 아울러 하나님의 의,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의를 함께 이룬다'는 것이다.

모든 의란 말은 '여러 의'란 말과 같다. 이 말은 의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의를 확보하고 유지해야 할 주체'가 여럿이라는 말이다. 나 자신의 의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의,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의, 내 뒤에 있는 사람의 의... 이런 식이다. 부모는 자기만 깨끗하고 온전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자녀들도 그렇게 되기를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서 경찰에 불려간 부모가 "나는 모르겠소. 내 문제가 아니니 나한테 말하지 마시오. 나는 변상할 수도 없고 합의할 수도 없소. 잡아넣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 의는 확보하지만 자식의 의는 챙기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내 의뿐 아니라 남의 의, 특별히 아버지(하나님)의 의도 함께 생각하며 챙긴다는 말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요한, 나도 당신이 베푸는 세례가 무슨 세례인지 알고 있소. 내가 그것을 받으면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내가 그것을 피하고 안 받으면 나는 혼자 의로운(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남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함 받은 자녀들은 의롭게 될 길이 없게 될 것이오. 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운명을 지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없소.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 반드시 죄인의 세례, 회개의 세례, 죽음의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의만 이루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백성의 의도 함께 이룰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제쳐놓고 자기 생각이나 자기 의나 자기 입장만을 내세울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자기 의와 체면을 내려놓아야만 에 할 수 있는 일이고 주의 신발 끈을 들기도 버거운 요한이 그 자기 주에게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푸는 것은 자기 생각과 입장을 완전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목적만을 생각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자'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과 요한이 다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의를 도모했다.

내 의를 이룬다는 것은 내가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 즉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의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죄에서 건져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려면 즉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그가 백성들에게 약속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 약속이란 (제사나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을 믿고 붙잡는 자를 실제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방법은 의인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의인이 죄인의 운명을 자기 몸에 지고 심판을 받도록 함으로써 죄인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짐을 질 것인가? 사람 중에 의로운 사람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자기가 이러한 목적으로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때가 되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이 마실 쓴 잔을 대신 마시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내 의만 아니라 모든 의 즉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 의를 함께 생각할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의는 내가 의롭고 깨끗하고 진실하게 행동하면 된다. 더러운 자는 의가 없고 깨끗한 자는 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한 몸 깨끗하게 하고 더러운 것(죄) 손에 안 묻히고 살면 내 의를 이루는 것이다. 주님은 그 생명 자체가 진실하고 의롭고 거룩한 생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항상 그 의가 있었다. 주님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자기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례 같은 것은 더더욱 받아서는 안되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자기 의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의를 도모하는 태도이다.

모든 의를 도모한다는 것은 참된 경건을 도모하는 것과도 그 원리를 같이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자기를 지켜 죄에서 건지는 일뿐 아니라 불쌍한 형제들 역시 죄와 고통에서 건지는 일을 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자기만 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모든 의를 도모하는 태도'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 그가 만일 자기만 돌아보았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주님의 본을 따르도록 요구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4-26)

이것은 무거운 짐이나 고역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생명)을 가진 자(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적 사역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묻히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괴로운 일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보존하고 확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시고기는 자기를 최후의 순간까지 희생하여 새끼를 키우고 죽는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에 그것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의 사람은 다 아버지께 복종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당연히 그 음성을 들으며 그가 함께 내신 자들을 사랑하며 그 안에(아버지와 형제들 안에) 거한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탄의 거짓말과 망상이 들어와서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탄의 거짓말로 인해 사람 안에 많은 복잡한 생각이 생기고 많은 복잡한 일이 생기고 이것을 할 것인지 저것을 할 것인가 선택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주님도 인생의 자리에서는 고민이 있었다. 십자가(죽음)란 육신의 생존 본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갈등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결론은 결국 지음 받은 대로, 새겨진 생명대로 가는 것이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7,28) 이것이 진실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의를 도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도모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더러운 창녀와 결혼했고 그가 달아나면 다시 가서 돈을 주고 데려와서 사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를 도모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도모하는 사람의 삶이다.

주님의 경우 하나님의 의는 자기를 사람들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제단(십자가)에 내어줌으로써 확보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의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해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사실 즉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구원)를 붙잡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가 없을지라도 의롭게 된다는 약속이 성실하게 지켜질 때 확보되고 유지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나님의 의를 도모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어린양이 되어 사람들을 위해 드려지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1-26)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화목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희생되는 길 외에 하나님의 의와 예수를 믿는 자의 의가 동시에 확보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위치에 갖다놓으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의를 도모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곧 호세아를 비롯한 주님 이전의 많은 선지자들과 주 예수님과 또 주님 이후의 많은 사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에게 각각 십자가를 지워진 것처럼 십자가가 지워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 곧 모든 하나님의 사람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영광)가 이 땅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는 날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이름, 영광)만 돌아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름, 영광)도 돌아보아야 하며 형제들의 의도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9-13)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렸다. 주님의 세례 받으심은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마귀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회복이다.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회복한 것이다. 인류의 실패는 자기를 높이려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살려고 나를 지으신 분을 배신하는 자리에서 천국 문은 닫히고 지옥 문이 열렸으며 생명의 문이 닫히고 죽음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요한 앞에서 세례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께 순종했다. 세례는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수용했다. 이것은 주님이 사람의 자리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아들의 자리로 돌려놓으신 것이다. 이것은 큰 승리이며 근본적인 회복이다.

둘째, 주님의 세례 받으심은 부활의 문을 열었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모든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기를 드리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늘 문, 부활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심으로써 죽음 너머에 있는 하늘 문, 부활의 문이 활짝 열렸다.

주님의 세례(죽음)은 사망 권세를 깨는 세례(죽음)였다. 내가 안 갈려고 하는데 누가 와서 억지로 나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를 기꺼이 그리고 스스로 죽음에 내어준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쓰여진 모든 것은 결국 도로 살아날 수밖에 없다. 땅에 묻힌 밀은 죽는 것 같지만 도로 살아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법칙대로 드려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사망(죽음) 권세를 무력화시켰다. 주님의 세례(십자가)는 사람들을 천국(부활 생명의 세계)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마귀의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천국 문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은 오직 사람이 자기를 비어 아버지께 순종할 때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12:24-31) 마귀가 쫓겨나고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도록 자기를 드릴 때 되어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은 아들의 복종에 대해 이렇게 화답하셨다. 주님이 최후에 실제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하셨을 때에도 아버지는 같은 음성으로 화답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12:28)

왜 하나님은 주님의 세례 받으심에 대해 그렇게 기뻐하셨는가? 그것은 진실로 그가 (자기 것을 도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의와 기쁨과 영광을 도모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은 다 자기 죄를 위하여 받은 것이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다 자기 죄를 위하여 한 것이며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했지만 그것은 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것이었다. 오직 한 사람, 주님만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고, 오직 한 사람, 주님만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렸고, 오직 한 사람, 주님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9-13) 그의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만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로부터 증거하신 것이다.

인생의 영광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 도모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영광을 도모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자기를 드리는데서 온다.


이제 세례의 본질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자. 세례는 무엇인가? 세례는 끝내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큰 기대와 흥분을 가지고 "아!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생활은 참으로 복되고 놀라운 것이다. 내가 이전에 왜 이 세계를 몰랐는가" 라고 말한다. 참으로 그렇다. 새 삶이 시작되고 새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참으로 신나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좋아해서는 안된다. 좋아해도 내가 가는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좋아해야 한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 놀라운 교회 생활은 머지 않아 나를 끝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결혼한 부부들은 이전에 결혼하기 전에 가졌던 모든 기대와 기쁨과 흥분이 낙심과 회의와 포기로 끝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희망으로 시작된 것이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끝냄이다. 거의 모든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끝내며 거의 모든 아내들이 자기 남편을 끝내준다. 그러나 이 끝냄은 매우 긍정적인 끝냄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새 싹이 트기 때문이다. 이 싹은 부활 생명, 천국, 영생의 싹이다. 오직 죽음만이 부활을 가져온다.

우리의 교회 생활은 이제 여러 해를 지나가고 있다. 우리의 가정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교회 생활도 처음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흥분과 기대와 다정함과 재미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우리의 생활에는 종종 권태와 피곤함과 절망과 무관심과 무기력이 나타난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고 시험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더 크게 보면 그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당연하고 정상적인가? 세례가 실체적으로 역사하고 경험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십자가와 죽음, 자기 부인이 처음에는 단지 선포 즉 선언적이고 수사적이고 이상적인 말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갈수록 그것은 실제적 경험이 되어간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던 죽음, 말로만 하던 십자가가 정말로 다가 온 것이다.

주님의 세례 받으심은 예식(의식)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오직 실제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자기를 드린 것이며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주님이 요한에게 받은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회개의 세례이다. 이것은 실제로 의인이 죄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요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며, 구원하는 자가 구원 받을 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하신 것은 오직 한 이유 모든 의 곧 아버지(하나님)의 의와 그 아버지의 뜻대로 부르심 받은 자들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주님의 순종과 희생과 낮아지심 덕택에 살았고 의인이 되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이 순종과 이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는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은 그의 사역의 기반이 십자가에 서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물론 아직 죽지 않았고 부활도 안했지만 사람들이 3년 동안 진행되는 그의 모든 사역이 전적으로 십자가(죽음)와 부활의 바탕 위에서 수행되고 있음을 알기 원하셨다. 그는 영광과 승리의 때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언제나 십자가를 함께 말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마17:1-9)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눅9:28-31)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내용은 다름 아닌 '별세' 즉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의 영광, 그의 승리, 그의 사역은 전적으로 십자가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길 안에서도 분명하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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