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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즉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운명을 확고히 하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들으신 후, 주님은 성령께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1.주님이 시험을 받으시게 된 과정

주님의 시험에 대한 기록을 접하면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의문은 주님이 무엇 때문에 광야로 나갔으며 무엇 때문에 거기서 40일이나 금식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그를 이끌어서 그렇게 되었으며 그 까닭은 주님으로 시험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흔히 성령님이 이끌었다 하면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와서 덮어놓고 "광야로 나가라", "금식해라" 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이고 어떤 면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마도 성령님은 주님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가지 않으면, 그리고 굶지 않으면 안될 어떤 환경을 조성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여건에 처하도록 자연스럽게 역사하셨을 것이다. 주님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은 그러한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하신 것으로 또는 최소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이 광야로 나가서 금식을 한 것이 마귀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라는 부분이다. 우리의 의문은 사람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려고 일부러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찾아와서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일은 마귀의 시험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을 피하고 물리치는 것이다. 한 번 마귀의 시험에 걸려서 넘어진(타락한) 인생,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생이 마귀의 시험에 직면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거리가 될만한) 곤고한 여건을 일부러 만든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악한 자-마귀)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주님의 뜻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런 주님이 시험을 일부러 자청했다거나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하여금 시험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환경을 조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욥의 경우처럼) 마귀의 시험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셨을 따름이다.

하나님이 마귀의 시험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마귀는 항상 사람을 시험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마귀는 특별한 사람을 어떤 특별한 때에 시험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항상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하는 자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이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지켜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1,32)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우리 모두는 벌써 마귀의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주님과 마귀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일이라 할 것이다. 사실 주님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금식을 했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말한 것이다. 성경에는 결과를 원인으로 말하는 표현법이 종종 등장한다.

예컨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이 주님의 옷을 놓고 제비뽑기를 한 것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9:24) 그러나 군병들이 성경에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성취하게 하려고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의 행동이 성경 예언을 성취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현법 상으로는 결과를 원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에 대해 예언한 성경 구절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성취하려고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 사무엘하 24:1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도 분명히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문자대로라면 하나님이 다윗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시켰다(시험하셨다)는 것인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증거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켜 말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법이지 사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려고 광야로 나가서 40일을 금식하셨다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 할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지 시험을 받으려고 일부러 광야로 나가고 일부러 굶었다는 것은 아니다.

왜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가? 그것은 주님이 만일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대로 일부러 시험을 받으셨다면 주님의 삶의 환경과 시험 그리고 승리는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며 그렇다면 그의 승리 역시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 승리와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매인 우리의 자유와 승리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처한 환경과 동일한 환경에 처할 필요가 있었고 우리가 받는 것과 동일한 시험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주님은 실제로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우리와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시험을 겪으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4-18)

당연한 말 같지만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많은 신자들이 주님을 신기한 능력을 지닌 특별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같으면 시험을 받지 않는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고프고 때려도 안 아픈 사람이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슨 시험을 받겠는가? 시험하는 자가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것을 시험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주님에게 그런 환경을 조성하고 시험했다는 것은 주님이 오늘 여기 있는 우리와 같은 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쉬워도 똑같이 쉽고 어려워도 똑같이 어려운 것이다. 주님은 인생(인간)이었기 때문에 만일 인생의 자리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면 주님 또한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은 인생과 다른 분으로 와서 다른 능력으로 해결했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대표적 인생이 되셔서 인생의 능력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2.주님이 받으신 시험의 의미

주님의 시험은 양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주님의 시험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허용)에 따라 성령에게 이끌려서 받으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가 (적극적으로) 한 것이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도록 허락하셨는가? 그리고 마귀는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는가?

(1)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목적

먼저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목적은 분명하고도 간단하다. 그것은 주님을 그 부름 받은 자리에서 넘어뜨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열러 오신 주님을 넘어뜨리면 천국은 서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마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았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확고히 서게 되면 사단의 나라는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마귀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러 나선 때부터 그의 나라(마귀의 나라)가 무너져 끝장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주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길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한 것이다.

마귀는 이미 예수님의 탄생 무렵 때부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다. 헤롯을 통해 예수 탄생을 전후로 하여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임으로 주님의 탄생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나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려고 했을 때 곧 천국 복음을 전하시러 나설 때에 즈음하여 주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한 것이다. 주님이 탄생할 무렵에 물리적인 방법으로 주님을 제거하려던 마귀는 이제 시험이라는 영적인 방법으로 주님을 무력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주님과 마귀의 싸움은 땅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으로서 왕권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임금으로서 이미 자기에게 속은 인류를 계속 지배함으로써 자기 왕국을 유지하려는 마귀와 이 땅에서 마귀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며 만유의 주로 땅을 지배하시려는 주님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이 싸움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싸움은 왕권의 싸움이기 때문에 마귀는 예수님의 왕권에 대해 시험을 한 것이다. 마귀가 주님께 시험한 내용은 다 주님이 모든 만유를 지배하는 왕인지 아니면 세상의 어떤 것에 매여 종 된 자리에 있는지를 시험한 것이다. 특히 마귀는 주님이 삶의 기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시는지를 시험하려 하였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용하신 목적

첫째,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이다. 마귀의 시험에 걸려 하나님을 떠남으로 실패한 첫 인간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둘째 사람이자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님이 첫 인류가 직면한 것과 동일한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둘째, 주 예수님이 모든 일에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받으신 사람(형제)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 완전하신 참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인생 가운데 형제로 오신 참 사람이다. 그는 사람 중에서도 위대하고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인간의 대표로 사신 분이었다.

그는 사람이었으므로 우리 모두와 같이 모든 일에 항상 시험과 고난을 받으셨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히4:15에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증거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처럼 주님은 자신이 친히 받으신 모든 시험과 고난으로 인해 시험과 고난을 받는 모든 인생들을 깊이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게 되신 것이다. 주님은 사람의 운명을 지신 분이요 사람의 대표로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승리는 (마귀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의 승리요 사람의 승리이다.  


3.마귀가 주님께 던진 세 가지 시험의 성격

마귀가 주님에게 던진 세 가지 시험은 첫째, 사십 일 금식 후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 둘째, 높은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거기서 뛰어 내려보라는 것, 셋째, 세상 영화를 안겨 주겠다고 하며 하나님 대신 자기(마귀)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다.

첫째 시험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이었다. 이는 곧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가'에 대해 묻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둘째 시험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 시험이었다. 이는 곧 참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 시험은 무엇이 인생의 가치인가를 묻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은 결국 많은 고생을 해야 하고 결국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그것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알고 받아들여서 끝까지 추구하겠느냐를 묻는 시험이었다.

마귀가 주님께 던진 시험들은 마귀가 첫 사람 아담에게 던진 시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시험이다. 아담과 하와 역시 이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오늘 우리에게도 마귀는 항상 이 시험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시험과 문제도 언제나 본질적으로 아담이 겪은 시험 그리고 주님이 겪으신 시험과 동일하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언제나 '먹고 살고자 하는 욕망', '하나님으로부터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받으려 하는 욕망', 그리고 '육체의 원함을 따라 세상 재미와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시험에 직면해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필연적 욕망에서 오는 문제이므로 전혀 무슨 시험이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사실은 마귀가 우리로 본래 지음 받은 자리에서 넘어지도록 흔드는데서 오는 시험이다.

주님이 받으신 시험은 인생이 항상 직면하는 이러한 시험이었으며 성령님은 우리로 이 보편적 시험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주님으로 우리를 대표하여 모든 시험을 다 이김으로써 우리의 승리를 확보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을 시험으로 이끄신 것이다.  

이제 주님이 받으신 시험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핵심 내용은 '네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인생(사람)에 불과한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항상 던지는 가장 기본적인 시험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모든 시험은 다 이 목적을 위해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리(位置)'를 흔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외로워도 사람은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의심하며 흔들린다. 여기서 넘어지면 마귀는 단번에 승리하는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는데(잠4:23) 인생이 반드시 지켜야 할 마음이 바로 이 마음 곧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시며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마음이다. 마귀가 던진 시험의 핵심은 주 예수님의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된 위치(자리)'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귀가 처음 말한 것이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마귀의 목적은 사실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위치를 얼마나 확고하게 고수하고 있는가를 떠보는 것이었다. 즉 틈을 얻으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된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어떻게 대응하셨는가? 주님은 극히 주린 상태에 있었고 또한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귀의 말대로 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이 말씀은 인생의 근본 자리를 명백하고도 확고하게 선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주님은 먼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묻기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사람이....살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람의 그 본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목적(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사람은 기적을 행할 수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본래부터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出生) 때문이지 그 어떤 능력을 행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주님은 돌로 떡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주님이 설사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심지어 자기가 주려 죽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받은 시험도 첫 번째 시험과 이런 점에서 성격이 같다. 그것 역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전제를 달고 던진 시험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도 안 다쳐야 한다는 마귀의 말은 무엇인가? 결국 기적과 육신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보장만이 하나님의 아들의 증거라는 말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마귀가 항상 하는 거짓말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고자 할 때 자기에게 무슨 신기한 능력이 있는지 또 어떤 표적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확인하려고 한다. 그들은 외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는 즉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는 주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지금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생명의 특성, 인격적 특성이 땅에서 난 사람들, 곧 세상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외모나 능력 면에서 차이를 가지기 이전에 그 인격이 거룩하고 진실하다는 면에서 세상과 현저한 차이를 나타낼 것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것이 없다면 즉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혹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만사가 형통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의 아들로 사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자기 속에 하나님 아들의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에 아들의 위치에서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둘째로 주님은 그 말씀을 통해 '사람이란 떡으로만 살도록 지음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궁극적으로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 주신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람은 원래 지음 받을 때 흙으로 빚어진 동물적 성분에 하나님의 성분, 곧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감으로써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물적 필요(떡)도 채워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근본적 필요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얻는가? 요한복음 6:63에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이 인격화된 예수님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하며 그것이 있는 한 궁극적으로 죽지 않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생명 외적인 것들로도 근본적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생명의 근본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비로소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심어놓으신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근원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또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게 된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의 근원이다.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와 계시록에 나오는 생명 강 좌우의 생명나무는 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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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례 요한 (마3:1-4) / 2003. 9. 7 이상봉 2010.04.29 3731
22 나사렛 사람 예수 (마2:19-23) / 2003. 8. 31 이상봉 2010.04.29 4217
21 황금과 유향과 몰약 (마2:8-11) / 2003. 8. 24 이상봉 2010.04.29 5302
20 라헬의 애곡과 위로 (마2:13-18) / 2003. 8. 17 이상봉 2010.04.29 1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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