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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의 투옥 후에 사역을 시작하심]

주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투옥된 후 비로소 시작되었다. 주님이 요한과 동시에 사역하지 않은 것은 요한의 일과 주님의 일이 각기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먼저 나서서 주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 그 다음에 주님이 사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고 짧은1년  6개월 정도의 사역을 수행한 후 그의 임무를 마치고 물러갔다. 요한이 사역하는 동안 주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그의 사역을 인정하고 지지하셨다.

요한이 투옥된 것은 사람들의 눈에 사역의 중단으로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그의 사역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걸릴 자들이 걸려 넘어졌음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의 사역은 주님의 사역과 같이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천국 복음을 전파한 것은 한편으로는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연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고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길을 연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사역이 다 결실을 거둔 것이다.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며 돌이키는 사역이었다는 점에서 요한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며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면서 백성들에게 오실 주님을 증거하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많은 백성들에게 효과를 나타내었다. 다수의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를 따르며 순종했다. 심지어 악한 왕 헤롯마저 속으로 그를 인정하여 그의 쓴 말을 달게 듣기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백성들 사이에서 요한이 어떻게 권능 있는 참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6:19,2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눅20:4-6)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이 요한을 그렇게 인정하고 그의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가시처럼 생각하고 그를 제거하려한 자들도 있었다. 헤롯의 정부 헤로디아와 같이 권력에 기생하는 악인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 같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거짓 선생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요한은 일찍이 이런 자들을 사정없이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7-10)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악인들이 듣고 깨달아 고치기를 바라는 목적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결하기 위한 심판의 목적으로 한 것이다. 즉 밭에서 가라지를 걸러내기 위해 시험 돌을 던진 것이다. 그 결과 걸릴만한 자들이 다 걸렸다. 어둠을 사랑해서 끝까지 빛을 거부한 자들은 요한을 가두고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마귀의 자식이며 어둠에 속한, 멸망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러내었다. 요한의 사역은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열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투옥은 사역의 실패나 중단이 아니라 사역의 종결이요 성공인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요한의 이러한 임무 곧 언약의 사자로서 요한의 임무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충실히 수행되었다. 요한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께로 돌이켜진 사람들도 요한의 결실이고 반대로 요한을 거부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도 요한의 결실이었다. 요한은 주님과 같이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기의 임무를 다 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요한은 물러갔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0-12)

도끼로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찍어 심판하시는 이는 요한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요한은 다만 작은 도구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구속되어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요한의 심판은 일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요한은 다만 심판을 선포하는 자였으나 주님은 심판을 집행하는 분으로 오셨다. 요한의 뒤에는 물이 아니라 불로 세례를 주는 진짜 언약의 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투옥은 원수들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주 예수님은 요한이 물러가자마자 요한과 같은 메시지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들고 요한의 뒤를 이었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3,14)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9:11-13)

주님은 엘리야(요한)가 임의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그 시대 상황을 진단하셨다. 주님은 요한의 운명을 보고 자신에게 십자가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음을 알 수 있었고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물러가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우리는 요한의 투옥 뒤에 주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주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그의 사역을 이어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갔음을 안다. 이것은 사람은 유한해도 하나님의 일은 영원하며 사람은 실패하는 듯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한뿐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려지도록 부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까지 일하고 얼마만큼 결실을 거두며 어떤 모양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게 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전개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려지는 인생이라면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감옥에 갇히든지, 죽음을 당하든지) 육체의 모양을 따라 판단될 수 없고 우리 사역의 성공과 실패는 눈앞에 나타난 일의 형편을 따라 판단될 수 없다.

요한은 불과 1년 6개월 정도 일하고는 감옥에 갇혔으며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결실을 거두었고 주님에 의해 계승되었으므로 결코 중단되거나 실패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드려진) 그의 인생은 충분하고 완전했다. 우리도 어디까지 어떤 모양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행했다면 우리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요한의 사역은 혼자 일하고 혼자 결실을 거두는 것이 개인적인 사역이 아니라 큰 하나님의 사역 안에 포함된 한 부분이었다. 그 앞에도 선지자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주님과 사도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죽음으로 끝을 맺었을지라도 하나님의 크고 광대한 사역의 흐름 속에서 승리하는 사역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혼자 있는 자가 아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룬 것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역들은 몸의 승리에 기여함으로써 전체적인 승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하다가 내부적(자신의 약함), 외부적(환경적) 장애물을 만나 좌절을 당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유대가 아니고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함]

주님은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시작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것은 그곳이 이스라엘의 수도일뿐 아니라 성전이 있는, 약속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유대 지역에서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은 유대지방을 떠나 고향이 있는 갈릴리 지역으로 물러갔으며 거기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요한이 배척된 것은 주님이 배척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요한의 자기 이름으로 온 사람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5-11)라는 말씀처럼 주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특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의 정통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 첫 증거가 세례 요한의 투옥과 죽음이었다. 요한은 본래 제사장이 될 사람이었지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위선과 생명 없음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요한은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유대 광야)에서 사역했다. 거기서 요한은 이스라엘 민중들과 지도자들을 상대로 사역했다. 그러나 결국 유대교 지도자들은 헤롯과 합세하여 그를 배척하며 제거하였다.

이것을 본 주 예수님은 아주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가장 소외된 변방 지역들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는 옛 스불론, 납달리 지파의 땅, 해변 길, 요단 서편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는 변방 지역들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이사야 9:1,2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갈릴리 지역은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며 멸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과거 수세기 동안 수리아(아람)나 앗수르 등의 이방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았고 그로 인해 이방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탈(脫)이스라엘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도 무지하였고 종교적 열심도 관념도 없었다.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백성'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무지와 부패, (이방 나라들의 공격의) 위험과 절망 속에서 버려진 무리들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들은 거의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었으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러한 자들에게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하고 계셨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1,2)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눅1:51-55)

왜 그렇게 작정하셨는가? 사람이 육체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6-31)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
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참으로 주님의 사역은 항상 비천한 자와 주리는 자들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 안에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하여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 곧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들만이 주님의 사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적용된다고 했는데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사람들은 은혜에서 배제되고 '이방의 갈릴리'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오직 '아브라함과 그 자손' 곧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한 진짜 약속의 자녀들에만 주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란 바울의 해석과 같이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믿음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즉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도 이스마엘은 참 아들이 아니고 아니고 오직 이삭만 참 아들이었던 것처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갈망하며 사모하는 자들 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곤고한 위치에 있던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큰 일을 행하셨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1:49,50)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상류층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질병과 기근과 무지로 고통하며 멸시받던 '이방의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에게도 자기 아들을 보내셨으며 오히려 그곳에 더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 주님이 자라나며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신 곳이 바로 그곳이었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다니며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으시며 병자들을 고치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자기 곁으로 불러모은 곳 역시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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