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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


베드로를 비롯한 12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1.요한복음 1:35-51에 언급된 부르심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35-44)

2.마태복음 4:18-22 (막1:16-20)에 언급된 부르심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1:16-20)

3.누가복음 5:1-11에 언급된 부르심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눅5:1-11)

4.마태복음 9:9-13 (막2:13-17, 눅5:27-32)에 언급된 부르심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9-13)

5.마태복음 10:1-4 (막3:13-19, 눅6:12-16)에 언급된 부르심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1-4)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


이 다섯 번의 부르심 가운데 첫 번째 부르심은 대략 주후 27년 2월 안드레와 요한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는데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게 된 후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조금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베드로)을 데려왔고 요한도 그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께로 데려왔다.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빌립과 나다나엘도 합류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네 제자들이 완전히 주님을 따르며 사역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 주님과 함께 있기도 했지만 보통 때는 자기의 직업에 계속 종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는 세례 요한이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고 주님은 본격적 사역에 나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르심은 그로부터 약 1년 뒤 곧 28년 2월 무렵에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상황이다. 요한복음 1:35-41에 언급된 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이제 더 확고한 주님의 동반자가 되게 되었고 자기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훈련을 받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자기들의 이전 직업인 어부직을 완전히 청산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 부르심은 얼마 후에 있었다. 이 부르심은 함께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주님의 이적적 능력으로 고기를 많이 잡게 된 후에 있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눅5:10下의 말씀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마4:19下 또는 막1:17下 말씀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제외하면 두 기사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마태복음 4장 기사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고 있었으나 누가복음 5장 기사에서는 호숫가에 서 계신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모두 언급되고 있고 주님은 그 네 사람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경우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신다. 안드레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것이나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마태복음에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고기를 잡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 어부들이 다 그들의 그물을 씻고 있었다. 마태복음도 제자들이 배와 그물, 가족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은 것을 말해주나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고 예수를 좇는, 다시 말해서 이제 어부직과 가정을 완전히 떠나 주님의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상황을 말해준다. 이후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계속 예수님을 따르며 천국 복음 전파에 종사했다.

네 번째 부르심은 마태복음의 저자인 세리 마태(레위)를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어부들인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의 부르심 직후에 있었다. 마태 역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

마태복음 10장에 언급된 다섯 번째 부르심은 열두 제자 전체를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로 세우시는 공식적인 부르심이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이 일에는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제자들의 믿음과 순종(추종), 이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권능 있는 부르심이다. 물론 주님의 부르심을 제자들이 받아들여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도 큰 지혜(판단력)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겸손하고 부드럽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의 평범하고 배운 것 없고 미신을 섬기며 변덕스럽고 욕심이 많은 어부들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게 된 것은 그들을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확실히 사람의 순종보다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훨씬 더 놀랍고 위력적인 역사이다.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게 되었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를 부른다고 해서, 혹은 어떤 사람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있는가? 이것은 결국 능력의 문제이다. 따르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이끄는 자의 능력 말이다. 주님에게는 사람의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모든 계획과 주장을 파하고 당신의 뜻 안으로 복종시키는 권능이 있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주님은 결코 인물이 잘 생겼거나 돈이 많거나 세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육체 안에는 아무 권능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사람들을 추켜세우거나 '장차 당신들을 이러저러한 영광의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도 없었다. 주님이 하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대로 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인격과 말씀을 근거로 사람들을 택하시고 부르셨을 뿐이다. 그런데 그대로 되었다.

주님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적 권세였다. 그 생명은 확실히 권세였다. 주님에게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는 인격과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감동시키고 이끄는 권세 있는 삶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매력 있는 사람들은 육체의 자랑거리과 매력거리를 가지고 사람의 육체와 그 육체에 종속되어 있는 타락한 정신에 호소하지만 주님은 오직 진리를 가지고 사람의 영에 호소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비록 타락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양심은 있는 것이고 희미해진 정신이나마 진리에 반응하는 그 무엇은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에 빠르게 반응한다. 바로 이러한 회복된 마음, 열린 마음에 우리 주님의 생명 권세는 절대적 위력을 발휘한다.

주님이 지닌 권세는 사람을 지으시고 변화시키며 마음을  움직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였다.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주님은 다만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실행했으며 또한 진리로 행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셨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효과를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절대적 효과를 나타내었다. 주님은 오직 생명의 능력으로 사람을 대하시고 부르셨을 뿐 어떤 억지도 쓰지 않았고 어떤 설득이나 애원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나눠주기 위해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붙이신 자들을 찾아서 부르실 따름이었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3-28)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6-39)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똑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똑 같이 주님의 삶(선행)과 표적을 본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따랐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믿지 못하고 의문의 눈초리로 주님을 대했다. 주님은 이에 대해 설명이나 설득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으로 택하시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석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여기 있는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도 주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된 것이지 절대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은 다른 말로 하면 계시(빛)의 문제이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와 생명이신 것과 그의 나라(천국)가 지금 임하였으며 장차 세상은 다 사라지고 오직 그의 나라만 굳게 서게 된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인다면 누구라도 주님을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안보이니까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다시 말하지만 위로부터 오는 계시 없이는 누구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땅에 살면서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리는 것은 계시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땅에서 난 자는 언제든지 땅의 일을 생각하며 오직 하늘에서 난 자만이 하늘의 일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요8:21-24)

주님 당시 주님을 옆에서 (각종 기적과 선행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도 주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결국 어느 선에 가서는 주님을 완전히 떠나고 말았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요6:54-70)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5-17)

결국 끝까지 남는 것은 오직 위로부터 온 계시가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끝까지 잘 따라가느냐의 여부도 전적으로 계시의 정도에 달려 있다.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얼마나 분명하고 풍성하게 비취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우리가 세상으로 가서 사람들을 부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것과 그럴 때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을 설득하여 데려오거나 억지로 제자를 만드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붙이신 자들을 찾으며 모으신 것이었다. 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의 길을 갈 것을 권했는데 한 사람만 반응을 보인다면 그 사람만이 주의 제자가 될 사람이며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우리 형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홉 명은 놓치고 오직 그 한 사람을 얻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일은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라도 억지로 제자를 삼을 수 없다. 복이 있는 사람, 은혜가 있는 사람, 주의 제자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사람이 따로 있고 세상 길을 걷다가 멸망할 사람이 따로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은혜로 사람을 택하시며 부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것을 결정하신다. 그리고 이미 결정해놓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생명을 선명하게 하고 우리 위치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진리에 속한 자이고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로 행하는 사람인 것을 분명하게 한 후 그 길로 사람을 권하고 이끌면 된다. 따라오면 그는 복이 있는 것이고 안 따라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과 역사가 분명하게 말해주는 바는 전체적으로 볼 때 진리의 길로 따라오는 사람은 소수이고 안 따라오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잃어버려지지 않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같이 생명이 분명한 상태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지 않고 그것이 분명치 않은 채로 사람들을 잘못 불렀으므로 올 사람은 안 오고 안 올 사람이 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도 역사의 교훈이다. 물론 하나님의 택하심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겠지만 나팔을 부는 자가 분명치 않으면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기는 것처럼 전하는 자가 주님처럼 생명의 권능을 가지고 선명하게 천국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 관련하여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그들이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개성을 가지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각기 다른 용도로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고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후에 베드로는 천국 건설 사역에 있어서 마치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사람처럼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에게 언제나 제일 먼저 말씀을 증거하여 생명을 낚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다. 그리고 요한은 그물을 수리하는 자와 같이 거짓 무리들의 책동으로 인해 어지럽혀지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들을 수리하며 온전케 하는 일을 했다. 그는 베드로와 달리,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사랑 안에서 온전케 하는 일을 한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언제나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여는 자로서 무슨 일이든지 처음 시작하는 역할을 맡았다.(마16:18,19)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비롯하여 사방의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요한은 제자들 중 가장 오래 살면서 복음서와 그 밖의 성경들을 씀으로써, 또 교회를 순방하며 돌봄으로써 교회들이 처음에서 벗어나 그릇 행할 때 그것을 수리 보완했다. 만일 사도 시대에 교회들이 마귀의 공격을 받아 이단과 거짓 교훈에 빠지지 않고 다 순수하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그릇 행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에 대한 성경적 언급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때로 허용하심으로써 교회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후대에 알려 주실 수 있었다. 이런 일의 많은 부분을 요한이 담당하였다.

이처럼 주님께 부르심을 받을 당시의 우리 인격의 특성이나 직업 등은 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장 합당하게 쓰이도록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 같지 않더라도 다 하나님께 합당하고 적절하게 쓰일 수 있다. 꼭 내가 남과 같아야 하며 남이 가지고 있는 그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주님을 따르면 된다.


또 하나,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부름의 절대성과 엄중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같이 놀거나 이야기나 나누며 친구하자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천국을 건설할 일군이 되도록 부르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전에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있었다. 고기를 잡는 어부라는 직업과 가족을 돌보는 일(가정생활)과 개인적 사회 생활, 취미 생활이나 오락 등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로 그 모든 것들을 버려 두고 전혀 다른 일을 하도록 전혀 다른 세상으로 불렀다. 그들은 이전에는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사람을 건지는 어부가 될 것이며 그물을 깁는 어부였으나 이제는 사람을 고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심심풀이로 주님을 사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세상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선택을 하며 결정적으로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며 도우신다. 그러나 결국 우리 일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주님의 목적을 위해 쓰이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강제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비추시는 빛에 주목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의하며 달갑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제자들은 사실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들로서 아무 능력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러 나갔는가?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르면서 결국 주님과 함께 세상을 구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실 자격은 놔두고 주님을 따를 생각이나 마음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는 일에 나섰으며 그 일을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건지러 나서서 무언가를 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이루시며 이루셨으며 장차 다 이루실 것이라는 소식 곧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든지 심판하든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에 어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당신을 나타내시며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전파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천국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원수(마귀)를 쫓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며 다스리시는 것이다.

주님은 여러 사역을 했으며 여러 기적들을 행하셨다. 제자들도 그랬다. 그러나 주님과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약한 자를 강건케 하고 기적으로 떡을 공급한 것은 그 자체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령이 세상에 오셔서 이면에서(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과 감화의 역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일이 있다는 사실, 곧 천국이 임했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이었다. 우리도 이것을 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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