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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음

세상에서는 아무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고 오직 부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즉 영이 가난하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경건의) 상태가 가난하다(보잘것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결코 복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직 자신의 영에 대해(영적 상태에 대해) 가난을 느끼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자신의 영적 가난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51편의 용어를 빌자면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타락과 죄로 인한 자신의 영적 궁핍과 초라함에 대해 자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결코 교만하지 않으며 아무 할 말이 없고 오직 마음이 물 같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서 다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5:8)라고 부르짖을 따름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또한 자신을 참으로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떤다. 이들은 자신의 전적 부패와 무능과 무력을 깨닫고 자신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기대한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돌아보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66:2)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심령(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즉 그 소망과 욕망, 생각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 단순함이 바로 가난이다. 이런 사람은 이 땅에서 어떤 다른 것으로 부유하게 될 마음이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 자기 삶이 채워지며 부유하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아는 빛과 천국을 아는 빛이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 자기를 드리며 영원한 것을 위해 인생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유하고 자기(육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가난하게 된 그 사람이 바로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재산이나 외적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우리를 덮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우주적으로 임할 때, 사람이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과 권력과 명예와 기타 모든 외부적 환경들은 다 바람처럼 꿈처럼 사라지고 오직 그 사람 자신(의 인격과 생명)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가난한 사람은 비참하게 될 것이고 그때 부유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때 누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누가 하나님 앞에서 부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 곧 마음이 부유하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고, 하나님밖에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서는 가난하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자로 서게 될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 5장에서는 심령(영)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지만 누가복음 6장에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사람 간에 무슨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누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세상에서 가난하고 곤고하여 다른 소망, 다른 분깃이 없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난한 자리에 선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잠30:8,9) 주님 당시 마음이 가난하여 주님을 먼저 영접했던 사람들은 부자들이나 학식 있는 사람들 또는 종교적 지위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 대개 돈 없고 배운 것 없고 죄가 많아서 자기 의를 내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창녀나 세리와 갈릴리 서민들이 바로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하다.  

하나 덧붙일 사실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마음이 가장 가난한 사람은 역시 주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별도의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었다. 오직 그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자기 목적, 자기 계획, 자기 때(時)라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일하시면 그도 일하고 아버지가 안식하면 그도 안식하는 분이었다. 주님이라고 해서 당연히 그런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님도 자기 목숨이 소중한 줄 알았을 것이고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육신의 원대로) 꾸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자신에게는 가난하고 하나님께는 부요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직면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것이다. 그래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한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주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천국은 장차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을 마음과 삶을 지배하는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 안에 임하는 복과 은혜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곧 구원이다. 그러므로 현재 구원을 누리는 자가 천국에 속한 자이며 이는 곧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자기 안에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서 사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서로 상반된 두 종류의 인격이 대조되고 있는데, 하나는 비록 자신이 부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부요한 사람이다. 바로 서머나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들이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8-10)

서머나교회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큰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그들은 참으로 '환난과 궁핍'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그러한 환난 속에서 더욱 강화되고 그들의 생명은 더 풍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상은 부유하였다. 하지만 서머나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도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기의 영적 상태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귀와 치열한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적과 실제로 싸우고 있지 않은 무사는 언제나 그의 칼이 충분히 날카로우며 그의 칼 솜씨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과 조우하여 힘겹게 싸우고 있는 실전 중의 무사는 아무도 그의 칼이 적을 상대하기에 충분히 예리하며 그의 힘과 그의 지혜와 검술이 충분히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적을 처리하기에는 버거우며 아무리 뛰어난 솜씨도 죽기를 불사하고 덤비는 적을 손쉽게 처리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만족(교만)이 없으며 항상 긴장과 조심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다.

영적 싸움 중에 있던 서머나 교회 신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조금도 마음이 부유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그들을 죽이려고 덤벼들며 불 시험을 던졌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의 마음이 부유(교만)하다면 그는 삶 속에서 마귀와 실제적으로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음이 틀림없다.

서머나교회와 반대의 자리에 있는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였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5-17) 서머나교회 사람들의 마음이 가난한 것과 대조적으로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부유하고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그것은 그들에게 많은 지식과 이전의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부자였던 사람, 전에 권력의 자리에 있던 사람만이 지난날을 추억하며 이전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교회는 전에 영적 면에서 상당한 정도의 성취(영광)를 이루었던 교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상태에 놓여 있다. 지금 부유한 것은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뿐이다. 생각만 부유하고 교만한 것이다. 주님은 이런 자들이 천국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셨다.

우리도 자신을 살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좇기에 적합한 가난한 마음인가 아니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처리하려고 나설 만큼 부유한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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