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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서론 / 2003. 4. 6

2010.04.29 09:53

이상봉 조회 수:6856

오늘부터 마태복음을 함께 상고하고자 한다. 오늘은 먼저 마태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미리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을 함께 생각하겠다.

[첫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첫 번째 성경이다. 첫째라는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순서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이므로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할 가치가 있다. 마태복음이 성경 가운데 맨 앞에 놓인 이유는 첫째, 이 책이 복음서이기 때문이고, 둘째,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서도 마태복음이 맨 앞에 놓인 것은 이 책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복음서가 신약 성경 가운데 제일 앞에 놓인 것은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상, 및 사역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가 신약 성경 가운데서도 맨 앞에 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은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에게 약속하신 바 '메시야로 말미암는 구원',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라는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시각에서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구약 성경(새 언약에 대한 예언의 책들) 다음에 바로 놓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신약성경이 무엇인지 즉 신약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신약 성경이나 구약 성경이나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는데(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둘째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시대를 구약 시대라고 하고, 아들로 말씀하신 시대를 신약 시대라고 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아들로 말씀하시지 못한 것은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인격)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인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지 선지자라고 불린 당신의 종(使者)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단편적으로 나타내실 수밖에 없었다.

구약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자로는 우리가 잘 아는 모세와 엘리야, 이사야 등이 있다. 이들은 분명히 성실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이었지만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종이었다. 그리스도가 집 맡은 아들이었다면 그들은 집의 사환으로서 봉사한 사람들과 같다.(히3:5,6) 그것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자기 생명과 인격 안에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아버지의 생명으로 난 사람, 위로부터 난 사람만이 아버지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도들은 선지자들과 다르다. 사도들과 그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지어진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들로서 말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부터 시작되는 모든 신약 성경들은 다 비록 그 내용이 구약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구약과는 다른데 이는 이 책들이 다 종들로 말씀된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씀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생명 안에서 나온 모든 말씀들은 다 하나님을 단지 나팔수처럼 기계적으로 전달한 것이나 혹은 하나님의 뜻을 단편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아들의 인격 안에서 전체적이고 온전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특징이요 마태복음이 그 앞의 구약 성경들과 다른 특징이다.


[복음과 복음서의 차이]

복음이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복된 소식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사람을 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말씀 전파와 이적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일을 하셨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이로써 성령을 세상에 보내셨고 이로써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람에게 알려주는 말씀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 또는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사람이 행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인을 위해 행하신 일, 곧 벌써 다 이루어놓으신 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과 달리 복음서란 이 복된 소식을 권위 있게 기록하여 놓은 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복음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복음서는 복음만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니고 그 밖의 많은 사실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가 복음서라고 불리는 까닭은 이 책이 단지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책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마태의 복음을 담고 있고 마가복음은 마가의 복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복음과 복음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대해]

이 세 복음서들은 그 내용과 관점이 비슷하기 때문에 공관(公觀)복음서라고 불린다. 세 복음서들의 내용이 비슷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일한 저자이신 성령께서 저작자들을 감동시켜서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다 동일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둘째, 세 저작자들 모두 동일한 사실들에 대한 관찰을 기초로 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셋째, 관찰된 사실들이 정확히 전달되었고 그래서 세 복음서들이 전적으로 일치된 구전(口傳)에 근거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복음서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천국 복음을 여러 다른 장소에서 여러 다른 방법으로 여러 번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비슷한 일들을 여러 다른 다양한 장소에서 행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들을 각기 다른 증인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정직한 세 지성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이적을 보거나 동일한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이 보고 들은 바는 일반적으로 완전히 일치하기 어려우며 그 세 증인들 각자의 독자적인 개성과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셋째, 이들 증인들이 관찰한 바의 구두 전달은 비록 본질적으로는 일치 조화를 이루었겠지만 성격상 다양한 양상을 띠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구전이든 기록으로 전해진 문서이든 각 자료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 저자들은 각기 자신의 개성과 교육과 일반적인 배경에 따라서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구상과 목적에 맞도록 성령이 인도하시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마태복음]

우리는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을 가장 먼저 보았다. 전에 우리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2년 동안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그리고 나서 창세기를 공부했다. 요한복음 외에 복음서로는 성경공부 시간에 누가복음을 조금 공부한 적이 있고 수요기도회 시간에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마가복음을 공부한 적도 있다. 그러니 사복음서 중에서는 마태복음이 마지막으로 대하는 책이 되었다.

왜 성경의 순서로는 마태복음이 맨 먼저이고 요한복음이 맨 나중인데 우리는 요한복음을 맨 먼저 접하고 마태복음을 맨 마지막에 접하게 되었는가? 거기에 아주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이유는 있다.

요한복음이 맨 먼저 선택된 것은 그 책이 생명의 책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우리의 구원과 양식이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한 빛을 가장 강력하게 비추고 있다. 이 책이 사복음서 중 맨 나중에 붙어 있는 것은 이 책이 사복음서 중 맨 나중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쓰여진 것은 다른 복음서들이 다 나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한 후이다.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을 반복하여 요한복음을 쓴 것이 아니라 그 책들을 통해 드러나지 못한 사실을 보충하고자 이 책을 썼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의 구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이 책은 생명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근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쓰여진 순서로 보면 거꾸로가 되겠지만 우리는 다른 복음서보다 요한복음을 먼저 읽는 편이 좋다. 다른 복음서는 읽지 않고 요한복음만 읽는 것은 옳지 않지만 처음 선택을 한다면 요한복음을 읽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공관복음서들와 요한복음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떤 부분은 같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인데 서로 내용이 다르다. 이런 부분은 보충적인 성격을 지닌다. 앞에서 말한 사실의 나머지 부분을 다른 부분이 설명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들은 두 종류의 복음서를 함께 읽어야만 그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공관복음서들과 요한복음 사이에 있는 내용의 차이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몇 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요한복음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행해진 주님의 사역보다는 유대 지방에서 행해진 사역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비유의 형식으로보다는 제자들 또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 및 그를 적대하는 자들과의 상세한 대화나 토론의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크지 않은 것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들은 똑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같은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이 복음서들 중 제일 먼저 상고할 책으로 선택된 것에 비해 마태복음이 그중 제일 마지막으로 선택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다만 이 책이 요한복음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많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언약의 성취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상당한 정도의 구약 성경에 지식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요한복음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성경 지식이 축적된 후에 읽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이런 특성은 아마도 이 책이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족보의 기록 여부]

사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족보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왕 곧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로 만국을 다스리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이 왕가의 합당한 후손이며 정통 계승자임을 말하기 위해 주님의 족보를 제시한 것이다.

또 누가는 예수님을 한 사람의 사람으로 제시한다. 그는 주님을 처음 사람 곧 인류의 근본이자 인류의 운명과 생명을 그 안에 품으신 인류의 대표자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주님의 삶을 보통 사람처럼 '과정을 거쳐서'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만 부활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해 주님의 부활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만 보통 사람의 경우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누가복음은 주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뿐 아니라 탄생 과정과 어린 시절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한 사람의 종으로 즉 인류를 섬기기 위해 오신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족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종에게는 족보가 필요 없고 오직 일한 기록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 역시 주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데 그것은 그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에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따라서 혈통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족보를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므로 요한은 주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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