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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멀리서 온 박사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거쳐서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에게 도달하여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돌아갔다. 갈 때 그들은 헤롯에게 들러서 그 위치를 알려 줄 생각이었으나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

박사들로부터 소식이 없자 헤롯은 속은 줄 알고 군대를 베들레헴과 그 근처 동네에 보내어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2:16-18)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인 것은 예수 나이 전후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반드시 화근의 씨를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넉넉잡아 그렇게 한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사악한 일인가! 이 일을 당한 어머니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얼마나 황당하고 참담한 심정이었겠는가!

마태는 이 일로 인해 아이를 잃은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를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애곡 소리에 비유함과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예언으로 제시되어 있는 예레미야서 31장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말씀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각각 바벨론과 앗수르의 침공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포로 로 잡혀간 것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한 말이다. 여기서 라마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집결한 장소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지역 명칭이고 라헬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역시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구약시대에 라마는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사이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왕상15:17) 라마는 예루살렘 북방 8Km 지점에 있었는데 외국의 정복자들이 패배한 무리들을 먼 곳으로 이송하기 위해 집결시킨 장소였다. 이런 위치로 인해 라마는 두 왕국을 동시에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라헬 역시 라마라는 이름처럼 두 나라를 대표하는 이름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기 때문이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에 속한 지파인데 북이스라엘은 나라 전체가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라헬은 (북)이스라엘의 어머니라 일컬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유다의 두 지파 중 하나가 된 베냐민을 낳았으므로 유다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31:15의 그의 예언에서 라헬을 여전히 여전히 살아 있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 비유에 의하면 라헬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라마에 집결되어 있는 비참한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리들의 통곡 소리를 듣고 있던 라헬은 자신도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자기 자식들을 빼앗긴 연고로 라헬은 심히 슬퍼하며 통곡한 것이다. 먼저는 그의 큰 아들인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고(왕하17:8,9) 다음에 그의 작은 아들인 유다가 바벨론에 잡혀갔다.(대하36:17,20)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30:1)고 말하며 자식 갖기를 갈망했던 라헬은 이제 그가 낳은 자식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남은 자식들은 타국으로 잡혀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앗수르, 바벨론)은 그녀로부터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 가버렸다.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묘사된 라헬이 자식을 위해 통곡한 것은 세 가지 각각 다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야곱의 아내인 실제 인물 라헬에게 처음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비록 라헬 사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다 사고로 혹은 피할 수 없는 이유로 잃어버려진 바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유다가 살육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헬에 대해 위로를 예비하고 계셨다. 그 내용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무자(無子)하던 라헬이 요셉과 베냐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요셉과 베냐민을 다 도로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바벨론으로 잡혀 갔던 포로들이 다시 귀환할 것이기 때문이다.(렘31:31-34)

셋째, 예수로 인해 고통과 저주의 세월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늙고 병든 자기 육신 하나의 안락을 위해 권력을 휘둘러 무고한 아기들을 죽이는 사악한 자들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은 헤롯도 바라볼 필요가 없고 아기를 바라볼 필요도 없고 세상도 볼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 31장은 위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위로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를 위한 것이다.(렘31:27,31, 33:14)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 백성을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열국에 흩으신 그들을 다시 거두어 모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라헬은 애곡을 그치고 눈물을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실 것이었다. 남은 자들은 참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단순히 성을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그것이 아니고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기 위함이었다.(렘33:14,15)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실 자는 바로 그 한 의로운 가지였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범죄로 인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살육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고통을 겪는 것을 하나님이 마음 깊이 탄식한 사실을 라헬이 그녀의 무자(無子)함과 자녀 잃어버림(요셉과 베냐민을 잃게 됨)으로 인해 통곡하는 것에다 비유했다. 그리고 마태는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이 헤롯의 살육으로 말미암아 그 자식들을 잃고 통곡하는 것(과 아기 예수가 먼 애굽으로 피신한 것)을 라헬이 그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살육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인해 통곡한 것에 비유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렘31:15-17)

주의 백성 중 남은 자들(31:7)을 위한 이 위로의 말씀은 예수의 탄생을 통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마태가 여기에 인용한 것이다. 오늘 애통과 애곡이 있는 모든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이 위로를 받아야 한다.


인생이 힘이 드는 것은 자기에게 아직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는 바깥의 환경이다. 내 육신의 형편은 언제나 일정한데 바깥의 환경이 바뀌면 힘들고 괴롭게 될 수도 있고 편안하고 좋을 수도 있다. 농사가 잘 되고 장사가 잘 되고 승진이 잘 되어 경제적으로 풍부하게 되고 왕이나 대통령이 통치를 잘 해서 세상이 살기 좋게 되고 누군가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잘 대해 주면 육신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되니 인생이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로 모든 환경이 좋지 않게 되면 육신은 괴롭고 삶은 그만큼 힘들게 된다.

또 하나는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범죄 후 아담에게 세상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그 죄로 인해 세상을 편히 살지 못하며 고생을 하며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잡아가서 나라가 다 망하게 만든 것이나 헤롯이 아기를 죽이고 백성들을 고생시키는 포악한 통치를 하는 것은 다 세상이 죄 때문이다. 고생을 시키는 환경도 인간의 죄에서 나오는 것이고 고생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죄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이다. 나의 죄와 너의 죄, 그들의 죄와 우리의 죄로 인해 세상이 어렵고 힘들게 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이 이럴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인생을 소위 '행복하게' 살려고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문제의 원인은 환경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생각도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원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생을 설계하고 꿈꾸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욕대로 인생을 꿈꾸는 것이 바로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9-12)

힘든 인생은 한편으로 힘든 환경에서 나오지만 한편으로는 힘들게 살려고 생각하는 '생각'에서 나온다. 부유하게 되려고 한다는 것은 반드시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꿈을 꾸고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씀하신다. 인생을 부유하고 안락하게 보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을 힘들게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는 육신적 여건으로는 오직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한 줄 알고 오직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에게 두고 살려고 하지 않고 편안하고 안락한 인생을 살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생을 힘들게 살려고 작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힘든 인생은 힘들게 살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세상은 과거에도 헤롯과 같은 악인들이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에도 그리고 내일에도 마찬가지로 너의 죄와 그의 죄 그리고 나의 죄로 인해 힘들게 될 것이다. 육신의 괴로움을 완전히 면하고 아무 고통이나 걱정이 없는 자리로 들어가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죽음 아닌 이런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멸망하는 죽음이므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세상과 육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약속 곧 라헬에게 주시는 위로를 바라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근원적으로 없애주려고 오셨다. 그는 인생을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아직 주님에 의해 세상 환경 자체가 처리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첫 하늘과 첫 땅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과 심판 이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것은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각은 거듭나고 새롭게 되었다. 허무한 생각들과 정욕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안에 있는 합당한 생각과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다.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심지어 세상 죄와 권력에 의해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조차 위로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힘든 인생은 힘들게 살면 정말 힘들고 힘을 빼고 허무한 생각과 소망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잡으면 쉽게 살 수 있다. 다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갖고 위로를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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