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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 종교의 헛됨 (롬2:17-29)

2010.05.06 13:36

이상봉 조회 수:3029

 

 

 

제6과 종교의 헛됨



3.복음(구원)의 필요성


3.종교인으로서 유대인들의 실상 (2:17-3:8)


1.바울은 유대인을 어떤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유대인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2:17-2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율법을 통하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상당한 정도로 가지고 있는 자, 즉 율법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선악을 분별할 줄 알고 선을 사모하고 추구하며, 그것으로 능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진리의 인도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큰 자랑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2.과거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다 같이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랑이 다 참된 자랑인 것은 아니며 많은 자랑들이 헛되고 그릇된 자랑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헛되이 자랑하는지 말해 보라.


 

미3: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이전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능히 채워주시고 사람들의 소원을 잘 들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만이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로우신 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능력이지만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인격이고 생명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생명을 더 깊이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되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과 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함이지 계속 하나님과 성질이 다른 사악한 죄인인 채로 남아서 육신의 정욕이나 채우면서 살라고 능력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종교인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다. 종교인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종교인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계시하신 대로) 믿지 않고 자기대로 믿는 자들이다.


 

둘째, 종교인이란 하나님을 믿되 오직 자기 필요를 위해서 믿는 자요, 하나님을 '경배하되' 그와 한 생명으로 연합하여 사는 것은 원치 않는 자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을 '존경하고' '숭배하고' '그 가르침을 좋게 여기며' 심지어 '그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힘써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종교인에 불과하다.


 

셋째, 종교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자기 속에서 생명과 인격이 되도록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만 지식에만 머무르고 마는 사람이다. 지혜(생명)는 그 '자녀'로 인해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지(눅7:35) 그 '학생'으로 인해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육신(인격)이 되지 못하고 다만 머리 속에서만 머무는 사람은 자녀가 아니요 학생일 뿐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믿었으며 또한 믿었을 뿐 아니라 그를 자기 생명 안으로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한 생명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완전하게 육신(인격)이 되신 분이다. 그래서 주님의 인생에는 자기 삶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고 오직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삶은 참으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룬 삶이었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바로 그 자리로 부르셨다. 우리는 종교인으로 부름 받지 않고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부름 받은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본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주변 여러 나라 백성들과 같이 자기 육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인이 되지 말고 말씀으로 자기를 계시하신 그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믿음으로써 그의 세계 안으로 나아오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를 믿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인격)를 경험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국에 나타내며 찬송하는 아들들이 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3.유대인들이 정말로 자랑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누리는 진정한 특권은 무엇이었는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3:2)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롬9:4,5)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누릴 수 있는 여러 특권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일깨웠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와 언약을 기릴 수 있는 성전과 제사제도와 여러 제도적 장치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오셔서 친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셨다.


 

4.율법의 두 가지 기능(적극적인 기능과 소극적인 기능)에 대해 말해 보라.


 

①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롬2:18上,19上)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3:16,17)


 

율법의 적극적인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형식은 법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곧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을 열고 율법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율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3:20, 5: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中保)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19-24)


 

율법의 소극적인 기능은 사람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말씀, 진리)과 반대편에 서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이 (율법을 듣고 행하는 것 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 곧 '은혜'를 필연적으로 추구하게 만든다.


 

5.유대인들은 이 두 기능을 다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율법을 어떻게 그릇 이해하고(사용하고) 있었는가? 다음 말씀에서 예를 들되 위에서 말한 율법의 기능과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말해 보라.


 

①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마12:1-14)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7:1-1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8:3-11)


 

율법을 오해함.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을 (사람을 속박하고 억압하며 정죄하는 도구로) 그릇 사용함.


 

②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롬2:1上)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롬2:22上)


 

말씀에 순종은 안하면서 자기도 실행하지 못하는 그 (진리의)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며 판단함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율법의 일부를 지켜 행하는 것으로 또는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순종(선행)을 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의와 자랑을 삼아(마치 자기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의롭고 거룩한 자인 것처럼 착각하여) 자기의 전체적인 불순종과 거역을 망각하고 덮음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요7:49-51)


 

율법에 대한 지식과 준행을 자기 의로 삼아 자랑할 뿐 아니라 한 하나님으로부터 난 형제를 멸시하고 거절하는 기준으로 삼음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1-34)


 

율법에 대한 작은 순종과 성취가 자아를 높이고 헛되이 마음을 교만케 하여 더 완전한 순종과 자유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음


 

6.유대인들이 자신을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다는 사실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9下)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4)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요9:26-34)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4:3-5)


 

그들은 생명의 성숙과 열매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의 칭찬과 (참 진리의 선생이요 하나님을 아는 자라는) 인정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서로 (헛되이) 높이며 인정하려고 했다.


 

7.그런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고, 즉 생명의 실제와 능력은 없이 스스로 선생이 되려 한(거룩한 모양만 내려 한) 자들이 맺은 그릇된 열매가 무엇인지 말해 보라.


 

"남을 판단하는 ...." (롬2:1上, 2:3上)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3-5)


 

남을 가르치고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러한 판단에 어긋나는 불의를 여전히 저지른다.


 

" ....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2:1下)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2:21-24)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진리와 지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8.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참 선생, 참 인도자가 맺을 열매는 어떤 것인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4-26)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2-14)


 

진리의 내용을 자기 속에서 실현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섬김으로써 자기를 진리의 확대(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역사)를 위한 밑거름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9.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서 항상 조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롬2:2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약3: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20)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곧 자기가 그러한 진리를 다 받아들이고 있거나 누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리의 필요성과 가치를 누구보다도 먼저 절감하여 그것에 대해 외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는가를 항상 살펴야 한다.


 

10.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에 비해 특별히 더 범할 수 있는 죄는 어떤 죄인가?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롬2:23-27)


 

진리를 알고도 진리대로 살지 않고 더 나아가서 진리를 팔아서 육신의 소욕을 채우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이것은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는 죄이다.


 

11.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은 도둑질인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도둑질의 예를 들어 보라. 또 자신이 그런 도둑질을 하고 있지는 않은 지도 생각해 보라.


 

12.오늘날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는 우상 숭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 보라.


 

13.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나타내고 있는 바는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또 이와 관련하여 그들의 현재 상태는 어떠하다고 했는가?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49:8)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43:21)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더 나아가서 모든 인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지음 받고 부름 받은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사52:5)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2:23)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14.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그리스도인)가 추구해야 할 단 한 가지 목적(목표)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두 가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찬양하며 그 영광을 증거하는 것이다. 말과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인격)과 열매(행실)로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1)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5: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8,19)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7-14)


 

그리스도인의 존재 목적은 범사에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 안에서 안식하며 그에게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이다.


 

15.오늘날 소위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과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 경우를 생각나는 대로 들어 보라.


 

16.바울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표시로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2:25)


 

유대인의 표시는 할례이다.


 

17.그것은 언제 처음으로 행해졌으며 어떤 일로 인해 행해지게 되었는가? (할례의 동기는 무엇인가?)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 (창17:1-14)


 

18.할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할례는 무엇의 표시로 행하게 한 것인가?)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17:9-13)


 

아담 안에 있는 육적 생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


 

19.할례의 외적 형식(살을 베는 것)이 나타내고 있는 바 할례의 내적(영적)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7:5,6)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로 말미암는 유대인들과) 언약의 표시로 하필이면 살(陽皮)을 베는 할례라는 형식을 택하신 것은 그 형식이 언약의 내용을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고 아브라함은 그로 인해 큰 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창17:4-8) 그런데 이 일을 이룸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도리어 그가 만일 무엇이라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면 일을 그르치게 될 뿐이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그 약속의 당사자가 되는 사람이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만에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장차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기 위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육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같이 행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표시로서 육을 제거하는 형식을 가진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의 사람이 肉으로(自己로) 행하지 말고 영으로(하나님으로)만 행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몸에 표시한 것이다.


 

20.신약 시대에 있어서 할례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며 그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의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가진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3,4)


 

구약의 할례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세례로 대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부활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은 더 이상 육적 생명으로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만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21.율법을 지키면 할례가 유익하고(의미가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율법 준수와 할례(또는 유대인 됨)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2:25)


 

할례를 행하는 것은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죽음은 사람 속에서 실제로 더 이상 육적 생명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은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으로 행하지 않고 자아로, 육으로 행한다면 그는 실제로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22.유대인들이 율법의 정신을 외면하고 오직 율법의 외형만 붙잡고 있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바울이 율법에 대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인가?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7,29)


 

할례는 영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율법의 (내용과 대비되는) 형식적 요소를 '의문'(儀文)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儀文은 文字(letter), 또는 條文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바로 율법의 '정신'과 대비되는 '형식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율법에서 그 정신은 도외시되고 껍데기만 가지고 생명 없는 논쟁이나 판단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 율법은 특히 '죽은 의문'이라고 불린다. 儀文은 세상 모든 종교에 다 있으며 세상 종교는 그 의문에 의해 유지된다. 불교의 불경이나 회교의 코란, 유교의 경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의문(경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유지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종교의 儀文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외형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도 성경의 문자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는 인격이신 하나님의 役事 안에서만 참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의문이 아니요 영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만으로는 절대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으며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안에서만 완전하고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말씀은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만 구체적이고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곧 영이요 생명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바울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곧 하나님의 편지(말씀)라고 했다.


 

23.바울이 말한 바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할례 그리고 이면적 유대인, 이면적 할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8,29)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는 생명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모든 의식 절차은 다 표면적이고 형식적일 뿐이다. 의식(할례, 세례, 성찬, 예배 참석, 기도와 성경 읽기, 찬송 )은 종종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영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혹 그런 의식을 갖지 않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아들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면 의식은 없어도 무방한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형식(의식)과 내용(실제)이 일치하는 것이다. 만일 내용이 없다면 형식은 없는 편이 더 좋다. 그것은 사람에게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이 없이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4.육신적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두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롬2:29中)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9下)


 

마음의 할례란 육신의 생명이 죽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들어와서 대신 사는 상태 곧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 생명의 변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사람의 생각과 고집이 죽고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전적으로 수용된 상태의 인격을 말한다. 이에 비해 육신적 할례란 단지 육신(외모)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요구했을 때 하나님이 이 중 어느 것을 의도하셨는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무릇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행위는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추구되어야 할 영적 실제를 누리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 실제가 누려지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외형적인 행위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하나님의 칭찬이란 하나님의 인정을 말하는데 (할례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평안과 안식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참으로 알고 있고 참으로 너와 교통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25.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중히 보시지 않는 바 사람의 외모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들어 보라. 또 하나님께서 중히 보시는 요소는 무엇인가?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9:2, 16:7)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2:5上),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왕상8:3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28: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대하16:9)


 

외모란 육체의 모양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의 상태 곧 그 마음과 정신의 어떠함을 보시지 육체의 모양 곧 육체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보시지 않는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얼굴이나 신체의 아름다움과 강건함뿐 아니라 지식과 기술, 능력이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일은 어디까지나 육신을 사용하여 하는 것인데 외모의 좋고 나쁜 여부가 왜 하나님의 선택 기준이 되지 못하고 오직 중심(마음)이 기준이 되는가? 그것은 능력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때문이다. 능력은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 붙어 있고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능하게 하시면 누구든지 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버리시면 아무도 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사람을 그 육신의 모양과 능력대로 취하신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믿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능한 자와 참으로 아름다운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향하고 있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며 그런 사람들을 능하게 하셔서 당신의 일군으로 쓰신다.


 

26.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표면적 그리스도인과 이면적 그리스도인으로 적용해 본다면 어떤 사람이 표면적 그리스도인이고 어떤 사람이 이면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27.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진 것(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자랑과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반드시 무엇이 먼저 있어야 하는가?


 

28.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고 성경도 많이 알며 복음을 바로 알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자랑과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9.사람의 불의와 죄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불의와 죄에 대해 심판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합당한 것인가 아니면 억지나 궤변인가?


 

30.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낸다고 해서 죄를 합리화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그 동기나 결과(열매) 중 하나만 보시지 않고 반드시 둘 다 보시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범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람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동기 면에서도 벌써 틀린 것이다. 또 범죄가 하나님의 은혜는 드러내는지 모르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오직 가릴 뿐이다. 따라서 열매라는 면에서 보더라도 죄는 합리화될 수 없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도 죄를 간과하실 수 없으며 반드시 심판을 내리셔야 한다.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돋보이게 만드니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하거나 범죄와 불순종의 경험이 죄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만드니 유익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그의 은혜와 거룩을 반사적으로 드러낼 때보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열매를 맺을 때 훨씬 더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죄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뿐 아니라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초래하고 그 뜻을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31.예수님은 그를 판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는 단지 자기 악한 죄로 심판 받아야 할 자로 여겨져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하여 어떤 선한 의미 부여가 이루어져야 하는가?(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32.설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해야 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불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1-4)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즉 아들의 생명으로 행하지 않고 여전히 육신의 생명으로 행한다면 죄 짓는 일은 자연스럽고 그것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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