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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과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2010.05.06 14:08

이상봉 조회 수:3381

 

 

 

제15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7:1-6)


거룩한 삶의 길


2.죽음으로 말미암는, 율법(육)으로부터의 자유 (7:1-6)


1.율법은 사람을 언제까지 주관하는가? 즉 법이 사람에게 효력을 미치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롬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바울은 위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비유(例)를 들고 있는가? 그리고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가?


 

(롬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남편은 율법을 가리키고 여인(아내)은 사람을 가리킨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 관계, 곧 까다로운 남편에게 매여있는 무능한 아내의 괴로운 삶은 죽음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인간의 굴레는 죽음으로써만 벗어질 수 있다.


 

3.비유에서 바울은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해방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는 남편이 아니라 여자가 죽음으로써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것으로 말했다. 왜 남편이 아니라 여자가 죽어야만 하는가? 율법과 관련하여 이 사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바울이 비유에서 남편이 죽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죽는 것으로 가정한 것은, 남편으로 상징된 율법은 결코 죽지도(없어지지도) 않으며 죽을 수도(없어질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영원히 존재한다.


 

4.율법이 무엇인가? 율법이 무엇이길래 없어지지도(폐해지지도) 않으며 사람에게 그토록 절대적인 권세를 가질 수 있는가? 사람이 영원히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율법의 권위에 대해 말해 보라.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출18: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레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시119:93)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딤후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어질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하나이다. 율법이란 구약 시대에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반영한 것이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법과 규례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식과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님을 나타낸 것'으로서 지극히 선하고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하여질 수 없다. 율법은 오직 완전케 되고(더 드러나고) 성취되어야 할 것일 따름이다.(롬13:10)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과 교통하는데 사용된 한 수단이므로 그 형식과 내용이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어디까지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도구였으므로 그들에게 적당한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 형식과 내용이 완전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은 완전치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율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율법이 '새 언약을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님' 곧 사람과 교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예비하신 수단이신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비하면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옛 언약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신약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신약(새 언약)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는 당연히 완전치 못한 것이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의문(儀文;법과 문자)으로 된 것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법(法)과 문자(文字)라는 형식 자체가 벌써 하나님을 완전하고 충분하게 나타내는데는 한계가 있는 형식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말과 글로 다 나타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한히 작용할 수 없고 글을 읽고 이해하며 암기하는 동안만 작용한다. 이처럼 의문(儀文)은 영(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그 속에 이미 신약 시대에 와서 성령님으로 대체되고 완전케 되어야 할 여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성도는 율법으로 자기 생명의 원리를 삼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생명의 원리를 삼는다. 율법은 다만 성령 안에서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불린다.(엡6:17)


 

율법은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진행 단계 상 초기에 사용된 수단 곧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방법을 빌어 하나님을 나타내시며 교통하신 수단이요 문자와 법의 형식을 취한 의문이므로 근본적으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할 수도 없고 인간 행위를 세밀하게 규정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려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주어진 만큼은 완전한 것'이다. 그 내용이나 형식이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이므로 마땅히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중하고 진리(인생의 참 길)로서 소중히 여기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5.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율법으로 義에 이르지 못하는(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사람을 살게 하려고 주신 것인데 왜 사람은 다음 말씀과 같이 그것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5,10)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선한 것이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간접적으로는 율법도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율법이 사람을 정죄한 후 무능을 깨닫게 하고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수단으로밖에 작용하지 못한다. 율법이 이처럼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히8:7은 율법에 흠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율법의 내용에 어떤 결함이나 부족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완전치 못하다는 것을 이른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며, 하나님의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 줌으로써 사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한다.(딤후3:15-17) 이것이 율법의 적극적인 기능이다. 이 점만 놓고 본다면 율법은 분명히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율법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 사람은 죄인이요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그대로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알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와 무능을 깨달을 뿐이다. 이것이 율법의 소극적인 기능이다.


 

아담의 자손 중 율법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사람은 많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거룩하게 된 사람은 거의 없다. 거룩하게(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된 사람도 알고 보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처음 의도하신 목적은 그것의 소극적인 기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신의 죄와 무능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은혜(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는 사람은 이전에 주어진 율법을 정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수단과 통로로 쓸 수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사람에게 주신 모든 말씀을 도구로 삼아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가르치시며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소 율법은 그것의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율법으로 구원(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타락 후 사람은 이제 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육에 속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받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로 인해 (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죄성이 자극을 받아서 죄를 더 많이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이 온전한 것이냐 온전하지 않은 것이냐를 말하기 전에 자신(인간)이 온전하냐 온전치 않느냐를 먼저 보아야 한다. 사람은 율법 뿐 아니라 그 어떤 좋은 것이 오더라도 그것을 색욕거리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먼저 보지 못한다면 어떤 것이 와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육신과 율법은 맞지 않다. 그것은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오직 육신에게는 십자가가 맞고 은혜가 맞다. 율법은 십자가를 거친 사람에게라야 맞는 것이 된다.


 

6.우리는 지금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놓여 있지 않다. 어떻게 우리가 죽음으로써 (우리를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율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가?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 우리가 포함되어서 죽은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누리는 죽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다. 이 죽음은 가정적이고 주관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귀가 다 함께 인정하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역사적인) 죽음이다.


 

7.'율법에서 벗어났다'(롬7:6),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갈3:13,4:5),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롬8:4) 등의 말로 표현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해방)}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인가?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5:1-4)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고전9:19-22)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롬7:4,6)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5:13-16,2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마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궁극적 목적은 육신을 좋게(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몸)으로 하여금 영을 좇아 하나님을 보다 완전히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그의 영원하신 아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찬송하고 그를 높이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은 더 나아가서 우리로 그의 영원하신 아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사랑하며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지으신 본래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창조 받은 자의 길 뿐 아니라 구속받은 자의 길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 성령님의 역사 등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악된 몸을 이롭게 하거나 안락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불러 하나님을 찬송케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8.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써 우리는 전에 우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에서 해방되었다. 무엇 무엇으로부터 죽고 해방되었는지 말해 보라.


 

(롬6:2,11)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육신의 연약함을 틈타 쳐들어 오는 {죄}를 거부할 수 없고, 그 결과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세상 외에는 그의 소망이 없고 거처(居處)가 없기 때문에 {세상}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거듭난 사람은 죄와 상관없는 생명 또는 죄를 이기는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 생명으로 행하는 한 범죄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항상 맺을 수 있다.(요일5:18) 그러므로 죄에 대해 죽고 자유하는 것이다.


 

또 율법의 요구(그것은 최악의 경우 못 지킨 대가로 사형을 요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또한 그리스도의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따라 우리는 율법이 요구한 것 이상을 이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고 완전히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안에서 새롭고 복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더 이상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서 방황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새로운 안식처, 참된 거처를 얻었기 때문에 세상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또한 우리가 지금 누리는 생명은 세상에 맞지 않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자들의 세계요 죄의 세계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죽고 자유한다.


[로마서 7장의 의미]


 

바울이 복음 진리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의 처리와 헌신]에 대해 말한 로마서 6장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해 말한 로마서 8장 사이에 [사람(육신)의 희망 없음]에 대해 말한 7장을 끼워 넣은 까닭은, 그리스도인이 복음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육신(죄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종종 그런 육신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일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자신이 완전히 처리되고 또 그의 부활 안에서 자신이 새 사람으로 지음 받았음을 확실히 깨닫고 믿음으로 실제적인 헌신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종종 자기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여전히 육체의 능력을 신뢰하고 율법을 붙잡는다. 자기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망각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때로 "육신에"(롬7:5) 또는 "육신에 속하여"(롬7:14) 있을 수 있으며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롬7:18)는 고백을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영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을 좇아 행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진리(롬8:8)를 말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그러한 실상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의 도움을 통해서이다. 모든 사람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고서도 여전히 죄에 매여 있다. 이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바울이 앞에서 말한 여러 복음 진리(특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우리의 죄와 자신이 완전히 처리되었으며 이제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진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헌신하려고 하니 잘 안되더라는 것이다. 어째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실패하고 마는가? 이런 사람은 결국 다음과 같은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8,19)


 

로마서 7장은 기본적으로 롬6:14의 말씀을 깊이 설명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단지 죄로부터만 해방된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었음을 잘 모르고 있다. 즉 우리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데에서도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율법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율법은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다. 은혜란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는데까지 이끄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율법이란 그것과는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요구가 바로 율법이다.


 

만일 '율법'이 하나님의 요구를 사람이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를 직접 이루어 드리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하나님이 친히 그의 능력으로(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롬7:14이 말하는 바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로마서 7장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할 것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든지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도로 율법 밑에 놓이게 되며 그 결과 좌절과 절망밖에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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