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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과 - 사망의 몸으로 인한 갈등

2010.05.06 14:10

이상봉 조회 수:3331

 

 

 

제16과 사망의 몸으로 인한 갈등 (7:7-25)


거룩한 삶의 길


3.육신에 거하는 죄성으로 인해 율법을 좇아서는 의롭게(거룩하게) 될 수 없음 (7:7-25)


1.육신의 실상을 드러내는 율법 (7:7-13)


1.율법에 대해 죽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어떻게(무엇으로) 섬기지 말고 어떻게(무엇으로) 섬겨야 하는지 방법에 대해 말해 보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7:6)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오신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간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시행하던 '묵은' 방법은 [언약의 표징]인 [율법]을 힘써 붙잡는(지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고 언약서(율법)의 내용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드리며 사회 질서 유지와 거룩한 삶을 위해 주어진 각종 규례들을 지켜야만 했다.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명이 있든 없든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 옳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던) 당시 사람들의 속에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요구(율법)는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이러한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사람 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완전한 하나님(아들)의 생명으로 능히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의 이기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자기의 택한 자들을 자기 안에 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하나님 섬기는) 방법은 우리가 자기(자기 생명)를 부인하고 그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하나님을 완전히 섬길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새 방법은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사는 것'이다. 범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아들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두 길(방법) 간의 차이는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결과에 있다. 목표는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나 영으로 행하는 사람이나 다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정과 결과는 다르다. 자기 힘으로 곧 육신의 능력으로 행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없는 힘으로 해야 하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척 힘들고 고달프다. 그러나 영을 좇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다만 믿는 일 곧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그에게 조용히 순종하는 것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특별히 힘들지 않다. 그리고 결과에도 큰 차이가 난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은 결국 자기 의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라는 탄식만을 내뱉을 따름이다. 그러나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그의 원대로 능히 하나님을 섬겨서 마지막에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묵은 방법은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고 새 방법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친히 무엇을 행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새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돕지는 못한다. 그러면 율법은 우리에게 무슨 작용을 하는가?


 

(롬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자기를 알게 한다. 자기의 죄인됨과 무능함,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 마귀의 지배하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것은 꼭 필요한 기능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길인 '그리스도를 믿는 삶'으로 인도한다.


 

3.사람은 율법을 깨달음으로 인해 죄를 더 적게 짓게 되는가? 아니면 더 많이 짓게 되는가? 아니면 율법과 범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7:8-11)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인생의 바른 길을 알게 된다고 해서 반드시 죄를 버리고 바른 길로 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대부분의 도덕주의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그런 지식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범하는 죄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은 자기 양심을 속이기 위해 더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방법으로 범죄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율법이 주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죄를 더 짓게 되는 것도 아니다. 율법을 모르던 사람이 율법을 알게 된다고 해서 일부러 법을 어기며 범죄하는 재미를 맛보려고 애쓰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인간은 율법과 상관없이 범죄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이 있든 없든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인생의 갈 길이 무엇인지 알든지 모르든지 범죄한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모든 인류는 오직 자기 (육신의) 필요에 의해 범죄한다. 그것은 지식과 상관없이 그 (죄악된) 생명을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곧 율법을 따라 깨달은 바른 길로 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좀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율법은 종종 자신들의 죄성을 자극하여 더 죄를 많이 짓도록 하는 역할을 하곤 한다. 이것은 율법이 억지로 '없는' 죄를 드러내려고 무슨 특별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억지로 '없는' 선(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데서 파생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는 율법이 없을 때보다 율법이 들어온 후에, 즉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애쓰게 된 후에 훨씬 더 실패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율법이 없을 때는 사람이 제법 살아있는(괜찮은) 상태였는데 율법이 오자 죄가 더 심해지고 사람은 완전히 죽은 상태 즉 더 심한 죄인이 된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율법은 주어지지 말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까닭은 무엇인가?


 

(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죄와 죄성이 확실하게 드러날 때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2.육신으로 말미암아 곤고한 사람의 투쟁과 승리 (7:14-25)


 

5.바울이 로마서 7:14-25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바울 자신을 포함한 신자의 내적 갈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성숙하지 못한 초신자 또는 유대인과 같이 그리스도는 모르고 율법만 알고 있는 종교인들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견해는 여기 묘사되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 곧 불신자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여기 묘사된 불신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다시 두 가지 설로 나누어진다. 그 중 첫째 설은 여기 묘사된 사람이 율법조차 알지 못하는 완전한 불신자라는 설이다. 그러니까 여기 묘사된 사람이 완전히 비종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그런 비종교인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봉착하며 또 여기서 마치 바울 자신이 현재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이 설의 주장자들은 죄인일지라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바울이 일인칭 화법을 쓴 것에 대해서는 죄인의 일반적인 갈등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바울이 표현기법상 그런 일인칭 화법을 쓴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첫째 견해의 두 번째 설은 여기 묘사된 사람이 율법도 알고 하나님도 알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즉 여기 묘사된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유대교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선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행할 생명의 능력이 없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여기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한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실제로 전에 유대교의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거듭나기 전의 바울은 원함과 행함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빌3:6) 그리스도인이 된 현재에 와서는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그때의 갈등 상태를 깨닫고 그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견해는 여기에 묘사된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견해이다. 즉 여기 묘사된 경험은 불신자의 갈등이 아니라 신자가 겪는 일반적인 내적 갈등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도 여기 묘사된 신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두 가지 설로 다시 나누어진다. 그 중 첫째 설은 여기 묘사된 사람이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모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설이다. 그러므로 여기 묘사되고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남의 경험을 일인칭 화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바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의 주장자들은 신자도 이같은 갈등을 항상 겪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둘째 견해의 둘째 설은 여기 묘사된 사람이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은 고전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신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두 견해 더 나아가서 네 견해는 다 각각의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우선 여기 나오는 사람이 결코 신자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고대의 교부들, 리델보스, 로이드 존스 등)의 근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7:14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표현은 죄의 종이 되어 죄의 지배를 받는 불신자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지 신자에게는 적합지 않은 표현이다. (2) 7:18의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열매인 선행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와는 다른 것이다. (3) 7:24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는 탄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얻은 신자의 상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4) 7장에 묘사된 사람의 전체적인 경험이 6장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난 신자의 삶과는 상충된다.


 

다음으로 여기 나오는 사람이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 종교개혁자, 브루스, 머레이, 크랜필드, 헨드릭슨 등)의 근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7:15-21에 묘사된 '나'는 죄를 싫어하는 반면에 선행을 원하는 사람이다. 특히 7:15에 언급된 바와 같이 '죄를 미워한다'는 것은 불신자에게는 전혀 합당치 않은 일이다. (2) 7:22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거듭나지 않은 자,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한다. (3) 7:24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절규는 사람이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죄의 몸으로 인해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갈5:16-18) 외친 것이다. 즉 여기 묘사된 사람이 곤고함을 외친 것은 그가 죄의 노예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연약함 때문이다. 죄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영으로써 몸의 행실(욕구)과 부단히 계속 싸우지 않으면(8:13) 여전히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상황으로 인해 탄식하는 것이다. 죄의 위험이 신자 안에서 현실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긴장 상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탄식은 당연하고 솔직한 태도이다. (4) 7:25上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표현은 구원받은 성도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말이다. 이 고백 후 7:25下에서 다시 탄식한 것은 육체의 연약함에 대한 7장 전체의 결론을 되풀이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여기 묘사된 사람은 거듭난 신자가 already not yet 의 상황에서 겪는 갈등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어느 주장이 더 타당한가? 우리는 이 두 견해가 다 문제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바울이 의도한 바와 다른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로마서 7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즉 바울은 다시 한 번 사람의 무눙과 절망에 대해 확인시켜 줌으로써 사람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은혜와 믿음을 붙잡고 성령으로 행해야 함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이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둘 간에 차이가 있다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란 자기의 육신적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육신적 생명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거듭난 생명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육적 생명으로 살려고 한다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육으로 행하려는 사람은 신자든 불신자든 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신자가 자신의 육적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일인가 하는 것을 일깨우려고 하고 있다.


 

결국 로마서 7장에서 묘사된 경험은 거듭난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선을 행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겪게 될 갈등과 절망을 묘사한 경험인 것이다. 육체의 능력으로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그가 도덕주의자이든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이든 거듭난 신자이든 결국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갈등과 절망을 똑같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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