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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과 - 성령을 좇아 행함

2010.05.06 14:14

이상봉 조회 수:3315

 

 

 

제17과 성령을 좇아 행함 (8:1-9)


거룩한 삶의 길


4.성령(생명)으로 말미암는 자유와 승리의 삶 (8장)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7에 나오는 이 말씀은 육신(인간)의 실상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한 바울의 롬7:14-25을 바탕으로 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앞 구절인 갈5:16에서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함으로써 그 답을 확실하게 제시했다. 로마서 8:1-17은 이 갈라디아서 5:16의 말씀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자유와 승리(의 삶)에 대해 말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죄와 싸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하여 아들의 생명(의 능력)으로 싸운다면 항상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1.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아들의 생명을 누리게 됨 (8:1-13)


 

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가?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여기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의 세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첫째,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죄책(罪責)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결과적으로 우리 양심의 자유도 가져온다.


 

둘째, 이 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실상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말은 {죄 문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죄와 심판과 관련지어서 보시지 않는다. 다만 아들로 보신다. 그리스도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나 의인이 아니고 다만 아들일 따름이다. 결국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는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정죄함이 없는 일차적 이유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사람의 죄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정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 문제는 단지 법적 칭의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말할 때는 죄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생명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정죄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생명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크고 강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죄의 생명을 이기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3.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또는 성령님)의 생명을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법(힘)으로 표현한 것이다.


 

4.죄와 사망의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육신(자연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성(罪性)을 하나의 법(힘)으로 표현한 것이다.


 

5.죄와 사망의 법은 어디서 역사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어디서 역사하는가?


 

죄와 사망의 법이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나 다 생명체(사람) 안에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생명의 법'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둘 다 사람 안에서 역사한다. 다만 그 사람의 생명이 어떤 생명이냐에 따라 작용하는 법이 달라질 따름이다. 각 법은 그것이 작용하는 각각의 생명에 자동적으로 역사하며 그것은 결코 바꾸어지지 않는다. 즉 육신(自我, 옛 사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도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 즉 십자가를 거쳐야 한다. 죽은 사람은 그에게 운명적으로 따라 다니던 죄와 사망에서 자동적으로 해방된다. 죽은 자는 생명체가 아니므로 그 어떤 법도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은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 대신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등장하여 그를 주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 대해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기가 죽은 자임을 믿고) 성령께 복종한다면 죄와 사망의 법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6.사람에게 나타나는 죄와 사망 또는 생명과 성령의 역사(현상)를 '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죄'와 '죄의 법'의 차이는 무엇인가? 죄는 하나의 현상이지만 죄의 법은 죄를 계속 짓도록 만드는 하나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현상(사실)이란 어떤 일이 단지 일어나는 것이지만 법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예외 없이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일련의 연속적인 작용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원리가 바로 법이다. 아담에 속한 자가 죄를 짓는 것은 어쩌다가 벌어지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함 없는 일어나는 보통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단지 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죄의 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 안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강력한 원리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단지 어쩌다 보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법이라는 한 절대적인 법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사망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사망은 현상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사망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타락한) 사람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영생할 수 없는) 어떤 성질' 곧 사망의 법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단지 죄나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법보다 강한 법 또는 이 법 위에 우선하는 다른 법의 지배를 받게 될 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인력(중력) 현상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면 인력을 피할 수 있다. 그것은 비행기의 나는 힘이 인력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나는 힘이 밑에서 당기는 힘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람은 인력의 법에서 해방 받는 것이다. 또 우리는 땅에 묻힌 씨가 싹이 틀 때 단단한 흙을 뚫고 위로 치솟아 올라오는 것을 본다. 이것은 분명히 인력의 법을 이기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작용 때문이다. 그 생명의 법은 언제나 나무로 하여금 인력의 법을 이기고 (아래로가 아니라) 위로 올라가게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도록 하신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작용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실질적으로 해방될 수 있도록 하셨다.


 

7.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에서 생명이라는 말은 이 법이 가진 어떤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졌으며 성령이라는 말은 어떤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것인가?


 

생명의 법 또는 성령의 법이 지닌 큰 특징은 그것이 우리 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매우 자연스럽게 그것을 시행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자연스러운가? 그것은 이 법이 율법처럼 사람 밖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 안에서 작용하는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본능이나 반사 신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가르치거나 묻거나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없이 역사한다. 우리는 눈을 정기적으로 깜박거린다. 그것은 항상 눈을 촉촉히 적시거나 눈의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적당히 깜박거려지게 된다. 생명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도록 믿기만(맡기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든지 안되든지 주님의 생명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생명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없을 뿐 아니라 해서도 안된다. 만일 누구든지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서거나 성령의 역사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려 든다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두려운 일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자기가 나서서 억지로 무엇을 잘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생명의 작용을 막아 아무런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만든다. 성령님은 병든 어린아이가 아니다. 우리가 그의 일을 불안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고 불신앙적인 태도이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안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몸을 주장하시고 명하시는 바에 대해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도 있다. 만일 그 교육이나 훈련이 성령 안에서 행하는 훈련, 믿음으로 행하는 훈련이라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율법적인 생활의 원칙들을 배워서 그대로 써먹으려고 하는 훈련이라면 그런 학습과 훈련은 쓸데없는 일이며 잘못된 것이다. 생명의 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하게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안에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자기 머리(理想) 속에 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억지로 거룩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외식이다. 사람들이 외식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사람이 그의 타락한 육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위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히 하나님(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그 아들의 생명이 피조물 가운데서 온전히 역사하여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 육신의 생명으로 (선한 일이든 위대한 일이든) 무엇을 할 때 하나님은 영광이 아니라 모욕을 받으시며 멸시를 받으신다. 왜냐하면 사람이 육신으로 일할 때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이 무엇을 해도 좋으니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하라고 부추긴다. 그는 종종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어서 일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성령의 지혜와 능력 대신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역사하여 어떤 열매를 맺을 때만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오직 생명의 흐름을 따라 진실해야 하며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위선적인 꾸밈도 있어서는 안 된다.


[성령으로 행함]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5)


 

롬5:12-6:23이 다루고 있는 바가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대비하는 것이라면 롬7:1-8:39이 다루고 있는 바는 '육(육신) 안에서'와 '영 안에서'의 삶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 네 사실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앞의 두 사실은 우리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이고 뒤의 두 사실은 우리의 실제 삶에 있어서 행동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가 비록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성령(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롬8:1-17은 전적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실제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부분이다.


 

육은 아담과 연결되어 있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제 아담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사는가 아니면 성령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 라는 말은 성령을 소유하는(받은) 것과 실제로 범사에 성령을 좇아 사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참고 : 갈5:25에서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말하고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은 성령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육으로 사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의 원리이다. 육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옛 생명 곧 아담의 생명의 특징은 죄 짓는데 매우 적합하며 육적 욕망을 달성하는데 매우 민첩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매우 적합하며 거기에 자연스럽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행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거듭난 생명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다. 즉 그가 알고 믿는 바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아가 죽은 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나 힘이 없는 바보가 된 것은 아니다. 자아의 죽음은 막바로 성령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안에는 전에 없던 그리스도 지혜와 능력이 역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도 실제 생활에서 사탄에게 속아 새 생명(성령)으로 행하지 않고 자신이 여전히 옛 사람인양 육신을 따라서 행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자기 실제 생명(그리스도의 생명)과 거짓 생명(육신의 생명)을 혼돈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이라도 성령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며 아무리 그리스도와 그 진리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의 삶에서 나타날 것은 오직 육신의 열매와 거짓된 삶 뿐이다. 이런 사람의 문제는 그가 단지 어떤 영적 사실을 알고 있을 뿐(객관적으로 붙들고 있을 뿐) 실제로 그의 생명(의 지식)을 따라 행하지 않는데 있다. 이런 경우 그가 붙잡고 있는 영적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실제적 역사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문제는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명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 순종하지 않는 생활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친히 일하십시오" 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을 하라고 하시면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면 저것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일하는 것이다. 이럴 때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사실상 자아를 묶어 놓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일뿐이다. 즉 '믿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현저한 특징은 {자기 부인}과 {평안}(안식)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먼저 일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싸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일이 된다. 그리고 그는 범사에 스스로 발버둥을 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는 아무 힘도 들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히 안식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에서 유의해야 할 두 가지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지도 못하면서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던 모든 노력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골1:29)를 믿는 믿음에게 자리를 내주고 안식해야 한다.


 

둘째, " 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복종을 의미한다. 육신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육신의 명령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롬8:5-8은 육신을 좇아 행할 때 사람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육신을 좇아 행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과 싸우고 원수 되는 길로 갈 뿐이다. 이에 비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 밖으로 나간다면 그는 벌써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의무는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태도' 없는 '성령을 좇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후13:13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축도는 우리가 성령을 좇아 순종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부요(富饒)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주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신령한 부요를 얻을 수 있도록 실행했다. 그리고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우리를 위한 그 부요가 우리 안에서 실제로 누려질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계획된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 실행되고 완성되었으며 성령님을 통해 전달되고 누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순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생명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철저히 좇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 생명(믿음)으로 살지 않는데 있다.


8.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셨다는 일이란 어떤 일을 말하는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4)


 

"....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4)


 

"....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6:19)


 

율법은 다만 사람에게 거룩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을 뿐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는) 실제로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율법은 사람 안에 지식을 줄 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나 성령님은 사람 안에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하여 사람을 실제로 구원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내용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죄를 짓지 않게 됨', '율법의 요구를 이룸', '하나님을 섬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음', '생명에 이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등. 이런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신 일이란 바로 이 구원을 말한다.


 

9.왜 율법은 사람을 율법이 말하고 있는 세계로 인도할 수 없었는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롬8: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7)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죽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죽은 이상 율법이 아무리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준다 할지라도 사람이 그리로 나아갈 수는 없다.


 

10.율법이 못하던 것을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하셨는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4)


 

하나님의 방법은 그리스도와 성령님이다. 즉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우리 안에 생명의(살리는)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로마서(주로 3-8장)는 특히 이 사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롬8:3,4에는 두 가지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다. 주님의 역사는 과거 역사이고 성령님의 역사는 현재 진행되는 역사이다. 육신은 죄로 죽은 것이며 따라서 연약한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가 육신대로 사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을 쓰셨는데 그 첫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시고 그 육신에 '죄를 정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담에 속한 모든 옛 창조를 포함시켜서 단번에 처치하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가지고 있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후속 조치가 필요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두 번째 방법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르기만 하면 저절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11.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모든 사람에게 저절로 역사하는가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 제한되는가? 만일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 제한된다면(제한적으로 그 효력을 나타낸다면)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되는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믿는 자 또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 안에서만 적용되고 누려진다는 것이다. 곧 삶에서 실제로 자기(육신적 생명)를 부인하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만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구원의 적용 대상을 단순히 믿는 자 곧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라고 말할 수도 있었으나 그 믿음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실제적인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12.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두 가지로 말해 보라.


 

율법의 요구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거룩한) 분이니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은 너희도 이렇게(거룩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4-16) 율법의 두 번째 요구는 그렇게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면 심판을 받아 죽으라는 것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13) 그러므로 요약하면 율법의 첫째 요구는 적극적이고 본질적인 요구로서 율법이 말하는 바대로 행하라는 것이고, 율법의 둘째 요구는 소극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서 율법을 범한 자가 그 죄의 형벌(죽음)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두 번째 요구를 이루셨고 그 후 영(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사 율법의 첫째 요구를 또한 이루신다. 즉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얼마든지 섬길 수 있도록 일하시는 것이다.


 

13.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5-8)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1-23)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7)


 

각 생명에는 각각의 법이 작용한다. 육신의 생명에는 육신의 법이 영의 생명에는 영의 법이 작용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러므로 육신을 좇는 자 곧 육체의 욕망 아래 자기를 내맡기는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의 작용에 따라 육신의 쾌락을 좇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령을 좇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 외에는 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정함이 없는) 욕망대로 몸을 끌고 가려고 한다. 반대로 성령님의 욕망(뜻) 역시 거듭난 사람 안에서 육체의 욕망을 누르고 당신의 뜻대로 몸을 주장하려고 한다. 사람은 어느 한 쪽밖에 지지할 수 없으며 어느 한 쪽밖에 따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하기로 작정하면 우리는 저절로 성령을 거스르게 될 것이며, 반대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로 작정하면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누르려고 억지로 애쓰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그것을 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즉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영을 좇는 사람은 영의 일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취한 각각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그야말로 '생명으로 역사하기'(왕노릇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도저히 거스릴 수 없는 것이다.


 

14.성령의 충만함, 성령의 인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0-16)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히8:10-11)


 

성령이 없이는 즉 영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는 것은 (타락 후) 사람이 본래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죽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바울이 롬8:9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을 돕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부정하러 오신 분이다. 육신은 고치거나 도울 정도로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죽기에만 합당하다. 하나님과 사람은 전혀 딴판이어서 그 어떤 접촉점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과 상관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은 이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새로운 생명으로 역사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생명이다. 신약의 최고 축복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명 안에서 알 수 있도록 된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지혜와 감각으로 어렴풋이 더듬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실제적이고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15.육신의 생각의 결과와 영의 생각의 결과를 말해 보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19-23)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육신의 생각의 결과는 사망이다. 그것은 타락한 후 육신은 (하나님에 의해) 죽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라 무엇을 추구하는 것은 다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영을 좇은 생각의 결과는 영생과 평안, 모든 영원하고 완전한 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라 추구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영원할 수밖에 없다.


 

16.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있다(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분명히 육신 또는 자아를 가진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그것대로 사람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에 속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롬7:25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바울의 환호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 이것은 삶의 주체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사람은 자기 인격과 생활에서 변화를 느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변화]가 아니라 [교체](대체)된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죄인 그대로이며 죄의 몸, 사망의 몸을 입고 사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은 그러한 우리를 그대로 둔 채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넣으신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를 그대로 둔 채 우리를 빼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교체인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오직 영 안에서 일어난 변화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관념의 세계 안에서만 역사하는 가공의 체험 수단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믿는(순종하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는 실제로 생명의 능력이 되신다. 이것은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하나님)이 확장되는 것이요 충만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再現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중생과는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으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심어진 생명이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형제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라고 했다. 생명은 낳아지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고 자라서 완전케 될 때에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계속 믿음으로 생명을 받아들이고(인식하고) 누리고 확장되어야 한다. 생명 안에는 이러한 필요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있는 어떤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해결을 구하며 기도한다. 그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화를 내고 혈기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인내를 달라거나 혹은 어떻게든 성질을 죽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자신을 혈기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그 자체가 혈기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성질로 말할 것 같으면 죽지 않는 한 혈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교만과 정욕과 미움을 없애고 겸손과 거룩과 사랑을 심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우리 몸(육의 생명)의 성질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라도 육을 거룩하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시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혈기를 죽여 달라고(온유하게 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온유를 나타내게 되도록 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그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안되면 불법을 써서 억지로 일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은 이상 자기를 그렇게까지 낮추고 오직 믿음으로만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의 낮고 천한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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