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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돌아보는 것 (3)

(고린도후서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이란 지금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아 입고 있는 현재의 몸을 말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부활을 거쳐서 새롭고 완전하게 구속된 몸을 말한다. 소망과 믿음은 계시에 근거한다. 본 것이 있어야 붙들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바울은 눈에 보이는 현재의 몸과 현재의 삶말고 다른 몸과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디서 그것을 보았는가? 물론 성령님의 계시를 통해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과 함께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새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위해 예비된 새로운 몸과 새로운 삶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육신은 괴롭고 약하고 쇠해지는데 속에서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힘과 능력이 작용하는 것을 날마다 느꼈다. 새 생명은 하늘에서 누리게 될 새 몸의 능력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새 몸을 입기 전인 지금도 우리(의 죽을 몸)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만든다.

바울은 현재 우리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0,11)

이것은 몸과 영의 기이한 조화에 대해 말한 것이다. 몸은 죄로 인해 죽어지고 썩어지는 옛(아담의) 몸 그대로인데 영은 새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이란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되살아난 우리의 참 생명을 말한다. 이 생명은 성령(하나님의 영)과 연합하여 하나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이치로 본다면 이 영은 장차 우리가 입게 될 새 몸에 있어야 하지 지금의 낡은 몸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죽을 몸에 이 하늘의 생명이 역사하도록 조치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에도, 즉 이 죽을 몸, 약한 몸에 거하는 동안에도 낙심하거나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영생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 수 있도록 도우려고 행하신 일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몸은 근본적으로는 약하지만 날마다 위로부터 오는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충분히 쓰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몸이 약하고 쇠해짐으로써 마음이 위축되려고 할 때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고 태연하게 약함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허물을 벗는 것을 아까워하고 애통해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에게 있어서 죽어가는 것은 벗어야할 것을 벗고 새로 입어야 할 것을 입게 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 몸의 약함과 쇠약해짐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 안에서 하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을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소망 중에 약속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 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킴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 표준새번역)

왜 갈망하면서 신음하는가? 약하고 쇠하는 것은 무조건 벗어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고 이 몸이 주님의 목적에 적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제한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장차 우리가 입게 될 새로운 몸도 제한이 있을 것이다. 물질적 존재는 언제나 제한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키가 170cm라면 그것은 180이나 190cm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은 정한 몸이 없다는 것 곧 유령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장차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몸도 분명히 제한을 가진 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몸이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까닭은 자기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몸이 다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원하는 대로 다 되는 몸을 입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제한없이 다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문제는 제한된 몸이 아니고 제한과 정함이 없는 마음이다. 밑도 끝도 없는 욕망, 모순되고 불가능한 인간의 죄된 욕망을 다 채울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 마음은 종종 고장난 컴퓨터가 정신 없이 불을 번쩍거리며 오락가락하듯이 동시에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을 어떻게 몸이 만족시킬 수가 있겠는가?

천국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의 모든 정함 없는 욕구를 다 만족시키는 희한한 몸을 입고 사는 나라가 아니요 정신이 바로 되고 제 자리를 찾아서 즉 그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 추구하고 진리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맞는 몸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몸을 벗고 싶다고 한 것은 이 몸 안에서는 우리 육신의 정욕과 야망이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더 완전하고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것의 방해나 제한도 받지 않고 주님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마귀와 죄와 저주로 점철된 이 환경을 벗고 주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새 환경, 새 몸을 입기를 갈망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지금 이 몸도 그런 대로 쓸만하며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아직 그다지 늙거나 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육신의 욕망 자체는 정함이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다 만족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몸과 그 능력이 약해지면 생각을 축소하고 욕망을 절제하면 그다지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조차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나도 이 몸보다 더 좋은 몸을 입고 사는 것이 어떨까 기대가 되기도 하고 그것을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신의 기분이나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영의 만족이다. 우리가 이 몸을 통해 불편을 느끼는 것은 주님을 위해 우리 몸을 드리려고 할 때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이 그야말로 죽은 몸이며 성능이 형편없는 몸이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 몸은 몸의 안락을 거스려 행하는 모든 것 곧 기도나 금식이나 힘들여서 진리의 말씀을 궁구(窮究)하고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으며 진리를 배우는 것이나 남을 위해 수고하며 희생 봉사하는 것을 다 싫어하며 거부한다. 사실 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육신은 생존 본능으로 인해 자기를 죽이면서, 없는 것을 짜내면서 무엇을 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몸의 구속을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들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일들을 제한 없이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실제로 우리가 그런 자유와 완전한 헌신을 누릴 수 있도록 새 몸, 새 환경을 예비해 놓고 계신다. 몸의 구속, 몸의 해방은 바로 이런 면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우리 마음이 든든한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으며 평안하고 안전한 길을 걸어가기 때문인가? 이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고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바울은 환상이나 망상 가운데 있지 않고 자기의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즉 지금 우리는 육신으로 주님과 연합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생명과 능력을 힘입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새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헌 사람이고 죽어가며 쇠해지는 사람이다. 이것을 되살리고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몸으로 주님을 제한없이 마음대로 섬길 수 있을 줄로 생각하고 조심없이 행동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약한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다만 이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고 있고 약함 속에 강함을 체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안하고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좁고 험한 길, 핍박과 고난이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예산서에는 조금도 환상적이고 망상적인 계획이 들어있어서는 안되고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실제만 들어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이 평안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신적, 환경적으로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서 담대했으며 망상과 자기 생각이 아니라 약속과 진리 안에서 담대했다. 그가 육신적 난관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육신의 까닭으로 이 몸을 벗는 것이 아니요 또한 단지 이 몸을 그저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대해 무능하고 약한 이 몸을 벗고 하나님께 대해 능력 있고 순종하는 완전한 새 몸을 입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육신적 삶의 불편이나 육신 자체의 성능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제한 받기 때문에 탄식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이 약한 것과 죽을 것과 무능한 것이 강력한 생명에 삼켜져서 완전히 해소되고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섬길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죽어서 새 몸을 입어야만 주님을 충분히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여기대로 주님을 섬길 것 따로 있고 천국에서는 천국대로 주님을 섬길 것이 따로 있다. 이 몸으로는 주님을 못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 나름대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그리고 몸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기만 기다리고 천국에 갈 것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여기서 진리로 악을 이기고 말씀과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마귀의 거짓말과 사망 권세를 깨뜨려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여기 남아 있는 동안에는 기쁨으로 그리고 사명감을 가지고 힘써 살아야 한다. 죽든지 살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그의 나라에 기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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