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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자유와 구속 / 고전9:1-27

2010.05.01 11:42

이상봉 조회 수:6701

바울의 자유와 구속 / 고전9:1-27
 


37.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구속

바울은 자신을 자유인으로, 사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 가운데서 보고 체험한 자로 소개했다. 그리고 전도자로서의 열매가 있는 자로 소개했으며 그 열매가 바로 고린도교회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참으로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바울이 사도요 전도자임을 증명하는 열매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바울의 사도 됨을 부인할 수 없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의 사역을 위해 생활의 모든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그의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그들은 일을 하는 한 『먹고 마실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무원은 국가로부터, 직장인은 회사로부터, 머슴은 주인으로부터 그 필요를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필요를 당연히 공급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공급은 대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에게 헌신하게 된 사람들, 그 마음에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감동을 받은 사람들로 인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역자라는 차원에서 특별히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그보다 더 기본적인 권리 즉 한 남자로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권리로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세우고 섬긴 교회들 곧 고린도교회 형제들이나 에베소교회 형제들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고정적인 월급이나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지도 않고 (혹은 결혼을 했더라도 아내를 데리고 다니지 않고)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맞는 생활 구조와 인간 관계를 설정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유와 권리를 바쳤다. 바울이 이런 일을 한 것은 그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천국의 큰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한 것이요 또한 그의 생명 안에서 마땅히 그런 일을 할 부담을 가져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로서 자기가 상 받을 일을 하는 것 즉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큰 축복과 특권이요 또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라는 생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 하는 것처럼 일했다. 그러므로 그의 봉사는 안해도 될 일이거나 하면 주님에게 칭찬과 상 받을 일이 아니라 안하면 주님의 책망과 자책이 따를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사역에 따르는 권리를 포기하고 온통 주님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세우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과 존경과 존귀히 여김과 생활의 지원 및 기타 그가 마땅히 받을 대우와 대접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를 굶어 죽게 내버려두거나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거나 버림을 받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대로 사역을 했다면 그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도 그를 모른 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어떠하든 바울의 마음 자세는 그것들을 스스로 추구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종종 복음으로 인해 고난과 멸시와 오해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될 때 억울해 하거나 항의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에서 지나 ‘허비하는’ 상태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14:3-9)  

여기 나오는 한 여인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그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비싼 향유를 병째로 주님께 갖다 부었다. 향유는 조금만 발라도 되는 것인데 주님의 몸에 그것을 쏟아 부은 것은 주님이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님을 향유 전부보다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합리적이고 의무적이고 상식적인 선을 넘어버렸다.

제자들은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 따졌다. 그들의 눈에는 주님께 향유를 다 붓는 것보다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낫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칭찬했으며 그녀가 무가치한 일을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을 했으며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일 곧 지음 받은 사람의 본분을 다 한 것으로 간주하셨다.

뜨겁게 사랑하는 두 사람 간에는 모든 것이 지나치다. 거기에 합리와 상식과 냉철한 계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 말미암는 열정적인 헌신과 봉사가 있을 따름이다. 애인이 좋아하는 옷을 사주기 위해 그것을 훔치거나 강도짓을 하는 청년들도 있다. 이런 일이 좋은 일은 아니며 우리는 그런 일을 인정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 그런 성질이 숨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께 열정적인 사랑과 헌신을 하도록 지음 받았다. 이는 마치 불이 났을 때 자고 있는 주인을 위해 몸에 물을 묻혀 와서 불을 끄는 행동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기는 불에 타서 죽고 만 어떤 충성스런 개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정상이라면 그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 때 누구나 이런 봉사와 헌신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지식은 우리를 그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사랑과 그를 위해 ‘인생을 허비하는’ 자리로 이끈다.

바울은 17절에서 자기가『직분』(oikonomia)을 맡았노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께 값으로 산 바 된『종』이요 그에 따라『청지기 직분』이라는 일을 맡은 자라는 것과 아울러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경륜, 계획)을 아는 지식이 있어서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대적『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지우신 이런 직분과 마음의 부담을 따라서 일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을 행한 후에는 의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부담을 벗었다는 안도감은 있을지언정 주님의 상(칭찬)을 기대할만한 큰 기쁨과 깊은 만족을 누리기는 어렵다.

무릇 그런 것을 기대하려면 사무적이고 의무적인 봉사를 넘어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더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깊이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려는 내적 생명의 갈망이 심히 큼으로써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기까지 ‘더 하는’ 헌신이 있어야 기쁨이 있는 것이다.

더 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마땅히 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로부터 고정적인 생활비(월급)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역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가정도 꾸리지 않았다. 그가 가정을 꾸리거나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은 그런 일들이 잘못된 일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상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약한 형제를 고려하여 먹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복음에 장애를 초래한다면 그리하여 주님이 건지신 귀한 형제들이 생명을 잃거나 다치게 된다면 아무리 옳고 정당한 일이라도 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 밖의 양보와 희생, 자기를 낮추는 일도 주저없이 했다. 그는 심지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자리로 자기를 낮추었다. 그는 혈통적으로는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우주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의 선민 의식을 버리고 사실상 유대인으로서 행세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자기를 유대인의 세계로 도로 넣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관습과 관심사,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들과 접촉점을 찾았다.

또 유대인이 아니라도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그 자신이 비록 율법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율법을 존중히 여기고 그런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작은 부분을 붙잡아 접촉점으로 삼았다.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아울러 자기 의를 드러냄으로써 자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그런 잘못된 형태로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보려고 하는 좋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울은 이런 것들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좋은 접촉점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그 길로 들어가서 그 사람과 접촉했다. 그 길로 들어갈 때만 그의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땅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판단하고 대할 때 마치 하나님의 보좌에서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처럼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나중에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의 상태가 어떤가, 그를 어떻게 하면 그를 살릴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접촉점이 있으며 어떤 생명의 기회가 주어져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우리는 재판장도 아니고 설사 우리에게 그런 권세가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런 판단과 심판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우선, 우리의 구원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가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들과 같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한 이유는 자기가 이 생명의 복음에 확실히 참여하여 마지막에 확실히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이나 각종 사회 단체에 가입하여 사회 운동이나 시민 운동에 가장 열심히 참여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이 그런 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거나 어떤 손해를 보았거나 이런 저런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남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를 잘 되게 하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생존과 이익과 그것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겸사 겸사로 그런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구원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사람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는데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희생하며 헌신하며 봉사하는 열녀열부와 같은 위치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로 우리 문제이다.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그녀에게 주 예수님이 남편이요 아버지요 친구요 재산이요 미래요 모든 것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주님을 위해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은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받아주는 구원자를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일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 생명과 인생과 재산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쓴 것이다.

우리는 허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어떤 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잘못 써버린 것을 말한다. 물건이든 인생이든 자유와 권리이든 세상에다 쏟아버린다면 그것은 분명 허비이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을 위해 쓴다면 어떤가? 그것은 나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라는 다른 존재를 위해 썼으니 허비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 안에 내가 있고 그분 안에 내 인생과 나의 미래와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허비가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며 나를 사랑한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 절제하고 자기를 위해 희생하고 자기를 위해 권리를 양보하고 자기를 위해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며 열심히 뛰었다. 그것은 의무로 보더라도 마땅히 수행해야할 의무였고 인생의 특별한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이 자기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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